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종교계는 몇년 전부터 부처님오신날과 크리스마스, 부활절 마다 불교와 가톨릭, 개신교가 서로 축하해주는 등 종교간 이해와 화합을 추진해 왔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보기 힘든 종교간 이해의 표출이자 평화적 공존을 다지는 희망적 메시지다.
9.11 테러와 아프간, 이라크 전쟁에서 보듯 종교적 교조주의와 독선, 배타주의는 평화를 위협한다. 종교간에 열린 마음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해주는 풍토의 확산은 그래서 더욱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가운데 자비와 사랑, 생명정신의 고양과 봉사란 종교 본연의 사명에 걸맞게 우리 사회의 공동선 건설에 한마음이 된 성직자들이 의외로 많다. 이들은 끈끈한 우정을 바탕으로, 가치관의 혼돈, 생명경시 풍조, 빈부격차, 분열과 폭력 등 사회문제를 함께 고민하며 이 땅에 불국토와 천국을 건설하는 일에 도반이 되어 협력하고 있다.
■ 현장 스님과 이해인 수녀
지난 4월 11일, 남도땅 보성 대원사에서 건강달리기 대회가 있었다. 빨리 뛰기보다 가족과 이웃이 함께 대원사 벚꽃길을 음미하는 잔칫날이었다. 늦게 도착한 참가자와 가족에게 더 푸짐한 상품이 돌아갔다. 그 상품 가운데 저자인 이해인 수녀가 직접 사인한 시집 30권이 기증됐다.
“해인 수녀님은 종교를 떠나 형제이고 도반입니다. 만나면 여느 사람들보다 더 편하고 격의가 없어요.”
성직자이지만 현장 스님과 해인 수녀에게도 터놓고 말하기 어려운 고뇌가 있다. 그럴 때면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지 서로의 지혜를 구하곤 한다. 그래도 풀리지 않을 때는 상대의 종교적 힘으로 기도해 달라고 떼도 쓴다.
현장 스님과 해인 수녀가 처음 만난 것은 80년대 후반. 당시 서울 법련사 주지였던 스님은 타종교 성직자들과도 많은 교류를 나누고 있었다.
하루는 화순에 살고 있는 한 수녀의 소개로 해인 수녀의 특강에 참석했다. 강의가 끝나고 해인 수녀가 육체질환이 있는 미혼 독신 여성들의 모임인 ‘사랑의 고리’ 회원들과 함께 잠을 자러 갔다. 그날 현장 스님은 해인 수녀가 남들이 함께 하기를 꺼리는 잠자리에 스스럼없이 찾아가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감성적인 언어로 사람들의 아픔을 승화시키는 그녀의 시가 그냥 나오지 않음을 확인했던 것이다.
그 후, 현장 스님이 보성 대원사로 주석처를 옮기면서 서로의 인연은 더욱 빈번해졌다. 외국에서 신부나 수녀가 해인 수녀를 찾아오면 대원사에 템플스테이를 요청하곤 했다. 가끔 수도원 피정 때 스님이 초청되어 참선, 108배 등 불교수행을 소개한다. 2002년 대원사 개산 1500주년을 기념해 ‘세계평화기원 종교음악축제’를 대원사에서 개최했다. 그날 해인 수녀는 축시를 직접 낭송하며 세계평화를 기원했다. 지난해 대원사에서 열린 국제 차문화 교류대회에서도 해인 수녀는 ‘차를 마셔요’라며 축시를 낭송했다.
현장 스님과 해인 수녀, 그들은 종교와 성(性)은 달라도 가장 마음이 잘 통하는 도반이다.
■ 종선 스님과 김동규 성공회 신부
“어, 동규(신부)야!” “어? 재철(종선스님)아!”
고등학교 동창이 스님과 신부가 되어 25년 만에 다시 만났다. 2000년 초파일 부산기독교교회협의회를 비롯한 8개 교단 대표들이 통도사를 축하 방문한 자리에서 다시 만난 두 주인공은 종선 스님(내원암 주지)과 김동규 신부(성공회 용호교회).
종선 스님은 부산기독교교회협의회 방문 당시 함께 왔던 송영웅 목사와 김동규 신부를 내원암에 초청, 종교를 초월한 연합 봉사단체 결성을 추진하기도 했다. 또한 매년 10월 열리는 산사음악회 무대에는 스님, 신부, 목사가 손을 맞잡고 무대에 올라 큰 박수를 받기도 했다. 이렇게 만남이 잦아지면서 종교인 한마음 축구대회로 크게 승화됐다.
월드컵 개최 1주년이 되던 2003년 6월 울산 남구 월드컵 문수 축구경기장에서는 불교, 기독교, 성공회에 이어 원불교까지 합세했다. 2003년 10월에 열린 내원암 산사음악회에는 불교, 기독교, 성공회, 천도교, 원불교 5개 종파 종교인들이 한 무대에 섰다. 비구, 비구니, 신부, 수녀, 교무, 정녀 등 성직자 20여명으로 구성된 5대 종교연합합창단의 합창도 선보였다.
2004년 6월 울산 남구 문수축구경기장에서 종교인 축구 대회가 다시 열린다. 부처님오신날 기념법회가 열리는 내원암에서 봉축의 기쁨을 함께 나누며 축구대회에 대한 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예정. 올해는 천주교, 천도교의 참여도 이끌어낼 계획이다.
■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
2003년 5월 23일. 새만금 갯벌을 살리자며 세 번 걷고 한번 절하며 먼길을 돌아온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 삼보일배 순례가 끝나자마자 수경스님은 문 신부를 꼭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총 2백85km의 수행길을, 하루 3천배의 절을 올리며 5km를 행진한 고된 길이었지만 오체투지를 하면서 생명의 존귀함을 깨달았다는 두 성직자. 수경 스님이 자신의 생명까지 건 고행에는 늘 문규현 신부가 옆에 있었다. 스님이 문 신부님과 함께 삼보일배를 한 것은 이것이 세 번째였다. 1999년 12월 지리산 댐 문제로 낙동강도보순례를 하면서부터 만나 단식과 삼보일배를 하면서 북한산 관통도로를 온몸으로 막고 새만금 건설 반대에까지 함께 한 동지다. 서로를 형님, 아우로 부를 정도로 각별한 그들의 만남을 우정을 넘어선 형제애로 묘사하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우리가 만나면 맨날 단식에 삼보일배로 농성하는 일뿐인데 그만 갈라서자”는 수경 스님의 농에 “나도 바라는 바다. 제발 안보고 살자”며 답하는 문 신부이지만 이들은 서로 떨어져 있으면 하루 12번도 더 연락을 하는 살가운 정을 과시하곤 한다.
■ 허운 스님과 정홍규 신부
“우리의 만남은 산골짝에 물이 갈라져 따로 떨어져 흐르다가 다시 만난 것과 같습니다. 종교를 떠나 같은 구도의 길을 가는 입장에서 마음을 나누는 친구 사이지요.”
대구 수성구 고산성당 정홍규 신부는 허운 스님과의 사이를 이렇게 이야기 했다. 비슬산 은적사 주지 허운 스님은 사찰이나 불교가 사회나 이웃에 회향하는 여러 실천방법 중 제일 시급한 것이 환경문제라고 생각한다. 허운 스님은 2002년 10월 대구 시민의 자연공원인 앞산 은적사로 부임하면서 환경문제에 마음을 쏟게 됐고, 그러면서 정 신부를 만났다.
“정홍규 신부님은 심성이 부드럽고 사고가 유연하지요. 15년간 환경운동을 상당히 체계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데 배울 점이 많아요." 허운 스님은 정 신부를 이렇게 자랑한다.
정 신부와 허운 스님의 만남은 오래 되진 않았지만 종교를 초월한 우정이 지역에 따뜻한 화제를 남기면서 지금까지 돈독히 다져지고 있다. 허운 스님이 작년 부활절을 맞아 축하의 의미로 난 화분을 보낸 것이 시작이었다. 같은 해 부처님오신날엔 정 신부와 신도들이 은적사를 방문해 관불의식을 같이했으며, 급기야 작년 5월 25일에는 허운 스님이 종교간의 벽을 넘어 고산성당에서 법문하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작년 11월 고산성당에서 개최한 우리쌀 살리기 시식회에도, 12월 은적사 송년법회에도 올 2월 예수재에도 두 성직자는 함께 있었다. 올 초파일에도 정 신부는 평화의 등을 달기 위해 은적사를 찾을 예정이다.
정 신부는 스님이 방문할 때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반가움을 표했는데, 목가적 평화로운 풍경의 동판액자를 선물하는가 하면, 한번은 수련을 사다가 성당주위에 심어 온통 수련밭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얼마 전에는 작년 부활절 날 허운 스님이 선물한 난 화분에 꽃이 활짝 펴, 정 신부가 미사시간에 신도들에게 보이고 화합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했다고 한다.
허운 스님과 정홍규 신부는 앞으로 지역발전과 환경을 위해 함께 갈 길을 구상중이다. 환경을 위한 작은 음악회도 구상중이며 과거에 사상적 대립으로 억울하게 스러져간 영가를 위한 위령제도 생각중이다. 성가대와 합창단의 화음을 이끌어 내는 것도 큰 뜻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