불기 2568. 10.26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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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형곤 박사님을 회상합니다"
고형곤(高亨坤) 박사님 회상(回想)
-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에 얽혀 -
정각스님 / 원각사 주지

1996년 봄, 아버지의 외삼촌 되시는 고형곤(高亨坤) 박사님으로부터 일간 집에 방문하라는 갑작스런 연락을 받았다. 어렸을 적 아버지로부터 종종 이야기를 들어 왔으며 집에 있던 그분의 저서 『하늘과 땅과 인간』이란 책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던 - 그럼에도 내 기억에 어렸을 적 몇 번 밖에 뵌 적이 없었고 서울대 철학과에서 퇴임하신 후, 내장산에 십 수년을 은거(隱居)했던 노철학자(老哲學者)로서 신문지상을 통해서만이 접할 수 있었던 - 그러한 그분이 내 머리 속에 오래 남아질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와 외삼촌 고형곤 박사님과의 관계를 통해서였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께서는 해방 후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계시던 외삼촌의 도움으로 경성제국대 법문학부에 입학하셨다. 그리고 6·25 전쟁 중 서울대 대학원을 마친 후 순창 농림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계시던 아버지는, 52년 전북대학교 전신인 전시연합대 학장으로 계시던 고형곤 박사와 가람 이병기 선생의 주선으로 27세에 전북대학교 전임강사(專任講師)로 강단(講壇)에 서게 되었는데, 얼마 후 고형곤 박사께서는 전북대 총장에 재 부임하시게 되었던 것이다.

40년 이상을 대학 강단에 서셨던 만년(晩年)의 아버지에게는 굳이 표명치 않았던 비밀스런 두 가지 꿈이 있었다고 생각되는데, 그것은 전북대 총장직을 맡고자 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학술원(學術院) 종신회원(終身會員)이 되고자 하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 모두는 전북대 총장을 역임하셨으며, 학술원 종신회원으로 학자로서 최고의 명예를 누리고 계신 외삼촌의 길을 아버지 역시 뒤밟고 싶다는 의지의 측면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아버지께서는 두 가지 소박한 꿈을 실현시키지 못한 채 1995년 가을, 질환 속에서 조차 평온히 눈을 감으셨다.
집에서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음을 고형곤 박사님께 알리지 않았다. 그분께서 이미 고령이셨고, 거의 십여 년간 두 집안 사이에 출입이 잦지 않았음이 이유였는데, 나머지 사정에 대해서는 내가 알 바 아니었다.

그런 그분을 20여 년만에 만날 수 있었던 것은 1995년 늦가을, 동국대학교 정각원(正覺院)에서였다. 그때 고형곤 박사님께서는 정각원에서 주최하는 고승법회(高僧法會)의 법사(法士)로 초빙되어 「보조(普照)의 선사상」을 강연 하셨으며, 그때 고 박사님을 만나 뵐 수 있었던 나는 아버지의 유고집 『회고사십상(回顧四十霜)』과 함께 아버지의 부고(訃告)를 전할 수 있었다.

그 후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나에게, 1996년 봄 동국대 정각원 직원으로부터 고 박사님께서 나를 찾고 계시다는 연락이 왔다. 그리하여 20여 년만에 집을 방문한 나에게, 그 분께서는 문득 한 권의 책을 펼쳐 보이는 것이었다. 원효(元曉)의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이었다. 그리고 책 몇몇 부분을 펼쳐 그것을 해석해 보라 하신 할아버지(내 할머니 동생이므로)는 내 해석이 마쳐지자 웃음을 지으신 채, "너 참 공부 많이 했구나!" 하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이제 내 나이 이제 구십 하나인데, 앞으로 2년 정도밖에는 살 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내 죽기 전에 하나의 원(願)이 있다… 내 이제껏 오랫동안 세상을 살면서 참으로 많은 사람들의 은혜를 입었는데, 내 죽기 전 이 책을 제대로 번역해 놓고 간다면 그 많은 사람들의 은혜를 갚을 수 있고… 이 생(生)에 태어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는 말씀이었다. 그럼에도 '이미 고령(高齡)의 나이라 번역을 혼자 하기에는 무리이니, 나와 함께 공역(共譯)을 하면 어떻느냐?' 물으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전 - 할아버지께서 "한학(漢學)의 귀재(鬼才)"라 하셨으며, 아버지의 한학(漢學) 스승이기도 하셨던 - 성락훈(成樂薰) 선생께서 번역한 『금강삼매경론』 번역본을 펼쳐 보이며 몇몇 오류를 지적하신 할아버지는 성락훈 선생의 번역서를 건네주면서, "성군(成君)과 기존 사람들 번역의 오류를 바로잡아 제대로 된 번역을 하라"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예!"라 대답 할 수밖에 없었던 나는 할아버지 말을 들으며 원효란 인물에 대해, 그리고 『금강삼매경론』에 대한 새삼스런 생각을 갖게 되었다. '원효가 어떤 인물이기에… 그리고 『금강삼매경론』이 어떤 책이기에 그 책을 제대로 번역함으로서 평생 많은 사람들로부터 입은 은혜를 보답함이 되며, 그로서 태어남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하는 것이었다.

승려(僧侶)로서, 또한 불교학(佛敎學)을 공부한다는 입장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전 내 전공(專攻)이 인도불교(印度佛敎)였다는 이유로 원효의 『미륵상생경종요(彌勒上生經宗要)』 일부분만을 떠들어 보았을 뿐, 원효사상(元曉思想)에 대해서는 백지 상태였다고 말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었다. 그럼에도 할아버지께서는 원효에 대해 "팔지(八地)의 깨달음을 얻은 성인(聖人)"임을 강조해 말씀하셨는 바, 나는 만년(晩年)에 든 노철학자(老哲學者)의 말로부터 새삼 원효라는 인물을 돌이켜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갖을 수 있었다.

한국불교의 저술 가운데 오직 유일하게 론(論)이란 호칭이 붙여진, 『금강삼매경론』을 번역한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작업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그 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관(中觀) 및 유식(唯識)과 기신론(起信論) 사상에 대한 충분한 앎이 따라야 할 것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번역에 임한 나는 기존의 여타 번역본들을 펼쳐 원문과 대조해 보았는데, 어떤 역본(譯本)에서는 상당 부분이 생략되고 있음을 볼 수 있었으며, 번역상의 오류를 많은 부분들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에 『금강삼매경론』 몇몇 판본(板本)들에 대한 문헌 비교로부터 작업을 시작한 나는, 그럼에도 상당 기간 번역을 진행할 수 없었다. 당시 박사과정에 재학중인 나로서 수업과 관련된 여러 공부 및, 중앙승가대학에서 내가 맡은 소임과 함께 써야 할 논문, 내 책 출판 등의 일로서 도무지 시간을 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할아버지로부터 몇 차례 독촉 전화와 함께 직접 번역하신 『금강삼매경론』 원고 일부를 건네 받기도 하였고, 책 작업이 마쳐지면 조계사에서 한차례 강연을 하고 싶다는 희망을 건네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제자 소광희 교수의 제자인 동국대 김종욱 교수와 함께 몇 차례 작업을 시도코자 하였으나, 그때마다 개인 사정으로 그 일에 매진할 수 없는 채 여전히 『금강삼매경론』은 내 마음 속 숙제로 남아 있었다.

죄송한 마음에 연락조차 할 수 없었던 나에게 고형곤 박사님 별세 소식은 충격이었다. 문상차 병원 영안실을 찾은 나의 발걸음은 한없이 무겁기만 하였다. 그럼에도 영정(靈幀)을 뵙고 돌아오는 길, 『금강삼매경론』 번역을 통해 "삶의 은혜를 갚고, 이생에 태어난 의미를 찾을 수 있으리라" 말씀하시던 노철학자의 영혼은 아마도 도솔천(兜率天) 원효(元曉) 각령(覺靈) 전에 나아가 여여(如如)함을 누리고 계시리라 위안 삼은 채, 청송재(聽松齋)에서 써 주신 소동파의 [득도게(得道偈)]를 읊조리며 남기고 간 미완(未完)의 과제를 생각해 본다.

"도득환래무별사(到得還來無別事)
여산연우절강조(廬山烟雨浙江潮)
깨달음 얻고 돌아오나 얻은 바 없어
여산(廬山) 폭포 물안개 자욱하고, 절강(浙江)가엔 조수가 밀려들 뿐…"
2004-07-09 오전 11: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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