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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하안거 결제날, 수좌들이 산아래 큰 절 백양사에서 열리는 결제법회 참석차 선방을 비운 틈을 비집고 운문선원에 올랐다.
빈집을 훔쳐본 것은 안거에 앞서 손만대면 터져버릴 듯 긴장된 수좌들의 심기를 건들지 말자는 배려에서였다. 얼마나 치열하게 정진하면 ‘선방 문고리만 잡아도 지옥고를 면한다’했을까. 산에 오르기 앞서 큰절에서 만난 수좌들은 100m 출발점에 있는 운동선수마냥, 전쟁터에 향하는 군인처럼 긴장감이 감돌았다.
검푸른 빛을 띠는 백암산 단풍나무 숲속 사이로 4km 가량 오르면 운문선원이 나온다. 선방 앞 뜰에서 내려다보이는 전경은 가히 이곳이 호남 최고의 수행명당임을 느끼게 한다. 멀리 무등산을 비롯해 수많은 산봉우리가 마치 선방에 자리한 군왕에게 알현하듯 고개숙이고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운문선원은 ‘북 마하연, 남 운문’으로 불릴만큼 선방 수좌들에게 있어 꿈의 수행처이다. 이는 북쪽의 금강산 마하연선방과 함께 남쪽의 백암산 운문선방이 수행에 가장 좋은 자리라는 것이다.
운문선원은 처음 염불당으로 시작됐다. 그러다 고려말(1350년) 각진 국사가 선원으로 바꾸면서 운문선원의 전설이 시작됐다.
조선말 잠시 쇠퇴하다가 1923년 용성 스님이 주석하면서 근대선원으로 명맥을 잇고, 6.25로 소실됐다가 서옹 스님이 크게 선방을 열고 <벽암록>을 강의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운문선원에는 서산, 진묵, 백파, 학명, 환응, 용성 스님 등 쟁쟁한 선승들을 비롯해 근대에는 만암, 인곡, 고암, 운봉, 서옹 스님이 있고 현 조계종정 법전 스님도 이곳을 거쳐가 가장 많은 종정을 배출한 선원이기도 하다.
운문선원은 유명세에 비해 규모가 작은 선방이다. 많아야 10여명이 수행하는 터이다. 1988년 새로 중창된 선방도 전면 7칸이지만 이번에도 선객 16명만 방부받았다. 그러다보니 운문선원에서 한 철 날려면 2~3년 전부터 미리 신청해놓고 기다려야 한다.
선방엔 석가모니부처님을 주불로 문수, 보현보살을 좌우 보처로 하는 작은 법단이 있고 전면에 상수수좌가 자리하고 그 좌우로 법납에 따라 순서대로 앉는다.
정진은 여느 선방이 다 그러하듯 새벽 3시에 일어나 간단히 예불 드리고 조공, 점심, 포행을 뺀 나머지 시간은 줄곧 선방에서 정진한다. 하루 12~15시간을 앉아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선방 이외의 시간에 정진을 멈추는 것은 아니다. 그야말로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 언제든 화두와 함께한다.
선방 옆에 작은 지대방이 있다. 이곳은 수좌들의 휴식공간이다. 잠깐 허리도 땅에 댈 수 있고 꼭 필요한 말을 할 수 있다. 한쪽에 작은 핸드볼 공이 있다. 선방의 필수도구이다. 운문선원을 안내하던 법선 스님의 설명에 의하면 “앉아서 정진만 하면 허리에 무리가 오기 때문에 공을 척추에 대고 누워 구르면 몸이 풀린다”고 한다. 선방 수좌들의 건강법 중 하나이다.
지대방에는 개인 수좌들의 사물함도 있다. 사물함엔 안거 한 철동안 사용할 개인 용품이 들어있다. 3개월간 사용할 용품이 수건, 세면도구, 연필, 노트, 속옷뿐으로 수좌들의 무소유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운문선원엔 물맛이 일품이라는 석간수가 있다. 선원 뒤편에 3개의 석간수를 모으는 통이 있다. 선방에서 정진하다 지치면 이 물로 차를 다려 마신다고 한다.
선방 옆에는 ‘소림굴’이 있다. 염불원으로 시작된 운문암 본터이다. 서옹 스님이 주석하며 <벽암록>을 강의했던 운문선원 염화실에 ‘수처작주(隨處作主)’라는 주련이 걸려 있다.
평소 서옹 스님이 글씨를 써줄 때 가장 많이 쓴 내용이다.
‘있는 자리마다 주인공이 되라’
수행명당자리에 취해 이곳저곳 뒤지다 한방 크게 얻어맞은 듯 하다. ‘산 아래 곳곳이 다 훌륭한 수행처’라는 선사들의 꾸지람을 뒤로한 채 후다닥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