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연기법’을 설명하는 경전 구절의 패러디일까? 경북 구미시 도계면 신곡리에 가 보면 이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신곡리는 얼핏 보기에도 가난의 때를 훌훌 벗어 던진 부촌이다. 시멘트 포장길과 말쑥한 지붕의 양옥집들. 한 겨울의 스산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신곡리는 누구에게나 포근한 ‘고향’ 그 자체로 다가오는 정겨움이 넘친다. 그 훈훈한 기운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마을에서 할아버지 걸음으로도 15분 거리. 거기가 신곡리 훈풍의 진원지 문수사다.
기자가 찾아간 날은 동짓날. 마침 법회가 끝나고 큰방에 스님과 신도들이 모여 앉아 팥죽 공양을 하고 있었다. 어정쩡한 자세로 인사를 하고 조용히 신도들 틈에 끼어 앉았다. 신도들이 스님의 법문을 듣는 시간인줄 알았으므로. 그런데 아니었다.
“날이 풀리면 극락교 앞 밭에 사과나무를 심을까 하는데 일손 좀 보태 주시렵니까? 400주를 혼자 심으려니 힘들 것 같아서...”
“아따, 당연히 저희가 도와 드려야죠. 사과나무 400주는 대여섯 명이 도우면 금방 심어요.”
스님의 조용한 요청을 큰 소리로 시원스레 받아들이는 아낙의 눈가엔 선한 미소가 가득하다. 문수사 신도회 총무 이자비심 보살이다.
“스님. 내년에도 고추 값이 올 만큼 좋을 까요? 그렇다면 대여섯 마지기 심을 만 한데 말이죠.”
“그야 아무도 모르죠. 시세를 미리 안다면 부자 안 될 사람 없게요?”
“하하하”
문수사 큰 방은 마을 회관의 사랑방 같다. 농사일이며 집안일에 대한 이야기가 그칠 기색이 없다. 주지 혜향스님은 농사일을 물으면 ‘농촌지도소장’이 되고 집안일을 물으면 ‘동네 어른’이 된다. “신곡리 주민들은 모두 문수사를 다니시나요?” 기자의 질문에 또 이 자비심 보살이 나선다.
“총 106가구, 불교 100가구, 기독교 3가구, 무교 3가구, 이상.”
마치 군부대 점호 보고처럼 딱 부러지게 마을 종교 현황을 ‘보고’하자 온 방이 웃음 도가니가 된다.
혜향스님과 마을의 인연은 40년 전부터 ‘스님과 신도’ 관계를 떠나 그렇게 이어져 오고 있다. 강원과 선원을 찾아다니며 정진 하던 혜향 스님이 바랑 하나를 메고 문수사로 들어 온 다음해부터 마을 사람들과 스님은 공동체의 틀을 짜기 시작했다.
1962년, 우리나라 모든 농촌이 다 그랬듯이 신곡리도 ‘보릿고개’를 힘겹게 넘으며 사는 마을이었다. 그 마을에 혜향스님이 양봉 기술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스님이 영월 법흥사에서 기도할 때 마을 사람에게 우연히 배운 양봉법을 신곡리의 가난 퇴치 작전 제1호로 발동한 것. 처음엔 “그게 뭐 돈이 된다고...”하며 선 뜻 나서지 않았지만 스님의 정성어린 설득과 조금씩 늘어나는 벌통을 보며 마을 사람들이 ‘벌을 자식 키우듯’하게 됐고 10여년 만에 양봉 영농마을로 지정되어 명성까지 얻게 됐다.
온 나라에 새마을 운동이 한창일 때 신곡리는 다시 가난 퇴치 작전 2호로 돌입했다. 바로 과수원이었다. 일조량과 기후가 과수원에 적합할 뿐 아니라 주민들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농사를 짓기에 이 작전도 성공했다. 성공한 것은 양봉 과수원 농사 뿐이 아니었다.
“뭣보다 마을 사람들의 단합이 제일 큰 농사 아닙니까? 우리 마을은 전국에서 가장 단합이 잘된다고 믿고 있어요. 스님이 서로 협조하지 않고 믿지 않는 것을 가장 큰 잘못이라고 늘 말씀하시거든요.”
누구에게 물어 봐도 마을의 화목한 분위기가 가장 큰 재산이라고 말한다. 절에서 팥죽 공양이 끝나자 시님과 마을 사람들이 함께 마을로 내려 왔다. 팥죽과 김치 , 과일 등을 챙겨들고 찾은 곳은 마을 경로당. 모여 있던 10여명의 어르신들이 “아이구, 팥죽 공양이 왔구나”하며 스님 일행을 반겼다. 경로당에서 또 한 바탕 팥죽 잔치가 벌어지며 농사 얘기가 다시 불 붙었다.
뒤편에 앉아 있던 기자에게 홍종걸(73세) 할아버지가 말을 건넨다. “스님에게 받은 한 통의 벌이 지금은 셀 수가 없이 많아. 수천통의 벌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자식들 학교 보내고 결혼시키지.”
김규철(70세) 할아버지도 거든다. “암, 스님이 이 마을을 부자로 만들어 주셨지. 그 뿐인가. 우리 마을 마흔 살 이전의 연배들은 거의 대부분 스님이 이름을 지어 주셨어. 그 정도니까 절에 나오란 말 안 해도 우린 다 절에 나가서 불공도 하고 일도 도와 드리지. 스님에게는 절대 품삯도 안 받는다구...하하하.”
또 한 할아버지는 “이 사람들아 제일 중요한 걸 말해야지. 기자 양반, 저 스님은 우리 동네의 부처님이야. 경로당에 텔레비전 사 주셨다고 이런 말 하는게 아니야. 해마다 학생들에게 장학금도 주시고, 초상이 난 집엔 제일 먼저 달려오시지. 스님이 손수 극락왕생을 빌어주시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나도 죽으면 저 스님 염불 소리 들으며 저승 갈 테야.”
마을 사람들의 스님에 대한 존경도 대단하지만 마을에 대한 스님의 사랑도 크다. 그렇게 일과 믿음으로 다져진 문수사와 신곡리. 동짓날 법회와 공양 시간은 새해를 맞이하는 설레임의 축제였다.
| |||
“신곡마을에 처음 와서 보니 완전히 깡촌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수수와 보리농사 이외에는 아무런 수익이 없었고, 보리도 제대로 마음껏 못 먹을 정도로 가난 했었으니깐요.”
혜향 스님은 60년대 신곡마을을 이렇게 회상했다. 당시 스님은 수행자로서 깨달음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중생의 아픔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사하촌 주민들에게 벌을 먹을 것을 제안했고 손수 자비를 들여 양봉기술을 가르쳐 주며 함께 양봉을 시작하게 됐다.
“처음 양봉을 시작했을 때는 주민들의 참여가 대단했습니다. 농사 이외에 별다른 소득이 없었기 때문이죠. 양봉을 열심히 한 사람 가운데는 돈을 많이 번 사람도 많습니다. 저도 함께 양봉을 하며 생긴 수입으로 40년 동안 요사채, 수덕전, 사자암을 건립할 했으니깐요”
스님은 마을 주민들에게 항상 고마 마음뿐이다. 사찰에서 불사가 있으면 자발적으로 운력에 동참했고, 진입로 포장도 마을 주민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스님은 또 불교 포교를 위해서는 사찰이 지역 주민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중생의 삶을 외면한 불교는 불교가 아닙니다. 항상 중생들과 함께 생활하며 중생의 아픔을 달래주고 기쁨은 함께 나눌 때 불교는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 |||
“조선시대 문수사 중창조인 혜봉 스님은 노승이 말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꿈을 꾸었는데 노승은 문수보살의 화신이고 노승이 타고 온 말은 사자라며 신곡마을 뒷산을 청량산이라 명하고 문수사를 창건했습니다. 이후 마을에서는 문수보살의 지혜를 이어받아 귀인과 대작(큰벼슬)이 많이 배출되고 있습니다.”
신곡마을 송도순 이장(53)은 마을에서 구전되어 내려오는 전설이라며 이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송 이장은 또 “저도 개인적으로 어린 시절 혜향 스님으로부터 한학을 배우며 경내에서 뛰어 놀며 자랐다”며 “스님이 아직도 70이 가까운 노구를 이끌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있으며 길흉사를 모두 챙겨주는 등 마을의 정신적 지도자로써 다양한 실천행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시집와서 30년동안 신곡마을에 살고 있는 이 자비심 문수사 관음회 총무 보살은 “처음 시집왔을때 동네 어른들이 문수사에서 기도를 드리면 아들을 낳는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며 “지극정성의 기도로 태어난 아기들은 문수보살의 지혜를 타고났는지 사법고시에 합격하는 등 훌륭하게 자라 마을의 자랑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신곡마을에는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전형적인 시골마을이지만 사법고시에 합격한 사람만도 서울지검 김헌범 검사, 변호사 김인수, 진현희씨 등 다수이고 학계에는 김학묵 부산대 교수, 김덕묵 단국대 교수, 김기탁 상주대 총장, 김영수 안동대 교수 등이 이 지역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