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가 나로 하여금 먼 길을 나서게 했는가? 무슨 바람이 나로 하여금 순례자이게 했는가?
출가수행을 시작하면서부터 낙엽처럼 쌓여온 붓다의 삶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저 멀리 노을지는 지평선 너머를 그리워하는 붓다를 향한 끝없는 동경심이었다.
소를 타고 소를 찾듯이 본래 부처이면서도 또다시 부처 되고자 하는 전도몽상으로부터 깨어나고자 함이었다. 도둑질하면 도둑놈 되듯이 부처 짓 하면 부처 된다는 확신을 실천하고자 함이었다.
본래 부처인 만큼 지금 바로 부처답게 사는 것이 참된 불교 수행이라는 신념을 실현하고자 길을 나선 것이다.
지난 3월 1일 노고단에서 첫발을 내디뎠다. 붓다에 대한 동경심을 안고 지리산 1천 5백리, 제주도 8백리 길을 걸었다. 붓다를 닮으려는 뜻을 안고 눈보라 치면 눈보라와 함께 걸었다. 본래 부처의 삶을 지금 당장 살아보겠다는 의지를 갖고 비바람 맞으며 걸었다.
오늘은 부처님오신날이다. 여느 때와는 달리 길 위에서 맞이하는 부처님오신날이다. 길 위에서 맞이하는 부처님오신날에 붓다의 삶을 다시 생각해본다. 나로 하여금 먼 길 나서게 한 붓다, 그는 누구인가? 나를 그리움에 빠져들게 한 멋진 친구 붓다, 그의 삶은 어떤 것인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붓다의 일생은 길에서 시작하여 길에서 끝나고 있다. 붓다의 생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아마도 길 위의 일생이 되지 않을까 싶다.
기억이 뚜렷하지는 않지만 ‘인생은 길 위를 걷는 것과 같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길이란 현재의 삶을 온전하게 사는 엄숙한 현장이다. 어제의 길에 집착하여 연연하는 한 이미 오늘의 길은 없는 것과 다름이 없다. 다음의 길을 기다리고 있는 한 이미 지금의 길은 생명을 잃는다. 길은 언제나 현재일 뿐이다.
순간순간 지금 여기 현재의 삶을 온전히 사는 삶이 길 위의 삶이다.
이쪽 언덕에 대한 집착도 내려놓고 저쪽 언덕에 대한 갈망도 내려놓고 오로지 현재를 살아간 삶이 붓다의 삶이었다. 어제에 대한 미련도 내려놓고 내일에 대한 불안도 없이 현재를 활발하게 살아간 삶이 붓다의 삶이다.
부처님오신날은 길 위의 삶을 몸짓으로 보여준 날이다. 길 위의 삶을 처음 선언한 날이 바로 부처님오신날이다.
그리운 붓다를 찾아 길 위에서 보낸 세월이 80 여 일이다. 밥과 잠자리를 빌면서 80 여 일 동안 길을 걸어 오늘까지 왔다.
‘아이를 낳아 키워봐야 부모의 마음을 알게 된다’는 어른들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절집을 벗어나 길 위에서 80여일을 보낸 지금 길에서 일생을 사신 붓다의 삶의 내용이 어렴풋이 시야에 잡히는 듯 하다.
붓다의 일생은 탄생게(하늘 위와 하늘 아래 나 홀로 존귀하네. 그 어디 그 무엇도 내 몸 내 생명 아닌 것 없네. 내 몸 내 생명인 온 세상이 고통에 시달리네. 내가 마땅히 그들을 편안하게 하리라)에 담긴 사상과 정신을 실천하는 삶이었다. 탄생게의 사상과 정신을 바로 오늘 여기에서 온 몸으로 실천한 삶이 붓다의 일생인 것이다.
‘하늘 위와 하늘 아래 나 홀로 존귀하다’는 뜻이 무엇인가? 존재의 실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내가 그대로 우주요, 우주가 그대로 나임을 설파한 것이다. 이 사실을 꿰뚫어 보는 것을 지혜라 하고 이 사실에 대해 망각함 없이 늘 깨어있는 삶을 지혜의 삶이라고 한다.
‘온 세상이 고통에 시달리니 내가 그들을 편안케 하리라’는 뜻은 어떤 것인가?
너와 내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존재의 실상론을 구체적으로 실천함을 뜻하는 말이다. 존재의 실상대로 실천하는 것을 자비라 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동요함 없이 실상대로 실천하는 것을 자비의 삶이라고 한다.
부처의 삶을 지혜와 자비의 삶이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지혜와 자비의 삶밖에 부처의 삶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지혜와 자비로 표현되는 실상론을 현실적으로 설명해보자.
너를 떠나 내가 존재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어리석은 착각이다. 세상과 무관하게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관념의 유희일 뿐이다. 사실은 너 없는 나는 성립되지 않는다. 세상없는 나는 존재할 수 없다. 실상이 이러한데 어찌 상대의 아픔과 기쁨이 나의 아픔과 기쁨이 아니며 세상의 문제가 내 문제이지 않겠는가.
이 사실을 잘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이 지혜라면 사실에 맞게 중생들과 고락을 함께 하는 것이 자비다. 존재의 실상대로 온 세상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끌어안고 살아간 자가 붓다이다. 상대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짊어지고 살아간 삶이 붓다의 삶이다. 존재의 실상에 근거한 너와 내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논리로 보면 세상이 없는 불교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붓다는 세상을 가꾸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했다. 중생이 없는 절집이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붓다는 중생고의 해탈을 위해 당신의 전 존재를 바쳤다.
불교를 내려놓고 길에 나서고 보니 관념적으로만 이해되던 붓다의 가르침이 매우 현실적으로 와 닿는다. 절집을 벗어나 길에서 바라보니 비인간, 비현실적이었던 붓다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손에 잡힐 듯 하다.
한 걸음 한 걸음마다 화두를 챙기니 길이 바로 선방이었다. 길에서 길로 나아가며 염불을 하니 길이 그대로 염불당이었다. 길을 가는 도중에 좌우대립 희생자를 위해 천도재를 올리니 길이 그대로 법당이었다. 중생들과 고락을 함께 하며 작은 도움 나누니 길이 바로 보살행의 현장이었다. 밥과 잠자리는 주어지는 대로 자족해야하니 길이 바로 율원이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연기법과 생명평화를 이야기하니 길이 바로 전법도량이었다.
붓다께서 인간과 신들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전법의 길을 떠나라고 하신 뜻을 조금은 알 것 같다.
길 위에서 맞이하는 부처님오신날에 젊은 수행자들에게 권하고 싶다.
지금 곧바로 버리고 떠나자. 길 위의 삶을 찾아 나서자. 절집을 벗어나니 천하가 도량이었다. 불교를 내려놓으니 어묵동정이 불교였다. 본래 부처의 삶이 목전에서 빛나고 출가행자의 삶이 비로소 당당해졌다. 참으로 통쾌하고 괜찮은 살림살이다.
오랜만에 흐뭇한 마음으로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고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