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8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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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국 고승들의 공부법
최근 조계사-현대불교가 공동주최한 ‘전국 선원장 초청대법회’를 계기로 참선 수행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봉은사의 육조단경 논강, 보문사의 선사 7인 초청법회 등 선승들을 초청해 법문을 듣는 법석도 잇달아 펼쳐지고 있다. 이를 계기로 한국 선불교의 기틀을 새롭게 다진 근ㆍ현대 고승들의 참선 공부법을 들어본다.

■경허(鏡虛, 1849~1912) 선사의 참선 수행법

출세 대장부가 마음을 내고 결정하는 뜻을 세웠으면, 평생에 깨달아 얻은 것, 풀어 알아 얻은 것, 일체 불법, 네 귀절 여섯 귀절의 문장, 말로 말하는 삼매 등을 가져다 한꺼번에 쓸어 태평양 바다 속으로 던져 버리고, 다시는 들어 말하지 말며, 팔만사천 미세한 생각 머리를 잡아 단번에 끊어버리고, 본래 참구하던 화두를 들어 일으키되, 맨 뒤 한 귀절에만 힘을 써서 들어 일으키어 들며 오고 들며 가다가 화두만 앞에 나타나서 들지 않아도 스스로 들어지며, 고요한 가운데나 시끄러운 가운데나 들지 않아도 들어지거든 바로 이때에 의심을 일으킴이 좋으니, 다니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옷입거나 밥먹거나 똥누거나 오줌누거나 하는 일체 곳에 온 몸으로 아울러 한낱 의심덩이로 되어져서 의심하여 오고 의심하여 가며, 맞닥뜨려 오고 맞닥뜨려 가되 몸과 마음이 정(定)을 이루거든 그 환함을 찾을지언정 화두상을 향하여 점쳐 헤아리거나 어록이나 경서에서 찾거나 함은 옳지 않으니 바로 모름지기 닭이 알을 깔 때에 새끼가 알속에서 껍질을 탁 쪼아 깨는 마당에 끊어지며 짚불에서 콩이 터져 나오는 것과 같이 되여야 바야흐로 비로소 집에 이른 것이니라.

만약 이 화두가 들어도 일으켜지지 않고 화두가 식어져서 담담히 재미 없을 때에는 나직나직 소리를 내어 이뭣고를 잇달아 세 번쯤 들면 화두가 문득 힘이 있어짐을 깨달을 것이다. 여기에 이르면 바로 힘을 쓰기 좋을 것이니 가히 놓아 버리지 말지니라.

모든 사람은 각각 뜻을 세우고 정신을 차려서 눈알을 잡아 비비어 정진하는 가운데 다시 더 정진하며, 용맹한 곳에 다시 더 용맹하여 맷돌 맞듯 함에 밟아 부딪히면 온갖 것이 깨달아 질 것이니 여기에 이르렀거든 바로 선지식을 친견함이 좋으니라. 이십 년 삼십 년을 묻지 말고 물가에나 숲 아래서 길이 성스러운 태아를 기룰지니라.

하늘 용을 추천하여 낸다면 감히 사람들 앞을 향하여 큰 입을 열고, 큰 말씀을 하며 금강권을 삼켰다 토했다 자재하며 가시 찌르는 숲 가운데라도 팔을 흔들고 지내 나올 것이며, 한 생각 가운데에 시방세계를 삼켜버리며 삼세의 모든 부처님을 토해 낼 것이니 만일 여기에서 이르렀다면 바야흐로 너의 이마에 노사관을 쓰고 보신(報身) 부처님과 화신(化身) 부처님 머리에 앉았다고 허락하려니와 혹 그러하지 못하거든 낮에도 참구하고 밤에도 참구하여 포단높이 붙여 급히 눈알을 붙여 보아라.
이것이 무엇인고?


■만공(滿空, 1871-1946) 선사의 나를 찾는 법

참선법은 옛부터 있는 것이지만 중간에 선지식들이 화두드는 법으로 참선하는 법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그 후로 수없는 도인이 출현하였나니, 화두는 1700여 개가 있는데, 내가 처음에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고?’란 화두를 의심하였는데, 이 화두는 의심이 두 개로 갈라지므로 처음 배우는 사람은 ‘만법이 하나로 돌아갔다 하니 그 하나는 무엇인고?’이렇게 화두를 들게 하는 것이 가장 좋으리라.

하나는 무엇인고? 의심하여 가되, 의심한다는 생각까지 끊어진 적적(寂寂)하고 성성(惺惺)한 무념처에 들어가야 나를 볼 수 있게 되나니라.

하나라는 것은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요, 이 정신 영혼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니, 하나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고?

의심을 지어 가되, 고양이가 쥐를 노릴 때에 일념에 들 듯, 물이 흘러갈 때에 간단(間斷)이 없듯, 의심을 간절히 하여가면 반드시 하나를 알게 되나니라.

참선한다고 하면서 조금이라도 다른 데 미련이 남아 있거나, 인간으로서의 자랑거리인 학문이나, 기이한 재주 등 무엇이라도 남은 미련이 있다면 참선하기는 어려운 사람인 것이니, 아주 백지로 돌아가야 하나니라. 크게 나의 구속(拘束)에 단련을 치른다면 그 대가로 큰 나의 자유를 얻게 되나니라.

참선을 하려면 먼저 육국(六國, 眼耳鼻舌身意의 여섯 감관기관)의 전란(戰亂)을 평정시켜 마음이 안정되어야 비로소 공부할 준비가 된 것이니라.

가장 자유롭고 제일 간편한 공부이기 때문에 이 공부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염라국 사자(使者)의 눈도 피할 수 있나니라.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일체가 생기고, 한 생각이 멸할 때 일체가 멸하나니라. 내 한 생각의 일어나고 사라짐이 곧 우주의 건립과 파괴요, 인생의 생사니라.
말이 입에서 나오기 전에 그르쳤다 함은 물질 이전의 마음을 지적한 것이니라.
공부가 잘 된다고 느낄 때 공부와는 벌써 어긋난 것이니라. 꿈 속에서도 공부해 가는 것을 증험(證驗)하여 선생을 삼을 것이니라. 꿈도 없고 생시도 없이 잠이 푹 들었을 때에 안심입명처(安心立命處)를 어디에 두는 지 알아야 하느니라.
꿈이라 하는 것은 업신(業身)의 동작인데, 깨어 있을 때는 생각만으로 헤매다가 잘 때 업신이 제 몸을 나투어 가지고 육신이 하던 행동을 짓는 것이니라. 꿈과 생시가 일여(一如)하게 공부를 해 나갈 수 있어야 하나니라.

공부를 잘하고 못하는 문제보다도 이 공부밖에 할 일이 없다는 결정적 신심부터 세워야 하나니라. 오전(悟前)이나 오후(悟後)나 한 번씩 죽을 고비를 넘겨야 하나니라.


■한암(寒巖, 1876-1951) 스님의 선문답 21조

참선이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참(參)이란 합(合)함이니, 자성에 합하여 청정한 마음을 보양(保養)하고 바깥으로 치달려 구하지 않음이다. 오직 바라건대 일체 중생이 다 함께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여 무상대도(無上大道)를 깨달아서 다시는 삿된 그물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속히 불과(佛果)를 증득하기를 바라고 바라는 바이다.

참선을 하는 사람이 일단대사(一段大事)의 인연을 밝히고자 한다면, 맨 처음 자신의 마음이 부처이며 자신의 마음이 법이며 구경(究竟)에 다름이 없음을 믿어서 철저하게 의심이 없어야 한다. 만일 이와 같이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면, 비록 만겁동안 수행을 한다 할지라도 마침내 진정한 대도(大道)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보조선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일 마음 밖에 부처가 있고 성품 밖에 법이 있다고 말하여 이러한 마음을 굳건히 고집하면서 불도를 구하고자 한다면, 비록 진겁(塵劫 :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소신연비(燒身然臂)하며, 뼈를 부수어 골수를 내고, 피를 내어 경전을 베끼며, 장좌불와(長坐不臥)하고, 묘시(09~11시)에 일종식(一種食)을 하며, 그리고 일대장경(一大藏經)을 모두 읽으며, 갖가지 고행을 한다 할지라도,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격이기에 스스로 수고로움만 더할 뿐이다.”라고 하셨으니, 이는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닦아서 스스로 불도를 이루는 것이 제일의 요체(要諦)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만일 마음 밖에 부처가 있다고 한다면 부처는 곧 외불(外佛)이니, 나에게 어찌 부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제불(諸佛)이 나의 도가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상근기(上根機)의 큰 지혜를 가진 이는 하나의 기연과 경계에서 이를 잡아 곧바로 사용하므로 굳이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지만, 만일 참구를 논한다면 마땅히 조주(趙州)의 ‘무자(無字)’와, ‘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와, 동산(洞山)의 ‘마삼근(麻三斤)’과, 운문(雲門)의 ‘마른 똥 막대기’ 등 맛이 없는 말을 의심하고 또 의심하며 이 화두를 끊임없이 들어 마치 모기가 무쇠 소에 앉아 주둥이를 박지 못할 곳에까지 몰입하듯 하여야 한다.

만일 조그마한 차별의 생각과 터럭 끝만한 계교와 헤아림이 그 사이에 동하면, 옛 사람이 말한 “잡독이 마음에 침투하여 지혜를 손상한다.”함이니 학인이 가장 먼저 깊이 경계해야 할 것이다.

옛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힘이 안 드는 곳이 곧 힘을 얻는 곳이다."고 하니, 화두가 의심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의심이 되고, 화두를 들지 않아도 스스로 들어짐에 이르러서야 육근(六根)의 문이 자연히 툭 열리어, 홀로 드높고 드높으며, 평탄하고 평탄하게 되어, 마치 달빛이 시내 물결 속에 투사되어 부딪쳐도 흩어지지 아니하고 흔들려도 잃지 않음과 같은 때에 이르러야 대오(大悟)에 가까울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서 터럭 끝만큼이라도 지각의 마음을 내면 순일(純一)한 오묘함이 끊어져서 대오(大悟)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니, 간절히 이 점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효봉(曉峰, 1888-1966) 스님 법문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다.
우리 형제가 동서남북에서 모두 여기 모여 왔으니 무엇을 구하기 위해서인고. 부처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내가 곧 부처인데 무엇 때문에 부처가 부처를 구하려는가. 그것은 바로 물로써 물을 씻고 불로써 불을 끄려는 것과 같거늘, 아무리 구한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여러 대중은 다행히 저마다 일없는 사람을 좋아하면서 무엇 때문에 고통과 죽음을 스스로 만드는가. 그것은 들것을 찾다가 옥을 떨어뜨려 부수는 격이니, 만일 그렇게 마음을 쓰면 벗어날 기약이 없을 것이다. 각자의 보물 창고에는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으니, 그 끝없는 수용(受用)을 다른 데서 구하지 말라.

한 법 도취할 것이 없고 한 법도 버릴 것이 없으며, 한 법의 생멸하는 모양도 볼 수 없는 것이니, 지금부터 모든 것을 한꺼번에 쉬어 버리면, 온 허공계와 법계가 털끝만한 것도 자기의 재량(財糧)이 아닌 것이 없을 것이다. 만일 이런 경지에 이르면 천불(千佛)이 세상에 나오더라도 나를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니, 생각지도 말고 찾지도 말라. 내 마음은 본래 청정한 것이니라.

만사를 모두 인연에 맡겨 두고 옳고 그름에 아예 상관하지 말라 허망한 생각이 갑지기 일어나거든 한 칼로 두 동강을 내어 버려라. 빛깔을 보거나 소리를 듣거나 본래 공안에 헛갈리지 말지니 만일 이와 같이 수행하면 그는 세상 뛰어난 대장부이리.

그런데 그 속의 사람은 고요하고 한적한 곳을 가리지 않는다. 내 마음이 쉬지 않으면 고요한 곳이 곧 시끄러운 곳이 되고, 내 마음이 쉬기만 하면 시끄러운 곳도 고요한 곳이 된다. 그러므로 다만 내 마음이 쉬지 않는 것을 걱정할 것이요, 경계를 따라 흔들려서는 안 된다. 경계는 마음이 아니요 마음은 경계가 이니니, 마음과 경계가 서로 상관하지 않으면 걸림 없는 한 생각이 그 앞에 나타날 것이다.

우리 형제들이 삼 년이나 몇 십년 동안에 바른 눈을 밝히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기 소견에 집착하기 때문이니, 그럴 때는 선지식을 찾아 공안을 결택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에 그런 선지식이 없을 때에는 고인(古人)의 어록(語錄)으로 스승을 삼아야 하느니라. 또 우리가 날마다 해야 할 일은 묵언(默言)하는 일이니, 아는 이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이는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옛 사람의 말에,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가는 곳마다 걸린다 하였으니 이 어찌 믿지 않을 것인가. 그대가 고향에서 왔으니 아마 고향의 일을 알 것이다. 떠나는 날 그 비단창 앞에 매화꽃이 피었던가? 주장자로 선상을 한번 울리고는, “맑은 밤 삼경에 별들이 반짝이고 강성(江城) 오월에 매화꽃 떨어지네.” 하고 자리에서 내려 오시다.

자기생각 집착이 깨달음 걸림돌
만사를 인연에 맡겨 두고
옳고 그름에 상관하지 말라
허망한 생각이 일어나거든
한 칼로 두 동강을 내라.


■동산(東山, 1890∼1965) 스님 법문

그리고 그린 것이 그 몇 해던가(畵來畵去幾多年)
붓끝이 닿는 곳에 살아 있는 고양이로다(筆頭落處活猫兒)
하루종일 창 앞에서 늘어지게 잠을 자고(盡日窓前滿面睡)
밤이 되면 예전처럼 늙은 쥐를 잡는다(夜來依舊捉老鼠)

“공부인은 계행을 깨끗이 가져야 한다. 더러 보면 계를 우습게 여기고 불조의 말씀을 신(信)하지 않는 이가 있다. 부처님이 그렇게 행한 일이 없고 조사가 그렇게 한 일이 없다. 해(解)와 행(行)이 분명해야만 한다. 만일 해와 행이 나누어지고 각각 다를 것 같으면 이것은 온전함이 아니다.

참으로 공부를 여실히 지어 나가면 저절로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이 원만해 진다. 계(戒)란 별 것이 아니다. 미(迷)해서 잃었던 내 마음을 다시 회복하는 그 때가 곧 계이다. 그렇게 알면 곧 정(定)이 있고, 정(定)이 있을 때 계가 나는 것이며, 도(道)가 있을 때 계가 나는 것이며, 도(道)가 있을 때 계가 함께 나는 것이니, 정과 계와 도가 하나이기 때문이다.”

물은 한 물이나 하나는 독이 되고 하나는 젖이 된다. 같은 한 마음을 가지고 법을 듣는데 한 사람은 지혜를 이루고 한 사람은 도리어 번뇌망상의 독해(毒害)를 이루니 듣는 바 법은 하나인데 한편에는 지혜가 되고 다른 한 편에는 번뇌의 독해가 되니 왜 그런고?

이 마음은 본시 뚜렷하여 어디는 있고, 어디는 없고, 어디는 더 생각하고, 어디는 덜 생각하고 하는 치우침이 없고 본래 평등하여 피차(彼此)가 없는 것이다. 법이 다른 것이 아니요, 사람이 다른 것이다.

참으로 바르고 철저한 신심으로 마음을 순종하여 법을 듣는 사람은 지혜를 이룰 것이고 그 마음을 거슬려 순종치 않으면 지혜가 변하여 번뇌망상의 독해가 되는 것이다.

“본래 부처님 법이라는 것이 닦을 것이 없는 걸 알고 닦아야 바로 닦는 것이지, 닦을 것이 있는 줄 알고 닦으면 바로 닦지 못한다.”

“삼계는 오직 마음이니, 한 마음의 가운데 무슨 성쇠가 있겠는가? 천겁을 지나도 예스럽지 않고, 만세에 걸쳤으나 항상 오늘이네. 해마다 해마다 좋은 해, 달이면 달마다 좋은 달, 날이면 날마다 좋은 날, 때마다 때마다 좋은 때이니, 무슨 간택이 있으리요.”


■경봉(鏡峰, 1892-1982) 스님 법문

부처란 깨닫는다는 뜻이다. 무엇을 깨닫는가 하면 나의 심성(心性) 즉 진아(眞我)를 깨닫는 것을 말한다.

일상 생활에서 매사를 깨달아 알면 부처이다. 마음 외에 부처가 따로 없고 부처 외에 따로 마음이 없으니 부처와 마음이 둘이 아니다.

마음 청정한 게 바로 부처이다. 우리의 마음자리가 본래 맑고 밝은 것이지만 근본 무명인 탐(貪) 진(瞋) 치(痴) 삼독 때문에 밝음을 잃어 버려서 말과 행동이 거울에 때가 낀 것처럼 된 것이다.

우리는 이 사바 세계를 무대로 연극을 한바탕 멋들어지게 하다 가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멋들어지게 하는 것인가 하면, 가령 연극 배우가 비극의 배역을 맡았을 때는 마음에 딴 생각을 다 비우고 자신이 그 극중 배역과 혼연일치가 되어서 하는 연기라야만 관객이 감명 받을 것이다. 사바세계에서 각자가 맡은 배역을 잘 해내려면 물질과 사람에 대한 애착을 버려야 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 나올 때 빈 몸, 빈 손으로 왔는데 공연한 탐욕과 쓸데없는 망상으로 모든 근심이 시작되는 것이다.

선(禪)이란 마음 가운데 모든 망상을 제거하고 진여(眞如)의 본성을 나타내는 공부이며 몸 가운데 화기(火氣)를 내리고 청정한 물기운(水氣)을 조화시켜 주는 것이니, 망상을 쉬면 물 기운이 오르고 정신과 기운이 상쾌하여진다.

그러나 만약 망상을 쉬지 못하면 불기운이 항상 위로 올라가 온 몸의 물 기운을 태우고 정신의 광명까지 덮는다. 왜 그런가 하면 사람의 몸은 마치 기계와 같아서 사대의 기운이 아니고는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못하는데 사람의 눈, 귀, 코, 혀, 몸, 마음의 육근 기관(六根機關)은 거의 두뇌 쪽에 있으니 자연히 두뇌로 화기가 집중되어 온 몸의 물 기운을 졸이고 태우는 게 마치 등불을 켜면 기름이 닳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므로 노심초사하여 무엇을 오래 생각하거나 자세히 보든지 소리를 높여 발을 하면 반드시 얼굴이 붉어지고 입안이 바짝 마르지 않는가.

이것이 곧 불기운이 위로 오르는 현상이니 당연 할 일에 육근 기관을 쓰는 것도 조절해 가며 써야 하거늘 하물며 쓸데없는 망상을 끓여서 두뇌에 불을 밤낮으로 켜면 되겠는가.


■금오(金烏, 1896~1968) 스님의 법어


시방세계를 꿰뚫어 보고나니(透出十方界)
없고 없다는 것 또한 없구나(無無無亦無)
낱낱이 모두 그러하기에(個個只此爾)
아무리 뿌리를 찾아봐도 없고 없을 뿐이네(覓本亦無無).

마음은 마치 여의주 같아서 모든 것이 마음 먹은 대로 된다. 마음만 깨끗하게 한다면 근심 걱정과 일체의 고통을 여윌 수 있다. 천상천하를 찾아보아도 마음은 자취가 없으나 홀연히 깨달으면 보지 못한 한 물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을 깨달으면 마음이 도가 된다.

“마음의 주인공아, 내가 너를 알면 성인이 되지만 너를 알지 못하면 범부가 되어 생사의 바다에 빠져 모든 고통을 겪을 것이다. 나를 모르고 산다는 것은 혼이 흩어지지 않았으되 죽은 사람이요, 눈은 떴으되 눈 뜬 장님인 것이다. 모든 죄는 내가 나를 모르는데서 생기는 것이다. 나를 찾았을 때 이러한 죄와 속박이 풀려진다.”

무(無)의 밭에서 자란 무심(無心)은 일체의 어리석은 마음을 앗아간다. 무심은 곧 티끌 한 점 없는 어린아이의 마음이다. 무의 반대편에 유(有)가 서 있다. 유의 밭에서 성장한 유심(有心)은 사사로운 마음, 삿된 마음, 헛된 생각의 뿌리다.

우리 사회의 모든 병폐는 다른데 있지 않다. 유심이라는 전염병에 의해 황폐해지고 있는 것이다. 남보다 많이 구하려 하고, 가지려 하고, 빼앗으려 하는 탐욕과 이기심이 본디 극락인 이 세상을 아수라장으로 뒤집어 놓고 있는 것이다.
도(道)를 배우려면 먼저 눈 밝은 스승에게 나아가야 한다.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 도업(道業)을 성취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리고 불도(佛道)를 성취하려고 뜻을 지닌 이는 발심(發心)과 지혜심(智慧心)과 정진심(精進心)과 진실심(眞實心)과 견고심(堅固心)과 정행심(正行心)과 그밖에 정어(正語) 자리행(自利行)·이타행(利他行) 등 여러 가지 행도 아울러 닦아야 한다.

이제 도를 배우려는 이들이여! 스승을 찾아 참선(參禪)을 놓지 않으면 결정코 성불할 것이지만, 반대로 좋지 않은 탐진치(貪嗔癡)나 도둑질을 저지르면 거기에 상응하는 축생(畜生)과 가난의 죄업(罪業)이 따를 것이니, 살피고 살피라.
육신의 굶주림은 밥으로 면할 수 있지만 지혜의 굶주림은 오직 도덕으로만 채울 수 있다. 탐심(貪心)을 돌려 보시심(布施心)을 발행(發行)하자. 진심(嗔心)을 돌려 인욕심(忍辱心)을 장양(長養)하자. 치심(癡心)을 돌려 지혜심(智慧心)을 조양(照養)하자. 악심(惡心)을 돌려 선심(善心)을 상행(常行)하자.


■전강(田岡, 1898∼1975) 스님 법문

불립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 敎外別傳),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하는 법인 부처님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을 등등상속(燈燈相續)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만일 부처님의 정법을 조금이라도 잘못 전한다면 후세에 끼치는 허물이 많을 것이다. 깨닫지 못한 분상에는 영산회상(靈山會上)의 염화시중(拈花示衆)과 가섭미소(迦葉微笑)도 다 망설이다.

대중들이여! 위음왕불(威音王佛) 이후에는 스승 없이 스스로 깨친 자는 모두 천연외도(天然外道)라 했으니, 법을 받은 명안종사(明眼宗師)에게 인가도 받지 않고 자기가 제일이라 하며 묘한 언구문자선(言句文字禪)을 활구(活句)라 하고 학자들을 속이고 있다면 이러한 외도들은 부처님도 구하지 못하리라. 금일 최상승 활구참선법을 닦는 대중들은 명심할 지어다.

그러면 어떤 것이 활구참선법인가? 모름지기 조사관(祖師關)을 뚫어야 하나니 오직 화두만 잡드리 하되 이치길도 없고, 말길도 없고, 마음길도 없나니, 이렇게 용맹정진 해나가다가 직하에 대오하는 것이다. 즉 한번 듣고 언하에 문득 깨달아야 곧 너의 본성을 보느니라.

“일러라. 너의 본래면목을 일러라. 왜 너의 본래면목을 모르는가. 어서 일러라.”

이렇게 다그치고 입만 열면 “어느 곳을 향하여 입을 여는가?” 삼십 방을 막 내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그 주장자를 척 빼앗아 들고, “이 방을 한번 이르시오.” “오냐, 그 방을 맞고 나갈테니 너도 또 일러라.”

법이란 이런 것이니 여기서 똑바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즉, 격외장부(格外丈夫)인데 무슨 걸림이 있겠는가?

내가 나를 깨닫는 누진통(漏盡通)은 본각을 매하는 법이 없느니라. 오직 내가 나를 자각하는 것이 부처님의 정법인 것이다. 이렇게 대평등 대원융(大平等 大圓融) 이사무애 사사무애(理事無碍 事事無碍)의 원각대지를 증득하고 이 삼계화택에서 색상경계에 집착하는 중생들을 모두 제도하여야 하느니라.

마음은 일만 경계를 따라 구르고(心隨萬境轉)
구르는 곳마다 실로 능히 그윽하다(轉處實能幽)
흐름을 따라 성품을 인득하면(隨流認得性)
기쁨도 없고 또한 근심도 없느니라(無喜亦無憂).

이 게송은 이십이조 마나라 존자가 이십삼조 학륵나 존자에게 설하여 오백 마리의 학을 제도케 하신 게송이다. 삼라만상이 있는 그대로 법신이요 화장찰해(華藏刹海)다. 깨친 분상에는 무슨 걸림이 있으리오, 오직 인연있는 중생을 위하여 생사해탈의 정법을 전할 뿐이로다.


■성철(性徹, 1912-1993) 스님의 참선하는 법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마음이다(一切唯心)’라고 말합니다. 마음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 는 말입니다. 또한 즉심즉불(卽心卽佛)이라고도 합니다. 내 마음이 바로 부처님이라는 말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팔만대장경에 담겨 있는 만치 불교를 알려면 팔만대장경을 다 봐야 할 터인데 누가 그 많은 팔만대장경을 다 보겠습니까, 그렇다면 결국 불교는 모르고 마는 것인가?

팔만대장경이 그토록 많지만 사실 알고 보면 마음 ‘心’자 한 자에 있습니다. 팔만대장경 전체를 똘똘 뭉치면 ‘心’자 한자위에 서 있어서 이 한 자의 문제만 옳게 해결하면 일체의 불 교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일체 만법을 다 통찰할 수 있고 삼세제불(三世諸佛)을 한 눈에 다 볼수 있 는 것입니다. 자초지종이 마음에서 시작해서 마음에서 끝납니다. 그래서 내가 항상 마음의 눈을 뜨자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면 자기의 본성, 즉 자성(自性)을 보는데 그것을 견성(見性)이라고 합니다.

불교에서 수행하여 공부하는 단계를 보면, 첫째 동정일여(動靜一如) 즉 일상 생활에서 가고 오고 할 때나 가만히 있을 때나 말을 하거나 안 하거나 변함없이 공부가 되어야 합니다. 여여부변 하여야 합니다.

동정일여가 되어도 잠이 들어 꿈을 꾸면 공부는 없어지고 꿈 속에서 딴 짓하며 놀고 있는데, 꿈에서도 일여한 것을 몽중일여(夢中一如)라 합니다.

몽중일여가 되어도 앞에서 말했듯이 잠이 깊이 들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잠이 꽉 들었을 때에도 여여한 것을 숙면일여(熟眠一如)라 합니다.

숙면일여가 되어도 거기에 머물지 않고 더욱 나아가야 합니다. 백척간두(百千竿頭)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된다 말입니다. 그리하여 깨쳐야만 그것이 실제 견성입니다.

그런데 참선 공부하는 사람들을 보면 숙면일여는 고사하고, 몽중일여도 고사하고 더구나 동정일여도 안 되는 것을 가지고 견성했다, 깨쳤다고 인정해 달라고 나한테 온 사람만도 수 백명은 보았습니다. 이것도 병입니다.

이 화두란 것은 잠이 깊이 들어서 일여한 경계에서도 모르는 것이고 거기에서 크게 깨쳐 야 하는 것입니다. 공부를 하다가 무슨 경계가 나서 크게 깨친 것 같아도 실제 동정에 일여 하지 못하고 몽중에 일여하지 못하고 숙면에 일여하지 못하면 화두를 바로 안 것도 아니고 견성도 아니고 마음의 눈을 뜬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그 근본표준이 어디 있느냐 하면 잠들어서도 일여하느냐 않느냐,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 부지런히 부지런히 화두를 하여 잠이 꽉 들어서도 크게 살아나고 크게 깨쳐서 화두 를 바로 아는 사람, 마음 눈을 바로 뜬 사람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이야기를 가만 히 생각해서 하나라도 좋고 반쪽이라도 좋으니 실지로 마음의 눈을 바로 뜬 사람이 생겨서 부처님 혜명(慧命)을 바로 잇도록 노력합시다.
김재경 기자 | jgkim@buddhapia.com |
2004-03-23 오전 10: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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