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9일 오후 4시 경북 청도군 매전면 초등학교 앞. 하나 둘씩 아이들이 12인승 봉고차에는 오르면서 운전석에 있는 혜봉 스님에게 말을 건넨다. 키가 큰 진송이가 먼저 나타나고, 성갑이가 나타났다. 저기 트럭 뒤에 숨은 놈은 개구쟁이 수연이다. 대현이는 한반 여자친구랑 재잘 재잘 얘기중이다. 운동화 끈이 다 풀렸는데도 그것도 모르고 이야기 삼매에 빠졌다.
“대현아, 운동화 끈 매고 놀아라.”, “저놈 , 하이고~ 트럭 뒤에 숨었네.”, “종범이는?” “대현아 넌 피아노학원 갔다 와야지.” 스님은 여기저기서 돌아오는 아이들 하나하나 챙기기 바쁘다.
어느덧 봉고에는 아이들로 가득차고 하루 종일 있었던 일을 얘기하느라 봉고가 떠나갈 듯 소란스럽다.
“출발~.”
경북 청도군에서 운문사 쪽으로 가다가 나타나는 금곡리 마을 마음의 고향 청계사에는 이렇게 스님과 사내아이 10명이 살고 있다. 산과 계곡에 둘러싸인 아늑한 법당에는 ‘부처님 마음’이라는 현판이 눈에 띤다. 봉고가 경내로 들어가자 멍멍이 곰순이가 반갑다고 뛰어나오고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걸려있는 오색 연등이 반짝인다. 2층 공양간에서는 할머니(신도회장 김영자, 63)가 손을 흔들고 아이들을 반겼다.
아이들은 오자마자 공부방으로 가더니 책가방을 던져놓고는 각자 방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중학교에 다니는 큰 아이들은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쓰레기도 버리고 이것저것 잔 심부름도 거든다. 작은 아이들은 만화책을 보는가하면 카드놀이도 하고 공양간 할머니 옆을 졸졸 따라다니기도 한다.
스님 흉 좀보라고 살짝 물었더니 “응, 응…”하며 한참을 생각하더니 “스님 정말 웃겨요”라며 마구 웃는다. 스님이 잠깐 안보이면 모두들 스님을 찾아 난리가 난다. 그만큼 스님은 아이들에게 인기다.
스님과 가장 재미있을 때가 언제냐는 질문에 “스님과 야구하면 정말 재밌어요”라는 아이들. 스님은 여름이 되면 아이들과 야구도 하고 법당 옆 계곡에서 수영도 한다.
그러나 말을 안 들으면 가끔 스님은 호랑이로 돌변한다. 아이들을 야단칠 때는 아주 매섭고 따끔하다. “스님이 혼낼 때는요, 우리가 공부안하니까 그러지요” 아이들의 대답이 장난기가 가득하다.
이곳 청계사에는 잘 정돈된 법당 앞마당을 가로질러 요사채가 있다. 요사채는 복도를 사이에 두고 스님 방과 아이들 방 3칸이 마주해 있고, 아이들 공부방이 따로 마련돼 있다. 2층은 공양간이자 사무실이자 접견실 기능을 하는 다목적 공간이다.
사방이 책장으로 둘러싸인 스님 방엔 한국전래동화, 사고력을 기르는 이야기, 웅진세계명작 등 스님 책 보다는 아이들 책이 더 많다. 그리고 크레파스, 물감, 파레트 풀, 색종이들이 정겹게 놓여있다.
스님은 무슨 사명감이 있어 아이들을 키우게 된 것이 아니라고 취재를 거부했다. 단지 한 스님이 사내아이 하나를 데려와 거둬줄 곳을 찾는다는 말에 지나칠 수 없어 받아들였을 뿐이라고 말했다. 출가수행자가 오는 인연을 막아서는 안되는 것이고, 더군다나 오갈 데 없는 소외받은 인연이니 그냥 하나가 되어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뜻하지 않게 수연군과의 인연이 시작되면서 어느덧 10명 사내아이의 아버지가 됐다. 지금은 박수종, 김경현, 이진송, 강성갑 군이 매전중학교 1학년에 다니고 있고, 양근일 군이 동산초등학교 6학년에 재학중이다. 수연이는 5학년, 장대수는 4학년, 대현이와 광섭이는 3학년이다. 막내 종범이도 학교에 들어가 1학년 학생이 됐다.
“사실 아이들에게 해주는 것은 없어요. 그냥 애들과 놀아요.” 스님은 이 한마디가 전부다. 모든 것을 부처님의 뜻에 맡기고 사는 스님에게는 곳곳에서 부처님의 손길이 찾아와 아이들 성장을 돕는다. 부처님의 아이들인 것이다.
울산학춤연구소에서 주말마다 와서 ‘바라춤’을 가르쳐 주고, 마산 선유풍물연구소에서는 풍물을 가르친다. 또 대구에 사는 가야금 선생 정순식 씨는 가야금을, 신도회 재무 이은희 씨는 서예를 가르친다고 나섰다. 신도회장 김영자 씨는 아이들의 어머니이자 할머니다. 매일 경산에서 버스를 타고 들어와 청소며 빨래며, 간식과 반찬을 해주고 간다.
스님은 아이들에게 불교교리와 예법을 억지로 가르치지는 않는다. 그냥 자연스럽게 아이들을 받아들였듯 그렇게 자연스럽게 아이들이 부처님 품에서 자랄 수 있도록 지켜볼 뿐이다. 다만 부모로부터 소외당한 마음의 상처로 혹 부모님을 원망하지는 않을까 일주일에 2번 모든 아이들에게 부모은중경을 가르친다.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는 이곳은 살아있는 부처님 도량이다.
작년부터 배운 풍물은 이제 제법이어서 가끔 작은 연주회에 초대받기도 한다. 그래서 스님이 이름도 지어주었다. ‘물레방아 예술단’이라고. 물레방아란 쉼없이 돌아가는 세상의 이치와 무상을 뜻한다는 것이다. 무상이란 늘 변한다는 의미라고.
1학년 종범이도 자기 덩치만한 북을 꺼내오는데 솜씨가 제법이다. 큰북이 자꾸 달아나지만 작은 손으로 꼭 움켜쥐고 형에게 뒤질세라 박자 하나 놓치는 법이 없다.
꽝꽝 꽈광꽝!
어느덧 송글송글 구슬땀이 맺히는가 싶더니 입가에는 미소가 피어났다. 아이들은 소리로 하나가 되어 온 산을 쩌렁쩌렁 울리는 희열감에 젖어들었다.
이번 초파일 계획을 묻자 스님은 빙그레 웃기만 한다. 작년엔 이곳에서 산사음악회를 개최했는데 아주 인기였다. 그러나 올해는 준비가 여의치 않아 당일 날 아이들과 신도들이 어울릴 수 있는 작은 어울림 마당으로 대신하려고 한다. 물레방아예술단의 진가를 발휘할 때가 온 것이다.
청계사 아버지 스님과 물레방아 꼬마 예술단 10명은 초파일을 앞두고 이렇게 바람같이 구름같이 하나가 되어 부처님 품에서 부처님 마음을 닮아가며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