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이란 무엇일까. 이를 위해 어떻게 수행해야 하나. 깨닫고 난 이후에는 어떻게 닦아야 하나. 상구보리가 먼저인가, 하화중생이 먼저인가?’
계간〈불교평론> 봄호는 ‘깨달음과 수행에 관한 몇 가지 관점’이란 주제로 특집을 마련, 이러한 궁금증에 답하는 다양한 시각을 보여줘 눈길을 모은다.
이 특집에는 모두 네 편의 논문이 게재되었는데, 공통적으로 불교의 깨달음과 수행관에 대한 ‘고정관념’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깨달음이 불교의 목적인가’(홍사성 불교신문 주필), ‘선의 깨달음, 그 정체와 문제점’(김성철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 ‘깨달음의 불교에서 행복의 불교로’(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 ‘수행도의 다양성과 깨달음의 의미’(안성두 금강대 국제불교문화연구소 연구원) 등의 논문들은 한결같이 ‘깨달음 지상주의’를 탈피해 현실 속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기존의 깨달음에 대한 인식전환은 홍사성 주필이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깨달음은 오랜 시간 좌선명상을 해야 깨닫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그야말로 ‘한 생각’ 돌리면 그만인 그런 깨달음이다. 대승불교의 보살이 대자대비심으로 서원과 회향의 보살행을 실천하는 것도 이것을 알았기 때문이지 다른 것을 깨달아서가 아니다. 홍 주필은 “깨달음은 진리에 대한 인식전환이기에 경전을 읽거나 설법을 듣고도 가능하다”며 최초의 여섯 아라한을 예로 든다. “부처님이 녹야원으로 가서 교진여를 비롯한 다섯 수행자를 교화한 뒤 그들이 진리를 완전하게 이해하자 ‘이제 이 세상에는 6명의 아라한이 있다’고 말한다.”
조성택 교수 역시 ‘깨달음 지상주의’를 비판한다. 그는 “승가에서 조차 깨달음은 더욱더 희귀한 뉴스가 되고 있는 지금 출가자 중심의 ‘최종적 깨달음’을 위한 불교는 이미 그 존재 이유를 상실하고 있다”고까지 말한다.
“원효나 경허 등의 파계 행위에 대한 선불교 전통 일반의 관용적 태도는 ‘마음의 자유가 행위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깨달음 지상주의에 책임이 있다. 할과 방은 바로 그 당시 ‘현장’에서의 일회적인 활발발한 사건이다. 대승 보살사상의 핵심은 중생 구제의 서원으로서 ‘자신의 깨달음을 미루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보살사상의 종교적 동기는 출가중심 불교의 깨달음 지상주의의 극복에 있었다고 본다.”
조 교수는 붓다가 성도 후에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것처럼 깨달은 이후의 살아가는 모습 또한 도덕적이며 상식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수행에 대한 관점과 깨달음 이후의 닦음에 대해서도 다양한 논의가 보인다.
김성철 교수는 깨달음 전후의 수행 방식에 대해 언급하면서 견성 후에도 부처님의 자취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처님의 마음 전체를 닮기 위해서는 선 수행을 통해 지적인 깨달음을 추구하기 전에, 탐심과 진심을 가라앉히는 부정관과 자비관을 닦음으로써 우리의 감성을 정화해야 한다. 견성 후에도 ‘습기를 제거해야 한다’ 든지 ‘견성 후에 보림한다’는 말이 선가의 격언으로 회자되어 온 것은 ‘선 수행’만으로는 탐욕이나 분노, 교만과 같은 ‘감성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혹, 견성 후에 습기를 제거하지 않을 경우 어떻게 될 것인가, 가장 안전한 것은 부처님의 자취를 따르는 것이다.”
홍사성 주필의 견성 이후 수행론은 더욱 구체적이다. 홍 주필은 “‘마음이 곧 부처’임을 깨달았다면 나는 정말 부처로서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이 화두가 되어야 한다. 화두 타파란 ‘그렇게 살고 있다’는 대답이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깨달음을 위한 수행’이란 관념을 폐기하는 것이 좋다. 불교 수행은 깨달은 내용을 실천하기 위한 수행이고 부처로 살기 위한 수행이며 열반을 완성하기 위한 수행이다. 계정혜 삼학과 사념처, 팔정도 이것을 대승적으로 표현한 육바라밀은 부처로 살기 위한 수행이다.” 홍 주필은 깨달음과 열반의 문제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구사론> ‘삼도론(三道論)’을 예로 든다. 삼도란 견도(見道), 수도(修道), 무학도(無學道)를 가리키는 말로 부처에 이르는 차제와 방법이다. 여기서 부처님이 설한 교리를 바르게 아는 것이 견도이고 깨달음이다. 수도란 알고 깨달은 진리를 실천해 몸에 배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최고의 경지,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열반과 해탈의 경지인 무학도에 이르게 된다는 것.
안성두 연구원은 수행이란 ‘병에 대한 다양한 처방’일 뿐이라고 말한다. 수행이란 하나의 치료약과 같은 것으로 자신의 능력과 관심에 맞는 방법을 채택하는 것이기에, 모든 수행도는 그것에 의해 궁극적 진리가 증득되는 한에 있어 모두 ‘하나의 맛(一味)’이란 것이다.
깨달음과 수행을 문제 삼을 때 약방의 감초처럼 빠질 수 없는 부분은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의 관계 설정이다.
홍사성 주필은 대승불교의 전통적인 해석에 따라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을 선후의 문제가 아니라 동시적인 것으로 설명한다. 대승 실천수행의 핵심이라 할 서원과 회향의 사상은 하화중생을 통해 상구보리를 성취하라고 가르친다. 예를 들어 아미타 48원, 약사여래 12대원, 보현보살 10대원은 모두 하화중생으로 상구보리를 이루겠다는 발상이란 것이다. 홍 주필은“깨달음이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며 “바른 수행은 팔정도와 사념처를 닦고 보시(布施), 애어(愛語), 이행(利行), 동사(同事)와 같은 덕목을 실천하는 것이다”고 규정한다.
조성택 교수는 “깨달음 후에도 붓다는 팔정도와 바라밀을 실천하였을 뿐이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과 깨달음 이후 걸어가는 길은 똑같은 길이다”고 말한다.
조 교수는 “우리가 보살로서 달성해야 할 ‘영원한 현생’에서의 수행의 목표는 나와 타인의 행복이다”며 타인을 위해 봉사하고 도덕적으로 살겠다는 보살이라면 ‘행복하십시오’ 라고 행복을 기원하는 것이 더 불교적이라고 강조한다.
안성두 연구원은 “재가든 출가든 불교도가 보살적 이상을 내면화 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신적, 사회적 실천에 나설 때 참다운 대승의 세계는 열리게 된다”고 거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