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삶에서 ‘속도’를 떨쳐낸 느림의 문화가 주목받고 있다. ‘빨리빨리’를 외치며 숨가쁘게 살아온 이들이 이제는 ‘슬로비족(slobbie:slower but better working people)’이 되기 위해 나섰다. 일상에서 느림과 여유를 녹여내다 보면 자기정화 및 자기변화 계기를 절로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곧 명상의 의미나 목표와 통한다. 그래서 슬로비족에게는 삶 자체가 명상이 된다. 생활 전반에 널리 퍼진 ‘느림명상’ 문화를 짚어본다.
◇문학ㆍ예술= 밀란쿤데라의 <느림>, 피에르 상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등이 연일 베스트셀러에 오른 뒤부터 출판계에 ‘느림’ 바람이 매섭다. 초기에는 일상에 ‘느림’의 화두를 던지는 것에서 시작했으나, 이후 글쓰기·읽기 자체에서 느림문화를 이어가려는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용인느린문화학교 강창래 교장은 “정보에 목말라하는 시대가 다독(多讀)과 테크닉 위주의 글쓰기만을 강조해왔다”며 “진정한 읽기·쓰기는 자기의 내면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과정을 거친 후에야 가능한 것"이라고 말했다.
느린 템포의 명상음악을 듣는 것도 곧 명상이 된다. 최근 단순한 형식에 느리고 반복적인 리듬으로 대표되는 명상음악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음악평론가 김진묵 씨는 “‘옴 마니 반메 훔’ 등 만트라(진언)나 특정한 음악형식이 반복되는 명상음악은 듣는 이를 이완시키는 힘이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흐름은 느림과 깊이를 동시에 추구하는 전통문화에 관한 관심으로도 이어졌다. 한국 정가원 박종순 원장은 “최근 여가시간을 활용해 시조창을 배우려 하는 이들이 늘어났다”며 “깊고 느린 호흡이 기초가 되는 시조창은 속도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생활명상의 기회를 마련케 해준다”고 말했다.
◇놀이문화= 서울 광화문에 위치한 명상편의점. 편의점에 들러 물건을 구입하듯 취향대로 명상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성큼성큼 내딛는 몇 걸음이면 단숨에 오갈 이 공간을 5분 동안 느릿느릿 걷고 있는 직장인이 있다. 바쁜 업무 때문에 결코 한가롭지 않은 점심시간이지만, 5분간의 느린 걸음을 통해 그는 느림의 미학을 몸소 체험한다. 그림을 보고 음악을 들으며 명상록을 읽기도 한다. 그 순간만큼은 삶에서 긴박함을 밀쳐내고 ‘여유’를 끌어안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수선재 홍보실장 박중양 씨는 “바쁜 일상에 시달릴수록 속도를 늦추고 자기를 돌아볼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며 “이에 따라 명상공간에 관한 수요가 급증해 오는 3월말 일본의 동경과 인사동에 명상편의점 2,3호가 추가적으로 마련된다”고 밝혔다.
웰빙바람을 녹인 취미생활에도 느림의 문화가 반영되고 있다. 온몸을 느리게 움직이는 태극권과 선무도를 비롯한 각종 동양 무예들이 인기가 치솟고 있다. 이들은 몸의 감각과 들숨날숨 호흡을 꾸준히 관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수행하기 힘든 운동이다. 덕성여대 건강심리학과 김정호 교수는 “걷기든 달리기든 숨쉬는 것이든 깨어서 볼 수 있으면 무엇이든 명상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식생활= 전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슬로 푸드(slow food)'운동이 우리나라에서도 서서히 발판을 넓혀가고 있다. 86년 이탈리아에서 시작한 이 운동은 맥도날드 햄버거로 대표되는 '패스트 푸드' 문화에 반기를 들고 여유로운 식사의 즐거움과 전통음식 보존 등의 기치를 내걸고 있다.
이 같은 슬로 푸드 운동은 귀농 움직임과도 직결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빠르고 복잡한 도시를 등지고 농촌행을 결심하는 추세다. 이들은 자신들의 양식을 스스로 경작하며 느린 삶의 소소한 재미를 몸소 체험하고 있다. 그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직접 텃밭을 가꾸며 그 뜻을 함께 하는 이들도 상당하다.
국내 슬로 푸드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경남대 사회학과 김종덕 교수는 "조리와 식사 자체에 투자하는 과정 역시 수행과 명상의 한 부분이 될 수 있다"며 "식생활에 붙은 속도를 낮추고 여유로운 삶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