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4월 프랑스의 플럼빌리지에 주석하는 틱낫한 스님이 우리나라를 다녀갔다. 중국 임제종의 한 유파인 접현종(接現宗, Order of Interbeing)의 선사인 스님의 가르침은 ‘깨어있는 마음(mindfulness)’으로 집약된다. 깨어있는 마음이란 매순간 현재(now), 여기(here)에 머무르는 마음을 의미한다. 바로 ‘지금 여기’, 깨어있는 마음속에 영원한 행복이 있다는 가르침이다.
이러한 마음 자세를 가르친 스승은 틱낫한 스님에 그치지 않는다. 이미 작고한 인도 태생의 오쇼 라즈니쉬(1931~1990), 지두 크리슈나무르티(1895~1986)도 유사한 진리를 설파했다. 특히 라즈니쉬의 수많은 명상집은 한때 우리나라 독서계를 풍미하기도 했다.
스스로 보리 다르마의 환생이라고 칭했던 오쇼는 강연 때마다 진부한 설법을 행하기보다는 웃음과 살아 있는 에너지로 많은 서양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오쇼가 고안한 많은 명상법들은 가부좌를 틀기 어려운 서양인들도 쉽게 행할 수 있게 만들어졌으며, 깊은 명상에 들어가기 전에 마음의 쓰레기를 비우는 작업부터 하게 만들어, 더 쉽게 마음의 평정을 되찾고 사념 없이 살 수 있도록 했다. 그래서 오쇼 아쉬람에는 현재도 100여 가지의 심리 요법 프로그램과 세션 프로그램 등으로 먼저 몸과 마음을 비우고 정화하는 작업이 선행된다. "깨달음을 위해서 최면, 치유법, 명상법, 이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말한 오쇼의 뜻에 따라 오쇼 아쉬람은 늘 새로운 요법과 프로그램으로 수행자들에게 명상적인 치유법과 프로그램을 가르치고 있다. 말년에 오쇼는 그의 제자들에게 ‘도(道)’와 ‘선(禪)’에 대해 강연을 하면서 불교 전통수행법인 위빠사나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한편 크리슈나무르티가 평생 동안 행한 가르침의 알짜는 1929년에 ‘별의 교단’을 해체하면서 남긴 ‘진리로 가는 길은 따로 없다’는 연설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여러분이 이르고자 하는 진리는 길이 없는 곳입니다. 어떤 통로를 통해서, 어떤 종교나 교단을 통해 서도 진리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진리란 무한하며 제약이 없고, 조건도 없기 때문입니다. 개인이 뼈저린 노력을 통해 서만 도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자유를 향해서 나아가도록 돕고, 저마다 가진 한계를 깨뜨릴 수 있도록 돕는 일만이 앞으로 제가 해나갈 일입니다."
진리를 향해서 다가가려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스스로 자유로워지려는 결단과 끝없는 노력이라고 그는 주장한 것이다. 체계화된 교리와 종교 행위-제도를 부정한 이유에 대해 크리슈나무르티는 “수천 년 동안 온갖 종교와 교리가 있어 왔지만 인간은 아직도 불행 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는 일이야말로 불행에서 벗어나는 출발점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혁명도 결국 자기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오쇼, 크리슈나무르티와 유사한 깨달음을 얻었지만 보다 급진적인 수행자로는 라마나 마하르쉬(1879~1950)가 손꼽힌다. 그는 속세에서의 수행의 효용성, 깨어있는 마음 등에 대해서 틱낫한 스님과 같은 견해를 피력했다. 그러나 그는 깨어있는 마음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참 나(眞我)’를 찾으라고 했다. 그리고 진정한 나는 자신의 육체, 감각, 행위, 생각이 내가 아니라고 부정할 때 마지막으로 남게 되는 각성(awareness)이라고 했다.
여기서 ‘진아’는 단순한 ‘무아’ 개념의 상대어가 아니라 유아와 무아, 비아와 비무아를 모두 넘어선 개념이다. 이것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고 생각으로 분별할 수도 없는 궁극적인 그 무엇, 즉 해탈 혹은 열반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 에고를 소멸할 것인가. 마하르쉬에 따르면 에고를 소멸하는 가장 쉽고 직접적인 방법은 ‘나는 누구인가?’하는 탐구를 통해서 이 ‘나’라는 생각, 즉 에고의 근원을 추적하여 그 실체를 규명하는 것이다.
일반인들에게 쉽게 다가가는, 이러한 명상 대가들의 가르침이 갖는 장점은 단순 명료함에 있다. 진리를 가리고 있는 우리의 무상한 마음을 버리면 곧장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세파에 찌든 보통사람도 출가자나 마찬가지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 여기에 매력을 더한다.
그러나 불교계 일각에서는 이들의 가르침이 팔정도와 육바라밀 등 전통적인 불교교리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외도의 견해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 김열권 법사의 지적은 이런 시각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붓다는 ‘주객이 없는 상태’와 ‘연기(緣起)’를 설했습니다. 붓다 이전 인도의 브라만, 자이나교, 우파니샤드 등의 요가 수행자들도 주객이 하나가 된 범아일여(梵我一如)를 말했습니다. 이것을 붓다께서는 ‘무의식이 엷어져 공(空)으로 착각한 무기공(無記空) 상태’로 파악했습니다. 무의식의 세계에 오온의 극히 미세한 생멸의 흐름이 남아있는데도 이 상태를 꿰뚫어보지 못해 범아일여로 착각한 것입니다. 이는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지요. 오온에서 무상, 고, 무아를 100%로 볼 때 탐, 진, 치가 완전히 제거된 완벽한 생사해탈이 실현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