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승단 성장의 중심에는 도제 양성에 헌신한 수많은 어른스님들의 원력을 무시할 수 없다. 수행자의 위의를 닦는 승려교육기관으로서 뿐만 아니라 교학발전의 터전이 되어온 사미니 강원 교직자들과 학인들의 끝없는 정진현장에서 한국 비구니의 미래를 가늠해 본다.
수원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 사찰인 봉녕사에는 단정히 좌정한 학인들의 낭낭한 독경소리가 하루종일 끊이지 않는다.
현재 강주 묘엄 스님의 지도 아래 강사 도혜, 적연 스님, 중강 동명, 설오 스님이 120여명의 학인들을 가르치고 있다.
봉녕사는 매년 종강때 마다 다른 강원에서 실시하지 않는 통과의례를 실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치문반과 사집반은 12월 종강 후 3000배 철야정진을 하고 이튿날 곧바로 수원 화성 성곽 4대문을 순례한다.
수원시내에는 아직도 50여명의 봉녕사 학인이 새벽 눈길을 헤치고 화성을 걸어 오르는 모습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강사 적연 스님은 “이것은 강원 개원 초기부터 내려오는 전통으로 이런 과정을 통해 신심과 자신감으로 얻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말했다.
매년 봄 실시하는 다담회도 봉녕사 강원만의 자랑이다. 학인들은 ‘수제비대회’라고 부르는 이 행사는 진달래꽃이 만발하는 봄이면 광교산 일대의 산나물과 꽃을 따서 음식 경연대회를 벌이는 행사다. 학인들은 갖가지 화전과 수제비 등을 만들어 강주스님 앞에서 솜씨를 자랑한다. 여름에는 이와 비슷한 수박대회가 열린다.
봉녕사 강원의 교과과정은 내ㆍ외전에 치우치지 않고 매 학년 다양한 분야의 특강을 실시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교과과정 가운데 내전은 다른 강원과 마찬가지로 교육원에서 정한 정규과목을 중심으로 가르친다. 매주 목요일 오후는 운동시간으로 반별 체육대회가 열리고 금요일은 외부강사를 초청해 특강을 실시한다. 전 학년이 공통으로 수강하는 외전은 염불, 중국어, 영어, 일어, 꽃꽂이 등이다. 이밖에 사집반은 선가귀감, 대총상, 인도불교사, 피아노를 추가해서 배우고 있다.
학인들은 군 포교와 봉사활동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특히 안양 소년원의 청소년 교화 활동은 20년 넘게 지속해 오고 있다. 매년 정심여중ㆍ고에 재학 중인 소년원 청소년 30여명을 봉녕사로 초청해 수계식을 치러 주고 있다. 또 수지 인근의 군법당 ‘호국 흥국사’에서 매주 군 장병들을 위한 법회에도 힘을 쏟고 있다.
금강율원
율주에 가산지관(伽山智冠) 스님, 율원장에 묘엄 스님을 모시고 1999년 6월 21일 세계 최초의 비구니 율원 ‘금강 율원’이 개원됐다.
금강율원은 2년간의 교육과정으로 운영되며, 율장의 전문적 연구와 율학(律學)을 전승할 율사(律師) 양성 등을 목표로 한다. 교과목은 1년차때 계율 개론, 사미니 율의 및 주석서, 남북전율장 비교 연구, 선원청규 등이며 2년차 때는 사분비구니 율장, 범망경, 비구니 교단사 (인도 , 중국 , 한국 비구니전) 등이다. 현재 5기 율원생 9명이 수학하고 있다.
동문회 ‘선우회’
1976년 결성된 선우회는 주로 동문간의 친목과 후배들을 위한 장학사업을 펼치고 있다. 현 회장은 부산 대원사 주지 정운 스님(6회)이다. 그동안 봉녕사 강원이 배출한 졸업생은 600여명. 주요동문으로는 석담(미국 버지니아대 연구원), 비구니 최초로 조계종 총무원 문화부장을 지낸 탁연, 법중(완주 위봉사), 선정(거제 관음사), 일운(울진 구룡사), 상일(전 봉녕사 강사), 영제(서울 향림사), 경륜 스님(서울 석불사) 등이 종단의 중진 스님으로 수행과 포교에 힘쓰고 있다.
이밖에 본각(중앙승가대), 법녕(동국대 강사), 원찬(진주 유정사), 현준(행자교육원), 대림(청정도론 번역), 지운, 성견(의정부 회룡사), 흥수(기본선원), 적연(봉녕사 강사) 스님 등이 이곳 출신이다.
또 사찰음식으로 유명한 선재, 사회복지에 지관, 동국대 강사 운월, 불교미술에 귀일 스님 등이 각각 전문분야에서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강주 묘엄 스님
“중노릇 잘 하려면 바르게 배워야지”
“일심으로 정진해 올바른 중노릇 하라 가르치는 게 내 일이요, 그렇게 33년을 살았어요.”
묘엄 스님은 1931년 진주에서 태어나 14세에 출가, 문경 대승사에서 비구니 월혜 스님을 은사로 득도. 1945년 성철 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받았다. 스님은 성철 스님이 계를 준 유일한 비구니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일생을 출가수행자의 사표로 살아오신 스님에 대한 봉녕사 사부대중의 존경이 남다르다.
스님이 지금의 봉녕사로 오게 된 것은 1971년. 운문사를 떠나 그해 4월 선방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문중스님 30여명을 이끌고 봉녕사에 도착했다.
1974년 봄에 학인 30명을 뽑는다고는 신문광고를 냈더니 학인 50명이 모였다. 강사 묘엄 스님에게 배우겠다며 전국 각지에서 비구니들이 모여든 것이다.
“이듬해 1975년에 20명을 더 뽑아 70명이 20평 좁은 요사에서 ‘묵살이’하며 살았지만 그때는 이것도 오감하다하면서 (공부)했어요.”
스님은 모든 것이 부족하고 힘들었던 시절이었지만 부처님 법을 배우겠다는 일념으로 밤잠을 줄여가며 배움에 매달렸던 당시 학인들의 열정적인 모습을 이렇게 회상했다.
한때 제자들은 스님을 ‘밀리미터’라고 불렀다. 평소 자상하기 그지없는 스님이지만 사중의 일이나 학인들을 가르치는 데는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 성격 탓이다.
스님은 “불법의 근본은 명심견성(明心見性)이며 글을 배우는 것은 이것을 완성하는 기초공사와 같다”라고 말씀하신다. “정확하고 바르게 배워야 작은 것이라도 남에게 전해줄 수 있다”고 늘 강조하는 스님은 오늘도 광교산(光敎山) 수행자들의 큰 스승으로 존경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