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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전연구원 지도법사 각묵 스님은 5월 18일 한국일보 송현클럽 대강당에서 <청정도론> 완역을 기념, ‘놓치고 있는 수행의 핵심’을 주제로 특강했다. 각묵 스님은 “비판이 없는 한, 한 집단이나 교학체계 또는 수행법은 썩기 마련”이라며 최근 우리 사회에 확산되고 있는 수행과 명상에 대한 열기와 관련, 수행자들이 소홀히 할 수 있는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했다.
각묵 스님은 특강을 통해 △수행 과정이나 방법을 도외시한 ‘돈오(頓悟)’ 지상주의 △깨달음의 당체(대아, 진아, 본성, 자성, 주인공, 여래장, 불성 등)를 건립하여 집착하기 △깨달음에 대한 지나친 갈애 △본래부처, 본무생사, 본자청정에 안주하는 무사선(無事禪) △좌선 지상주의 등을 경계했다. 각묵 스님은 이와 같은 일부의 치우친 수행현상을 ‘돈오 한방의 로또 광풍과 깨달음에 대한 갈애에 기인한 가상임신’에 비유하며, 사성제와 팔정도, 계정혜 삼학을 기초로 한 ‘바른 마음챙김(正念)’ 수행을 해나갈 것을 강조했다.
강연 내용을 요약했다.
■과정을 도외시한 돈오 지상주의
수행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가장 큰 문제는 과정이나 방법은 알려들지도 않고 오직 깨달으면 그뿐이라는 단편적인 사고에 빠져든다는 점이다. 이것은 돈오를 잘못 이해하기 때문이다. 깨달으면 부처이니 설명이 불필요하다는 생각은 로또복권처럼 ‘한방’에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사행심을 조장한다. 깨달음을 향한 수행과정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없이 ‘일자무식운동’을 강조하는 것은 불교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갖지 않고도 바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오해를 낳기 쉽다. 마치 ‘즉심시불’을 ‘집신세불’로 잘못 알아듣고 수행해서 깨달았다는 사람처럼.
■깨달음의 당체를 세움
많은 수행자들이 깨달음의 당체를 건립하여 그것을 굳게 움켜쥐고 있다. 대아, 진아, 본성, 자성, 주인공, 심지어 여래장이나 불성을 세워 그것과 하나 되는 것으로 수행을 이해하고 있다. 초기 경전 어디에도 불변하는 당체와 하나되는 것이 깨달음이라 한 적이 없다. 이러한 깨달음을 우리는 착각이라 부른다. 초기불교에서는 ‘나’와 ‘내것’이라는 생각을 갖는 자아가 무명과 갈애의 근본이기에 해체를 강조한다. 무엇이든 깨달음의 당체를 세우는 한 외도적, 힌두교적 발상이란 비판을 면키 어렵다.
■깨닫겠다는 집착마저 놓아야
깨달음은 갈애를 버릴 때 실현되는 것인데 오히려 우리는 깨달음에 대한 엄청난 갈애를 키우고 있다. 수행자가 특수한 체험을 하고 이를 깨달음으로 착각해서 여기에 안주한다면 애기를 놓고 싶어서 ‘가상임신’한 여성과 다름없다. 8정도의 길을 가는 진정한 출가자는 그 어떤 집착도 놓고 어떠한 당체도 움켜쥐거나 세우지 않는다.
■무사선(無事禪)에 안주
돈오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일부 수행자는 어떤 닦음도 불필요하다는 무사선(無事禪)에 빠져있다. 본래부처요, 본무생사요 본자청정이요 본무번뇌이기에 아무것도 지을 필요가 없다고 한다. 불성 자리에는 한 법도 버릴 것이 없어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고 졸리면 자면 된다는 법문을 들으면 ‘유쾌, 통쾌, 상쾌’하다. 하지만 여기에는 엄청난 탐욕이 숨어있다. 무명 속에서 탐진치에 휘둘리는 중생의 실상을 무시하고 ‘지혜는 자성에 본래 갖춰져 있다’는 말만 되풀이 하는 것은 빈곤의 악순환과 다름없다. 사성제를 철견하여 부처 되는 공부 처럼 교학적인 점검이 필요하다.
■좌선은 만능이 아니다
간화선은 망상 속에서 좌선만 하는 수행을 ‘흑산귀굴에 앉아 있다’고 배격하고 일상선을 주창했다. 그러나 지금의 간화선은 오히려 앉는데 집착하고 있다. 그러면서 깨달음과 적정처에 머물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성제와 팔정도, 삼학을 바탕으로 매순간 일상 속에서 모든 현상을 무상, 고, 무아로 꿰뚫어봐야 한다.
■수행의 핵심은 8정도의 ‘정념’
불교수행(bhaavanaa)은 8정도이다. 경의 도처에서 수행해야 하는 것으로 8정도를 고구정녕히 들고 계신다. 8정도 가운데서 본격적인 수행법과 관련된 것은 정념(sammaasati, 바른 마음챙김)이다. 이것은 <대념처경>에서 정리되어 있으며 몸(身) 느낌(受) 마음(心) 심리현상들(法)에 마음챙기는 공부를 설하셨다. <대념처경>의 핵심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해체’이다. 해체하지 못하면 본래청정, 본무생사, 대아, 진아, 여래장, 불성, 마음이라는 무슨 실체가 있는 줄 착각하게 된다. 해체해서 볼 때 괴로움의 근본원인인 무명과 갈애가 소멸된다. 해체해서 보기 위해서는 단속하고 집중하고 통찰하는 훈련을 해야한다.
■해체해서 보는 게 위빠사나
개념적 존재를 해체할 때 거기에는 바로 법이 있다. 제법은 무상, 고, 무아를 특징으로 한다. 무상은 찰나요 무아는 연기이다. 고성제는 오온의 가합일 뿐인 것을 두고 나니 내 것이라고 취착하는 오취온고(오음성고)를 그 근본으로 한다. 해체해서 법을 보지 못하는 한, 오온의 가합을 나라고 취착하는 한 인생은 고라는 말씀이다. 해체해서(vi-) 보는 것(passanaa)이 바로 위빠사나(통찰, 관찰)이며 반야이다. 뭉치면 속고 해체하면 깨닫는다. 우리가 이름 짓고 개념지어 대상을 파악하고 아는 한 그것은 나를 구속하고 얽어매고 속박한다. 해체의 출발은 마음챙김이요 챙김을 통해서 문단속을 하고 삼매와 통찰지를 구족하게 된다. <청정도론>은 이러한 계(육근의 단속), 정(사마디, 집중), 혜(법을 통찰) 삼학을 설하고 있으며 어떻게 해체하는가를 상세하게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해체에서 드러나는 지혜를 ‘방가냐나’ 즉 ‘무너짐의 지혜’라 하는데 이야말로 해체에서 드러나는 해체의 지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