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坐)’라고 하는 것은 한 순간에도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며, ‘선(禪)’이라 함은 본래의 자성을 보는 것이다.”
하택신회(670~713) 선사는 <보리달마남종정시비론>에서 좌선을 이렇게 정의했다. 그러나 고정관념을 무너뜨린 이러한 좌선의 정의는 이미 <유마경> ‘제자품’에 나타난다. “사리불아, 앉아있는 것만이 좌선이 아니다. 좌선이란 삼계에 몸과 뜻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며, 멸진정에서 일어나지 않으면서도 온갖 위의를 드러내는 것이며, 부처님의 도법을 버리지 않고 범부의 일을 나타내는 것이며, 마음이 안에도 머물지 않고 밖에도 머물지 않는 것이다.… 번뇌를 끊지 않고 열반에 드는 것이 좌선이니, 이렇게 좌선하는 사람은 부처님께서 인가하실 것이다.”
하택신회 선사는 유마 거사가 사리불에게 설하는 연좌(宴坐)를 들어 북종의 좌선방편을 비판하면서, 남종 돈교(頓敎)의 사상적인 근거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는 ‘기왓장을 무조건 간다고 해서 거울이 될 수 없듯이 좌선만으로는 견성할 수 없다’는 ‘마전작경(磨塡作鏡)’을 기연으로 깨친 마조도일(709~788) 선사의 일상선(日常禪)으로 발전되는 선구적인 사상이다.
이와 관련 정운 스님(동국대 박사과정수료)이 최근 <한국 불교학 결집대회 논집>에 발표한 <유마경의 수행체계 및 선사상 연구>는 <유마경>의 선사상을 생활선의 원류라는 측면에서 본격 조명했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은다. 정운 스님은 논문에서 “반야사상과 돈오견성(頓悟見性) 및 좌선의 배격을 특징으로 하는 남종선의 근거는 이미 <유마경>에 등장한다”고 주장한다. “<유마경>의 유심정토, 번뇌 즉 보리, 막착언설(莫着言說, 말에 집착않음), 불이(不二)사상 등은 선종에서 적극 수용해 생활선으로 정착하게 된다. 즉 일상적인 행 하나하나가 바로 부처의 행이므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가운데 좌선만을 고집하지 않는 수행으로 발전되었다.”
정운 스님에 따르면 <유마경>은 원시불교의 무상(無常) 무아(無我) 무상(無相) 자성청정(自性淸淨) 보리심(대비심) 반야사상 등을 내포하고 있으며, 실천적으로는 대승적인 공사상의 전개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의 실천적 전개방식이란 흐름아래 세간-출세간, 진리-방편, 깨끗함-더러움, 색-공, 미혹-깨달음이 둘이 아니며 ‘번뇌 즉 보리’라는 불이법문이 도출된다.
특히 보리달마(520년 중국도래)는 <능가경> 이상으로 <유마경>을 중시했는데, <이입사행론>은 <유마경>에 의한 반야의 논리가 배후에 담겨있다. 달마의 법문 중 무소구행(無所求行, 구하는 바 없는 행)은 일체개공(一切皆空)의 진리를 깨달아 집착하는 마음을 초월하는 실천행을 담고 있다. 이 무소구행은 <유마경> ‘불사의품’의 ‘약구법자 어일체법 응무소구(若求法者 於一切法 應無所求)’ 사상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후대 마조도일 선사의 ‘부구법자 응무소구(夫求法者 應無所求)’라는 사상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스님이 설명이다.
인도불교가 중국에 도래한 뒤, 선종의 수행차원에서 가장 큰 변모를 이룬 것은 수행방법으로 좌선만을 고집하지 않고 스님들만의 독점화된 수행이 아닌 재가불교화 되었다는 점이다. 정운 스님은 선종에서는 <유마경> ‘보살품’의 ‘4위의가 도량이며 3업이 불사’라는 말을 적극 활용하여 좌선과 노동 등 일상생활 모두를 불사로 보는 점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고 말한다. 인간의 일상 행위가 법계가 되며 3업(身口意)의 행위가 전부 부처의 행이라는 것이다. 이는 후대에 마조 선사의 ‘평상심이 도’라는 생활종교로 발전되었다.
“평상심이란 어떠한 것인가. 조작이 없고 시비가 없으며 취사가 없고 단멸, 상주가 없으며 범부라 할 것도 성인이라 할 것도 없느니라. 경에 이르되 ‘범부의 행도 아니요, 성현의 행도 아닌 이것이 보살의 행이니라.’ 다만 지금과 같이 행주좌와와 형편에 따라 움직이고 사물에 접하는 모든 것이 도인 것이다.”(경덕전등록)
이처럼 마조 선사는 <유마경> ‘문수사리품‘에 근거를 들어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불성을 볼 것을 주장했다. <유마경> ’보살품‘에 ‘직심시도량(直心是道場)’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현실의 구체적인 일상 속에서 선수행이 가능하다는 선종의 근거를 밝히고 있다. “곧은 마음(直心)이 도량이니 거짓이 없는 까닭이며, 행을 닦아가는 것(發行)이 도량이니 능히 일을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며, 깊은 마음(深心)이 도량이니 공덕을 증진하기 때문이며, 보리심(菩提心)이 도량이니 그릇됨이 없기 때문이다.” “보살이 만일 모든 바라밀로써 중생을 교화하면, 온갖 행위 즉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도량으로부터 와서 불법에 머무는 것이다.”(유마경)
‘도량’이라는 말을 승조(384~413) 스님은 ‘한가롭고 편안하게 수도하는 장소’라고 주석, 자신이 머무는 장소라도 수행할 여건만 갖추면 깨달음의 장소가 된다고 하였다.
생사 즉 열반, 번뇌 즉 보리를 말하는 <유마경>의 불이법문에서는 재가와 출가라는 이원적 대립개념을 넘어, 재가자라도 깨닫고자 하는 보리심을 발하면 그것이 곧 진정한 출가요 수행자이다. “만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게 되면 그것이 곧 출가하는 것이며 그것이 구족계를 받는 것이다.”(유마경 ‘제자품’) 이처럼 <유마경>은 일체개공이라는 주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현실에서 묘유(妙有)를 적극 전개하는 보살행의 입장을 강조하며, 재가인이 출가사문 만큼 청정수행을 할 수 있다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
정운 스님은 “<유마경>은 반야사상을 ‘생활의 실제적인 측면과 조화시키면서 어떻게 실천하느냐’ 하는 문제를 밝히기 위해 재가신도인 유마 거사를 등장시켜 생활 속에 공의 실천을 드러냈다”고 설명한다. 정운 스님은 “자리이타의 중생구제에 있어 차안(此岸)을 버리고 피안(彼岸)에서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구제한다는 대비심을 강조한 것이 <유마경>이다”고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