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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담 : 간화선 중흥 어떻게 할 것인가
‘옛날 물건’ 인식 먼저 버리고 뿌리 깨닫기에 매달려 보라
● 일시 : 2004년 5월 7일 오후 2시 ● 장소 : 현대불교신문사 사랑방

조계사와 현대불교신문이 공동주최한 ‘간화선 중흥을 위한 선원장 초청 대법회(2월 15일~5월 9일)’가 언론의 높은 관심과 시민들의 참여 속에 회향됐다. 총 12회에 걸쳐 진행된 이 법회에는 연인원 3만여명의 불자와 시민들이 동참해 조사선에 대한 높은 관심을 반영했다.

그러나 모처럼 일어난 선에 대한 관심을 어떻게 이어가야 할 지가 새로운 고민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스님들은 전국의 선원에서 선지식의 지도아래 여법한 안거 수행으로 용맹정진 할 수 있는 반면, 재가자들은 부족한 시민선원(약 50여곳)에서 마땅한 지도자도 없이 어떻게 참선 공부를 지어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실정이다. 아울러 최근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위빠사나 붐과 제3 수행법 열풍에 대한 조계종의 대응방안도 시급히 마련되어야 할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간화선을 중심으로 한 조계종의 수행체계 확립방안과 선 교육제도의 보완 등도 고려되어야 한다는 여론이다.

전국 선원장 초청대법회의 성공적인 회향을 계기로 간화선에 대한 정체성 확립과 선풍진작 방안을 모색하는 특집 좌담을 마련했다.

禪 바람 일으킨 선원장 초청 법회

김태완= 좌담은 편의상 제가 진행하겠습니다. 먼저 선원장 초청법회에 대한 평가를 내려주시고 ▲두 분의 선원장께서는 어떤 방식으로 지도하시는지 ▲대신심, 대의정, 대분심 세 가지를 효과적으로 일으킬 수 있는 방법 ▲선지식의 지도점검 체계 부족, 교육체계의 미비 등 현 수행 풍토의 문제점 ▲화두 공부에 진전이 없는 까닭과 화두 드는 요령 ▲위빠사나와 제3수행법 문제에 대한 종단차원의 대처방안 등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혜국 스님= 많은 사람에게 선에 대한 관심을 인식시키고 또 도심지에서 주로 살던 신도들이 산중의 향취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상당히 긍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직접 법문했던 선원장들로서는 사람들이 너무 많고 일회에 끝났기 때문에 조금 숫자를 줄여서라도 이회, 삼회에 걸쳐 자기 사상을 집중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시간이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선원장 법회에는 법좌에 오르고도 남을 분들이 많은데 이번에 나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분들이 산중을 지켜준 무언이설법(無言而說法), 즉 말없는 사상도 우리가 고맙게 생각해야 합니다.

현웅 스님= 미국에 있으면서 선원장 법회를 인터넷(붓다뉴스)으로 봤습니다. 산중 스님들이 문명사회에 서툴텐데 의외로 편안하고 안정된 모습으로 수행의 결과를 흐트러지지 않게 표현해냈다고 생각합니다. 물질문명이 발달했지만 그것에 초연하게 수행에 몰두하고 있는 스님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나라에 정신적인 힘이 될 겁니다. 스님들이 수행과 문명사회 의식을 가까이 조화시켜서 사람들에게 조사선이 더 가까이 다가갔으면 합니다.

인경 스님= 그동안 위빠사나라든가 아바타 명상이라든가 이런 많은 수행이 있었는데, 전통선이 일반 대중들에게 멀어져 간 감이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선원장 스님들이 나서서 소명의식을 갖고 침묵을 깨고 법문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 앞으로 남은 과제는 그런 부분들을 어떻게 그릇에 담을 것인가 하는 것이죠. 그것을 구체적 실참으로 연결시키고, 일시의 바람이나 분위기로서가 아니라 차분하게 간화선이 대중 속에 뿌리를 곧게 내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김태완= 산중 스님들에게 독점되다시피한 선수행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습니다. 혜국 스님 말씀처럼 지속적인 만남 통해 인격적인 감화가 이뤄지고 깊이 전해지는데 한번의 만남으로 끝난 것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앞으로 선원장 스님들이 스님들만을 대상으로 법문할 건지 속세에 나와서 대중법문을 하실지 궁금합니다.

혜국 스님= 우리가 처음 산중에서 나올 때는 선원장 법회에 2천~3천 명 씩 모일 거라 생각을 안했습니다. 그런데 와서 그 열기를 직접 보니까 그 사람들의 열기를 그릇에 어떻게 담을 것이냐가 고민이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충주 석종사에다 재가자 수행시설을 짓고 있습니다. 재가자들이 가르침을 원해서 올 때는 시간을 내어 서로 만나고 탁마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 시간이 안 되면 한 달에 한 번이면 한 번, 두 번이면 두 번 그날만큼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현웅 스님= 수행생활을 돌아보면 처음에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에는 관심 갖지 않고 자기 문제에만 급급했습니다. 수행하다 보면 자타가 함께 공생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 공부가 부족할 때는 사회를 보면서 발심해야 하죠. 내 문제 내 의식에 갇혀있기보다는 내 문제와 사회문제가 같은 문제라는 생각으로 수행할 때 튼튼하고 살아있는 수행의 길이 드러날 것이라고 봅니다.

김태완= 선에 대한 높은 대중들의 관심을 종단차원에서 정책적으로 키워갈 아이디어는 없을까요?

인경 스님= 이번 선원장 법회처럼 참선 법회를 일시적으로, 일회성으로 끝내지 말고 정기적으로 일년에 한 번씩이라도 돌아가면서 지속했으면 합니다. 지금 위빠사나를 비롯해 정토·천태종 이런 쪽은 연구소 뿐 아니라 전문적인 연구기관을 두고 있어요. 현재 간화선은 그런 연구기관이 없습니다. 승려교육에 있어서도 강원 사집(四集)과정에서 간화선에 대한 부분이 있지만, 티베트나 남방에서 처럼 전문 지도자를 양성하는 교육이 부족한 실정입니다. 종단적으로 참선 법회를 연다면 전체적인 승려교육과 연계시켜서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김태완= 왜 종단에 연구기관이 없는지 궁금합니다. 간화선에는 많은 어록이 있지 않습니까. 선어록을 종단차원에서 지속적으로 발행할 수 있는 위원회 같은 것도 없나요?

인경 스님= 없습니다. 예를 들면 위빠사나와 같은 다른 수행법들은 교학 체계와 수행 체계를 연구하고 이 둘이 어떻게 상호 작용하며, 그것이 재가자 속에서 문답을 통해 어떻게 효과를 얻는지 검증하는 시스템이 있습니다. 옛날 고려, 중국에는 있었는데 현재 간화선은 조선과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이런 체계가 단절됐습니다. 예전에 강원에는 수의(隨意)과정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오늘날 큰스님들이 조사의 행업을 이야기 할 때 의지하는 <전등록> 등 선어록도 공부하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강원교육체계가 4년으로 재편되면서 그 수의과정, 오늘날로 말하면 대학원 과정 사라졌습니다. 경전이나 조사어록을 공부하고 싶을 때 다시 공부할 수 있는 시스템이 복원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태완= 종단에 그런 선어록 연구소와 관련 서적을 간행하는 기관이 없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인경 스님= 역경원에서는 하고 있지만 경전 중심으로 번역되고 선어록은 약한 감이 있습니다.

김태완= 언제한번 인경 스님이 종단에 그 문제제기를 해 주십시오. 혜국 스님과 현웅 스님께서는 선원에서 어떻게 지도하고 계신지 소개해 주세요.

혜국 스님= 지금 선원에서의 지도 방법이라는 게 과거 조실스님에게 보고 배운 방법이 그대로 내려 오는 것이지 특별히 새로 만든 것이 없습니다. 옛날 선지식 스님들은 당신이 행(行)으로 보이면 그것이 우리에게 거룩하게 보이고 말 없는 법문이 되어 인간이 달라져 가게 됩니다. 참선하는 그 시간만이라도 앉아서 졸지 말고 깨어있도록 노력해 보라, 깨어 있으려면 남이 점검해주기 전에 늘 자기 자신이 점검을 해서 앉아 있어야 한다, 때로는 통곡도 해보고 때론 오기도 부려보고, 그래서 자기 스스로 내면을 세밀하게 돌아보라고 말합니다. 요즘은 가장 먼저 자기 자신의 문제가 어디 있는가를 먼저 짚어보도록 지도하고 있는 편입니다.

선지식들은 법문 안하나?

김태완= 옛날 선원에서는 매일 조찬법문, 만찬법문 등 법문이 많았습니다. 그를 통해 문답도 이뤄지곤 했는데 법문을 현재 어떻게 하고 계신가요?

혜국 스님= 나는 한 달에 두 번 정기법문을 하고 요청이 있을 경우 소참법문을 합니다. 옛날에는 책도 귀하고 법문도 자주 듣기 어려워서 법문 듣는 그 자체를 아주 소중하게 받아들였는데, 요즘은 ‘했던 소리 또 하네’ 라고 불평합니다. 이것은 매스컴이라든지 책에서 들은 상태가 이미 포화 상태에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김태완= 한번 들으나 열번 들으나 들어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와 닿아서 체험으로 확인해야 하는데, 그것을 한 번 듣고 해결하려고 하는 그것이 문제아닐까요? 해결 안 되면 그만두는, 결국은 발심의 문제와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혜국 스님= 나 같은 경우 1969년 인천 용화사에서 살 때 전강 스님이 아침마다 법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토 하나 안 틀리는 같은 말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당시 나는 ‘저건 어제 했던 말 그대론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보면 대단한 방법이었습니다. 옛날에는 어른이 말하면 그만하라는 말을 못했어요. 결국 한쪽은 법문을 하는 어떤 역량이 모자라고, 듣는 사람은 그릇이 안되어 있어서 법문의 필요성을 못 느끼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 입니다.

현웅 스님= 나는 생활 속의 체험으로 늘 얘기합니다. 1주일에 한번씩 법회를 여는데, 서양의 의식구조 즉 <성경> 내용을 끌어다가 선으로 바꿔서 법문하기도 합니다. 인간과 인간이 만나서 신뢰를 하게 되고 신뢰하니까 문화적 차이도 무너지고 같이 공유하게 되죠. 나는 강원을 안 가서 기초를 닦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불립문자’ 주장하다가 고통을 받은 경우지요. 재가자들은 법문 들어서 발심하고, 똑같은 말이라도 들을 때마다 다르기에 법문이 필요합니다.

김태완= 전통적으로 대신심, 대의단, 대분심 이런 얘기하는데 이를 발심이라 하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알음알이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신심 의정 분발을 유도할 수 있을까요?

혜국 스님= 제가 13살에 절에 들어와서 들었던 얘기가 ‘기한(飢寒)에 발도심(發道心)’입니다. 나는 해인사 팔만대장경각에서 성철 스님 말 듣고 하루 오천배씩 절을 하다가 10만배를 마치고 연비를 하고 태백산 도솔암 가서 생식을 2년 하고 장좌불와를 2년7개월 동안 했습니다. 그때는 이게 몸만 망가뜨리고 얻은게 없구나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날 받쳐주는 밑거름이구나 생각합니다. 극기과정을 거쳐 자기를 고집하지 않고 발심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현웅 스님도 ‘나를 모두 포기하니까 드러나더라’는 법문을 하셨는데 그 뜻이 아닌가요?

현웅 스님= 요즘 돌아보면 지식인들이 문제입니다. 지식이란 살기 위한 테크닉이지 진정한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만 고달파지고 경쟁심만 부추깁니다. 신도들이 삶의 고통을 호소할 때 스님들은 그냥 절만 하라고 합니다. 그러기 전에 현상세계에서 제대로 풀어줘야 합니다. 이런 일 증명하면서 법문해 주었으면 합니다.

인경 스님= 발심 문제는 부처님 당시로 되돌아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누구든지 고통이 있고 그것을 극복해 자유롭고자 하는데, 이것이 발심이라고 봅니다. 고통을 느낄 때 무엇이 나로 하여금 고통을 느끼게 하고 고통을 느끼는 이놈은 무엇인가 라고 질문하는 것이 간화선이라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상담을 통해서 자신이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지를 명료하게 한다면 자연스럽게 발심이 생길 것입니다.

김태완= 혼자 발심을 기다리는 측면도 있지만, 설법이라든지 대화로 이끌어주는 것도 중요하지요. 부처님도 주로 설법으로 가르쳤습니다. 요즘 선원에서는 너무 개인에게 맡기는 측면이 있는데 40~60년대 스님만 해도 설법을 많이 하지 않았는가요?

현웅 스님= 인간이 자주 만나면 정들고 신뢰가 생깁니다. 꼭 불법을 논하지 않더라도 차 마시면서 대화하고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더군요. 법문도 좋지만 인간적으로 마음의 문을 열어 듣고 얘기하고, 스님네들이 그때마다 적당하게 잘 응대해야 합니다.

김태완= 현재 선원에서 화두 들고 있는 스님이나 재가불자들은 장좌불와 용맹정진 등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선원의 안거제도 하에서 그렇게 여러 해 애쓰는데도 공부가 기대만큼 효과가 안나온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요.

간화선 위기 아니다

혜국 스님= 이게 과연 지금만의 문제일까요. 부처님 당시 이래로 조사스님들 시대마다 단 한번도 왜 이렇게 공부인이 안나오느냐 하는 고민이 없던 적이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대 선지식인 마조 스님 문하에도 천 명 대중 가운데 도를 얻는 사람은 백명도 안됐습니다. 설봉 스님도 13살에 출가해 마흔까지 공부해도 안되어 자살하려는 극한 마음까지 냈다가 도를 얻는 경지까지 갔습니다. 용맹정진이나 장좌불와 뿐 아니라 그보다 더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부 흉내는 내고 있지만 그 내면을 보면 대부분 아집 속에서의 정진입니다. 결국 껍질이 깨질 정도로 애써봐야 해요.

김태완= 선지식이 왜 안 나오냐가 아니라 그렇게 많이 나오는 게 어려울 뿐더러, 또 많이 나오지 않은 것도 아니라는 긍정적인 말씀이신데요.

혜국 스님= 제 평생에 간화선이라는 수행법을 만난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인구비례로 따져서 우리나라만큼 도인이 많이 나온 나라가 없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도인이 하나만 나타나도 대단한 일이라고 봐야 할텐데 제가 중 된 다음에도 효봉 스님, 동산 스님 같은 기라성 같은 선지식들이 있었습니다. 간화선은 희망적입니다. 위기라 볼 수 없어요. 문화사적으로 볼 때 간화선은 성공작품입니다.

김태완= 현웅 스님은 오랫동안 외국 생활을 하셨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현웅 스님= 간화선 자체는 비판의 대상이 아니고 그것을 잘못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일반 수행법은 패션같이 스쳐지나가는 것이라 오래 못갑니다. 라즈니쉬 제자들이 모두 병들어서 내게 오더군요. 현실도 못살고 몸도 마음도 병들어 정신도 흐려지는 것은 히피족의 말로와 비슷했어요. 간화선만큼 확실한 것이 없음에도 눈에 보이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은 문제예요. 스님들이 확실히 간화선을 경험해서 다르다는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김태완= 조사선이 수행방법상으로는 최신의 방법입니다. 석가모니와 육조혜능의 깨달음이 둘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간화선은 지금 현재 눈앞의 법을 직시해서 그대로 끌어내는 방법이기에 가장 빠르고 오류도 덜한 반면, 제 3수행법들은 나중에 부작용이 많은 것 같습니다. 명상법 등은 심리상태를 조작하는, 그래서 불행이라는 경계로부터 행복이라는 경계로 데리고 가는 법이더군요.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간화선이 옛날 물건이 아니냐고 의심하는 것 같습니다.

현웅 스님= 간화선이 시대에 부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옛날 것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일부분 책임이 있습니다. 현대인은 빨리 느낌이 오는 수행법을 좋아해요. 감각을 찾아가는 위빠사나는 잎부터 줄기 몸통 뿌리까지 관찰하다 보니, 경계가 많습니다. 모르던 곳을 찾아가기 때문에 재미가 있어요. 그러나 뿌리까지 찾아가기가 힘들어요. 간화선은 처음부터 뿌리를 직접 깨닫는 공부입니다. 뿌리를 발심해서 깨달으면 되는데 힘들어서 안합니다. 스님들이 확실한 간화선을 맛보고 그것을 현대화해야 합니다.

제3수행법의 겉과 속 잘 보아야

김태완= 위빠사나는 대상을 두고 하는 건데, 대상에 따라 관찰하기 때문에 항상 마지막 의문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간화선은 하나의 의문(대의단)이 커져서 다른 의문이 사라지는 것, 하나가 환해지면서 모든 의문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의 의단을 깨침으로써 더 이상 의문이 없는 상태까지 가는 공부가 간화선입니다.

혜국 스님= 위빠사나나 제3수행법을 보면 ‘나’는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해서 없다고 하지만 관해야 할 대상이 있다고 가정합니다. 그런데 관해야 할 대상이나 나나 똑같은 것입니다. 간화선을 모르는 사람들은 ‘화두란 옛날 물건이다’ 라고 얘기하지만 옛날이니 현재니 미래니 하는 것이 없어진 저 태허공(太虛空) 같은 것이 화두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것이 허공입니다. 화두란 무일물(無一物)이라는 것도 뛰어 넘은 것, 해결된 그 상태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로 공인데, 봐야 할 게 있다고 하는 것은 마음 속에서 마음을 찾으려는 것입니다. 마음가지고 마음 찾는 병을 고치는 것이 바로 간화선입니다. 그 찾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화두로 폭 들어가 봐야 합니다.

김태완= 결국 신심과 발심의 문제로 돌아오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바로 화두 잡는 요령을 묻습니다. 그 얘기에는 결국 좀더 쉽게 효과를 보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어요.

현웅 스님= <초발심자경문>에 “스승 벗 공경을 부모님처럼 하라”는 얘기가 있더군요. 그것을 믿고 남을 공경하고 모셨습니다. 그런 정성을 들이고 그들과 함께 좋게 살다보니 그렇게 신심이 나더군요.

김태완= 일반인들은 어떻게 화두 참구를 해야 할까요?

혜국 스님= 너무 빨리 깨달으려고 하는게 가장 큰 병폐입니다. 깨달음을 기다리는 것은 수행이 아니라 욕심입니다. 옛 수행자들은 삶과 수행을 분리하지 않았습니다. 화두를 24시간 잘 들려고 할 것이 아니라 단 한 번을 들더라도 제대로 들어야 해요. 삶과 수행이 하나로 묶여 나갈 때 화두는 자기 것이 되어갑니다.

김태완= 언론이나 항간에 떠도는 말들을 살펴보면 간화선에 대해 최선을 다해보고 하는 말인지 의심이 듭니다. 무엇보다도 제대로 된 발심과 올바른 자세를 가지고, 수행자로서 계산하기보다는 공부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혜국 스님= 한국불교의 장점을 든다면, 간화선이 그 뿌리입니다. 간화선 자체를 흔든다면 한국불교를 흔드는 것과 같습니다. 조선시대 선교 양종도 없는 시대에 만일 간화선이라고 하는, 내가 나 자신을 지키는 법이 없었다면 불교가 이어질 수 없었을 겁니다. 조선 왕조가 스님을 노예로 만들고 선방을 기생방으로 만들 정도로 탄압했음에도 불교가 다시 이만큼 살아날 수 있었던 역사가 전 세계에 있었던가요. 우리나라는 현재 남북으로 나누어져 있고 동서로 나누어져 있지만, 종교전쟁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본래 무일물 자리에서 지켜온 간화선이 이 나라에 공헌한 바가 매우 큰데 그걸 너무 소홀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간화선을 좀더 소중하게 여겨줬으면 좋겠습니다.

현웅 스님= 입으로만 무일물 사상이 아니라 본성 자체를 터득하게 되는 무일물이니 다툼이 없습니다. 그런 것이 간화선의 성질 일텐데 수행자들이 터득을 못하고 잘못 사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학자들은 간화선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눈에 먼지 뿌리기 보다는, 좋은 대안을 갖고 함께 토론하는 기회를 만듭시다.

김태완= 위빠사나의 경우 <청정도론>이라는 책으로 체계적인 수행법이 설명이 됩니다. 그러나 간화선은 어록이 있지만 그런 수행 지침서가 없어 따라 하기 힘듭니다. 처음에 접근하기도 어렵지만, 그것을 넘어서지 못해 어려워 합니다.

현웅 스님= 이는 중도의 문제가 아닐까요. 얼마 전에 천주교 신자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2년 전에 예수님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는 그녀는 거지를 보고 “나는 거지를 남편과 똑같이 사랑한다”고 했더니 남편이 때리더라고 했어요. 불교에서는 어떻게 보느냐고 묻길래 “불교는 중도법을 가르치니 거지는 거지고 남편은 남편이다”고 말해 줬습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그런 지혜가 없어요. 간화선을 바로 하면 중도가 생기고 중도가 생기면 정혜쌍수(定慧雙修)가 생겨서 현실 문제를 그때그때 차별세계에 맞게 치우치지 않게 행동합니다.

김태완= 그냥 발심을 해라는 식의 말보다는 조금 더 체계화된 수행지침서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청정도론>과 같은 지침서가 간화선에도 나올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혜국 스님= 나도 처음에 수행지침서 발간에 반대한 사람입니다. 나는 아직도 <육조단경>이나 <서장> 보다 더 좋은 수행체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결국 선원장들이 안 하면 교육원에서만이라도 한다고 해서 할 수 없이 석종사에서 스님들이 한 달에 한 번 만나고 있습니다. <청정도론> 등은 수행의 대상이 눈에 보이니까 잘 쓸 수 있지만 간화선은 특성상 언어로 표현하면 이미 죽어 버립니다. 시대가 수행체계를 필요로 하니까 능력이 모자라지만 ‘방망이’감이란 허물을 무릅쓰고 펴내긴 해야 될 것 아닙니까. 수행체계 때문에 한 달에 한 번 모이고 있는데, 내가 중노릇 43년만에 그 모임만큼 진지한 대중공사는 처음입니다.

김태완= 조계종 수행체계와 관련한 질문지를 2년 전에 저도 받았지만, 답변을 쓰려고 하니 그런 문제가 있더군요. <산암잡록(山艤雜錄)> 등 많은 선어록들이 교과서인 것 같습니다. 한 분의 높은 안목으로 여러 수행과정의 문제점을 지적한 책이죠. 혜국 스님의 답변, 현웅 스님의 답변 등등 각각의 책은 자기 책임 하에 나올 수 있지만 종단에서 취합해서 엮어 낸다는 것이 가능할지 의문입니다.

혜국 스님= 책을 내고 안내고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세상 사람들에게 <서장>과 <육조단경>이 사문서(死文書)화 되어 교과서 역할을 못한다는 게 문제입니다. 이것이 다시 교과서 역할을 하게 만들 수 있다면 책을 따로 낼 필요가 없어요.
그리고 간화선 수행지침서를 쓰는 선원장들은 매맞을 각오로 하고 있는 일입니다. 편집위원 네 사람과 간사 두 사람까지 여섯 사람이 작업을 하지만, 그 토론을 지켜보기 위해 선원장 열 두 세 명이 모입니다. 그런데 진척된 건 별로 없고 이런 책이 나와서 허물을 쌓는 것이 아닌가 우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허물을 쌓도록 하는 것이 지금 세상의 흐름이죠. 산에만 산 스님들은 세간법을 따라가는 방법이 너무 어설픈게 사실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상당한 고민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수령 기자 | snoopy@buddhapia.com
2004-05-17 오후 1: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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