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이 수행 역시 현실을 떠나서 존립할 수 없다. 생존경쟁이 치열한 현실 속에서도 그 각박함에 휘둘리지 않고 깨어있는 마음챙김으로 자신과 사회를 정화시켜 나가는 삶 속의 수행은 어떠해야 할까. 조사선, 위빠사나, 염불 수행의 선지식들은 한결같이 삶과 수행이 결코 둘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오히려 안과 밖의 온갖 경계에 휘둘리는 현실이, 흔들림없는 정진을 통해 득력(得力)하는데 필수적인 살아있는 도량이라고 말한다. 생활 속의 수행 어떻게 해야 할지, 각 수행법 대가들의 가르침을 들어본다. (편집자 주)
조사선의 마음 닦는 법
(봉화 축서사 주지 무여스님)
최근에 정치나 사회가 어지럽고 경제가 어려우니, 정신적인 불안함과 괴로움을 달래고, 마음의 평화를 찾아서 수행처를 찾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고무적인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간 우리 한국 사람들은 가까운 곳에 세계적인 선(禪)이 있는데도 모르고 지냈고, 아는 사람도 큰 관심없이 일부 선승과 불자들에게만 전승되어 왔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선 수행은 누구나 언젠가는 해야되는 인생의 대사(大事)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45년간 설하신 8만4천 법문도 한마디로 요약하면 ‘마음 닦아서 부처되라’는 말씀이다. 그럼 마음은 어떻게 닦는가? 마음은 형상이 없기 때문에 물건을 닦듯이 닦을 수 없다.
마음을 닦는다는 것은 흐린 마음 어두운 마음을 맑게 하고 밝게 하는 것이다. 인간을 무명중생(無明衆生)이라 한다. 무명이란 밝지 못한 것, 즉 어둡고 흐린 것을 말한다. 중생의 마음이 어둡고 흐리기 때문에 이 흐린 마음 어두운 마음을 맑게 하고 밝게 하는 것을 ‘마음을 닦는다’, ‘수행한다’고 말한다.
마음이 흐린 까닭이 무엇인가? 번뇌망상(煩惱妄想) 때문이다. 인간은 본래 부처다. 본바탕은 부처님과 똑 같다. 그런데 왜 부처가 되지 못하는가? 이 번뇌망상 때문에 흐려져 불성이 나타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번뇌망상은 흔히 8만4천 번뇌망상이라 한다. 번뇌망상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마음을 쉬는 것이다. 옛 어른은 ‘천번 쉬고 만번 쉬라’고 하였다. 임제 스님은 ‘쉬기만 하면 그대로가 청정법신(淸淨法身)이다’고 했으며, 석가모니 부처님은 ‘쉬기만 하면 곧 깨닫는다’고 했다. 쉬고 쉬어서 쉰다는 생각까지도 쉬면 그대로가 부처의 세계이고 열반의 저 언덕이다.
그렇게 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근기가 하열한 중생은 어렵고 어려운 일이다. 그러면 왜 그렇게 어려운가? 중생살이 자체가 번뇌망상으로 뭉쳐져 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요즘 시대 사람은 어릴 때부터 눈만 뜨면 책만 보고 책 속에서 자라고 책에서 얻은 지식으로 살아가고 세상을 움직이는 것도 지식이다. 온통 지식으로 중무장한 것이 현대인이요, 지식이 판을 치는 것이 요즘 세상이다.
그런 지식도 마음공부에서는 번뇌망상이다. 참선자는 자기의 근기와 발심 정도와 신심을 알아서 마음을 쉬고 번뇌망상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혜를 모아야 한다. 마음공부를 하려니 마음을 쉬기는 어렵고 쉴 수 있는 방편을 쓰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정신집중이다. 번뇌망상으로 어지럽고 괴로운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면 번뇌망상은 사라지고 마음은 고요해진다.
마음을 집중하는 방법 중에 가장 좋은 방법이 화두(話頭)이다. 부처님 이후 여러 수행법이 있었고, 최근에는 불교 수행법에서 파생된 수행법이 많지만 최상의 수행법은 화두참선법이다. 항간에는 화두참선법에 대하여 비판적인 말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최상승법’이니 ‘최고의 법’이니 하는 것은 진의(眞疑: 참 의심)가 나면 집중이 잘 되고 확철대오(擴徹大悟)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데는 화두참선을 능가할 수행법이 없기 때문이다.
간화선(看話禪)은 현대인에게도 알맞은 수행법이다. 현대인은 근기도 하열하고 신심도 약하며, 발심도 못한데다 간절하고 성실한 마음도 없으니 수단을 쓰지 않을 수 없다. 걷지 못하는 장애인에게 휠체어가 필요하듯이, 수영 못 하는 사람에게는 보트가 필요하듯이 현대인의 수행에 필요한 수단이 화두이다. 한국의 간화선은 가히 세계의 독보적인 존재라 할 수 있다. 오늘날 화두참선자는 간화선을 더욱 발전시켜서 인류에게 이바지해야 할 것이다.
그럼 화두란 무엇인가? 참선자가 깨쳐야 할 문제이다. 화두는 예로부터 조사(祖師)가 하신 중요한 말씀이나, 종사(宗師)가 마음을 깨닫게 된 인연이나, 학인(學人)을 인도하는 행위를 모아 공부하는 규범으로 삼고 과제로 준 것이다.
화두는 대단한 법문으로, 범상한 사리를 따르고 논리에 맞는 대화나 행위가 아니고, 일반적인 사고나 논리를 거부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조사 스님의 본뜻이 담겨있고, 삼세제불(三世諸佛)의 지견(知見)이고 천하 선지식의 안목이 드러난, 법문 중의 법문이다. 이 화두를 깨치면 그 자리가 바로 부처의 경계이다.
화두참선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우선 마음과 기운을 고요하고 편안하게 해야 한다. 마음을 편안하고 고요하게 안정시키려면 마음을 쉬고 비워야 한다. 밖으로는 모든 인연을 끊고 만사를 놓고 일체를 쉬면, 마음은 편안해지고 고요해진다. 그렇게 마음이 안정된 상태에서 화두만 여법하게 참구해 간다.
화두참구는 염불하듯이 외우는 것도 아니고, 화두를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화두공부는 의심을 일으켜야 한다. 화두의 생명은 의정이다. 의정은 화두를 보는 길잡이다. 화두는 오직 의정을 일으키는데 뜻이 있고, 의정을 크게 일으켜야 크게 깨칠 수 있고, 의정이 없으면 깨치지 못한다.
화두에 의심을 일으키되 적당히 해야 한다. 강하게도 말며, 약하지도 않으며, 거칠지도 말며, 급히 들어서도 안되고, 느리게 해서도 안된다. 화두는 적당하고 알맞게 일으키되 분명하고 간절하게 일으켜야 한다. 화두는 아주 적당하게, 아주 알맞게 들어야 한다. ‘적당히’와 ‘알맞게’라는 말에 온갖 지혜가 함축되어 있다.
화두가 안되는 사람은 자신에게 물어보라. “너는 진정으로 화두할 생각이 있느냐?”고. 화두참구는 참으로 하고 싶게 해야 한다. 스스로 절실해서 진심으로 해야 한다. 자기 성품을 보아 바른 깨달음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확고하고 철저한 발심을 내야 한다.
참선자는 인생에 가장 중요한 일은 오직 이 일뿐이라는 생각을 하며, 이것만은 반드시 해결하고야 할겠다는 확고부동한 마음을 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참선자는 자기의 본성과 불법과 화두에 대한 철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100% 또는 그 이상 온전하게 믿어야 한다.
첫째, 불성에 대한 확신이 서고,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철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나도 본래는 부처이고, 시방세계 불보살과 역대 조사와 조금도 다름이 없어 나도 반드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다. 둘째, 불법에 대한 확신이다. 불법은 생사를 요달하고 윤회를 벗어나는 진리의 말씀임을 철저히 믿어야 한다. 셋째, 화두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 화두는 깨달음으로 가는 가장 확실하고 빠른 길이라는 것을 철저히 믿고 온전히 믿어야 한다. 화두에 대해서는 조금이라도 불신한다든지 반신반의(半信半疑)하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
“‘○○아!’ 하고 부르면 ‘예’ 하고 대답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주인공이다. 그것은 마음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다. 그것을 깨친 사람은 삼천대천세계를 희롱하며 살 것이고, 깨치지 못하면 생사윤회의 고통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것을 깨친 사람이야 말로 가장 위대한 사람이요, 가장 존경받을 사람이요, 가장 잘 사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염불문과 염불하는 마음
(춘천 정토원 원장 정목 스님)
불교는 부처님의 지혜를 믿고 의지함으로써 안심(安心)을 얻고 계정혜(戒定慧)를 닦아 연기적 세계관을 통찰하며, 그 깨달음의 지혜로 남을 이롭게 하여 다 함께 행복한 사회가 되도록 실천하는 종교이다. 그래서 흔히 깨달음의 종교라고 말한다. 그런데 부처님이 일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근기따라 가르침을 펴 보이시다 보니 깨달음을 얻는 문(門)과 그 차제(次第)가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불법의 큰 바다에 들어가는 데는 일정한 문이 없을 뿐이지 선택할 문은 많다. 그러나 용수보살은 불법 문중에 들어와 반드시 성취해야 할 지위는 불퇴전지(不退轉地)라 하고, 여기에 이르는 데는 근행정진(勤行精進)과 신방편이행(信方便易行)의 두 문이 있다고 천명하였다. 불지(佛智)에 대한 믿음을 근본으로 행하되 육바라밀 등을 열심히 행하여 정진하는 ‘스스로 닦음’과 믿음의 방편으로 쉽게 행하는 ‘자비광명에 의지함’을 말한 것이다.
‘어떤 문을 선택해야 하는가?’는 자신이 불퇴전지를 성취했는가, 성취할 수 있는가의 여부에 따른다. 불퇴전지는 ‘선근을 끊지 않고 다시는 악도에 떨어지지 않는 지위’이다. 대승의 차원에서 말하면 깨달음으로 삼계윤회를 벗어날 뿐 아니라, 보살행을 실천하는 지위이다. 염불문은 신방편이행으로 불퇴전지에 올라 대승불교가 추구하는 깨달음으로 보살행을 실천하고자 하는 수행문이다.
염불은 ‘마음을 정토에 두는 도’이다. ‘나무아미타불’ 명호를 부르는 칭명염불이든 정토의 경계를 관하는 관상염불(觀相念佛)이든 그 대상이 정토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염불은 내면(五蘊)을 관하는 위빠사나 혹은 화두를 관하는 간화선과 그 방향이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여야 한다.
칭명염불은 마음을 정토에 두고 명호를 부르는 수행인데, 현실에서는 정토에 왕생함으로써 윤회를 벗어난다는 믿음으로 안심을 얻고, 목숨을 마치는 때에는 마침내 정토에 왕생하여 깨달음을 성취한다. 물론 지엽적인 이익이 많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정토에 왕생하는 것이다.
염불하는 마음은 첫째, 아미타불의 본원력(本願力)에 대한 진실한 신심이다. 말하자면 염불만으로 정토에 왕생하여 생사해탈한다는 말씀을 의심하지 않고 깊이 믿는 마음이다. 이 진실신심에 보리심이 포함되어 있다. 둘째는 모든 일의 성사 여부를 부처님께 맡기고, 오로지 명호를 지니고 마음을 모아 한생각 흩트러지지 않게 부르는 지성심(至誠心)이다. 이와 같은 칭명염불을 집지명호 일심불란(執持名號 一心不亂)이라고 한다. 셋째는 정토를 염원하여 마침내 왕생하기를 지극히 원하는 원왕생심(願往生心)이다. 염불할 때는 왕생의 확신과 더불어 자신이 언제나 아미타불의 자비광명 안에서 숨쉬고 있음을 진실로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염불행자는 언제나 아미타 부처님과 함께 한다.
만약 관상염불(觀相念佛)을 실천하는 자는 회향심(廻向心)을 일으키고 관불삼매(觀佛三昧)를 성취하면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 그러나 우선 칭명염불로 정진하면서 염불문의 실천철학에 대하여 차츰 이해의 폭이 넓고 깊어지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염불문에서는 금생에 깨달음 혹은 임종왕생으로 생사해탈을 이루고 오랜 윤회의 질긴 끈을 단박에 끊어버린다. 이처럼 범부가 윤회를 벗어나는 대표적인 길인 염불문의 수행은, 일심정토사상을 확립한 원효 스님의 가르침을 따라 일상 속에서 실천할 수 있다.
원효(617-686) 스님은 대소승 경전을 두루 설렵하고 일심이문(一心二門)의 수행체계를 정립하였다. 불법의 대의를 ‘귀일심원 요익중생(歸一心源 饒益衆生)’이라 하고, 모든 교법이 일심의 바다로 향하도록 화쟁 회통의 논리를 전개하였다. <무량수경종요>에서도 불자는 불지(佛智)를 믿어야 하며, 그 믿음의 궁극은 ‘일체의 경계가 일심’인 지혜라 하고 이를 믿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원효의 염불문은 일심으로 나아가는 한 문이며, 정토는 곧 일심의 바다이다.
원효의 일심정토 염불문은 누구든지 보리심, 지성심, 원왕생심을 일으켜야 하지만, 근기에 따라 칭명염불과 관상염불이라는 방법의 차이가 있다. 상배와 중배는 관상염불로 정진하되 회향심을 일으키고, 정토의 경계를 감득하는 깨달음을 얻은 후 보살행을 실천한다. 하배는 칭명염불로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얻고 임종 후에 곧 정토에 왕생한다고 하였다. 불교에 대한 믿음의 궁극은 ‘일체의 경계가 일심’이라는 것이다. 믿음을 성취하여 연기적 세계관을 통찰하고 발심하면 곧 정각(正覺)이요, 수행의 궁극은 일심(一心)을 증득(證得)하는 것이다.
염불문에서는 믿음으로써 안심입명을 얻고, 일체의 인연과 은혜에 감사하면 정각이요, 수행이란 보은하는 삶이다. 염불문은 선오후수문(先悟後修門 :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문)으로써 ‘안심입명-> 정각 -> 보살행 -> 일심증득’이라는 체계가 확립되어 범부와 현성을 다 함께 대도(大道)에 오르게 하는 수행문이다. 다만 근기에 따라 그 이익을 얻는 시기가 다를 뿐이다. 아미타불의 달빛을 머금은 염불의 강물은 흘러 흘러 마침내 일심의 바다에 도달한다.
부처님의 수행법, 위빠사나
(김열권 법사)
부처님은 출가 후 당대의 힌두교 요가 수행법의 최고 경지인 사마타 8선정인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얻고도 깨달음을 실현하지 못하자 다시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위빠사나로 12연기를 꿰뚫어 보시고 생사없는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구현하셨다. 그 깨달음을 4제 8정도로 체계화하여 중생들을 교화하기 시작하셨다. 이때 12연기를 순관(順觀), 역관(逆觀)하실 때 반야지혜(janami)와 위빠사나관(passami)을 이용하셨다. 이것을 <반야심경>에서는 ‘오온을 반야로 조견(照見)하여 일체 고통이 소멸한 공(空)을 얻는다’고 했고, <금강경>에서는 ‘모든 상이 상 아님을 보면 즉견(卽見) 여래라’ 했다. 이것을 중국 선사들은 견성(見性)이라 했다. 조견, 즉견, 견성 할 때의 견(見)이 반야작용인 위빠사나(觀)와 사띠(sati: 마음챙김, 주시)의 중국식 표현인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대념처경>에서 "중생의 정화를 위한 슬픔과 괴로움을 소멸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 사념처(위빠사나)이다" 라고 하셨다.
부처님은 중생을 제도하실 때는 그들의 근기에 따라 다양하게 제도하셨다. 마치 병에 따라 약이 다르듯이 위빠사나가 맞지 않으면 우선 정신 집중법인 사마타를 가르치셨다. 그리고 이 위빠사나를 수행할 때는 3가지 문인 무상, 고, 무아 중에서 하나를 관한다. 3가지가 동시에 작용하지만 그 중 하나를 집중적으로 본다. 신심과 보시를 많이 한 수행자는 무상의 문인 무상삼매(無相三昧)로, 선정을 많이 닦은 수행자는 고(苦)의 문인 무원삼매(無願三昧)로, 지혜가 많은 이는 무아의 문인 공삼매(空三昧)로 든다고 <청정도론>에서는 말했다. 화두 수행은 공삼매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 나의 수행법만이 최고라는 것도 또 다른 집착이다.
중국에 위빠사나가 수용될 때에는 천태지자 대사의 5시교판 영향으로 초기 근본 경전이 <아함경>을 소승 경전으로 폄하했기 때문에 부처님의 12연기관이나 유식관법이 중국선 수행에 자리잡지 못했다. 그러므로 용수 보살이후의 대승 경전에 입각한 위빠사나와 원효 스님의 <금강삼매경론>과 <기신론>에 입각해 생활 속에서도 효과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대승 위빠사나를 복구해야 한다.
부처님은 수행을 가르치시기 전에 중도연기 즉 4성제, 오온, 12연기를 충분히 이해시킨 후 근기에 따라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적절히 조화시켜서 중생들을 제도하셨다. 정견(正見)이 확고히 서있으면 수행법은 많을 수록 좋다고 본다. 정견이 없는 수행은 내 수행법만이 최고라는 테크닉 논쟁에 휘말릴 수 있기 때문이다.
위빠사나는 경전과 수행이 일치할 뿐 아니라 현재 진행되고 있는 몸과 마음의 상태를 통찰하여 욕망과 어리석음을 정화한다. 또한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 생각, 말, 행동 이전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으므로 언행이 일치되면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성찰할 수 있게 된다. 특히 수행이 단계별로 향상되는 것이 스스로 검증되며 <중부경>에 의하면 어떤 수행법이든 일단 완전히 깨닫고 나면 자동적으로 위빠사나가 수행된다는 중요한 특징이 있다.
위빠사나는 ‘깨달음,’ 지혜‘라는 말과 동의어로, ’위빠사나‘라는 어휘 자체에 그 수행원리가 들어있다. 호흡, 행선, 염불, 화두 등 어떤 수행법도 팔정도(계정혜)에 근거하면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없는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위빠사나 수행법에 포함되고 팔정도가 없으면 정신통일인 사마타 수행에 머물게 된다.
위빠사나가 실생활에 주는 도움으로는, 생활속에서 위빠사나를 실천하면 지금 하고있는 일이나 행동, 생각에서 자신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 의식의 흐름을 직접 현미경으로 보듯이 관찰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고 그에 따라 말과 행동이 저절로 정화되어 계정혜가 자연스럽게 이뤄지게 되는 것이다.
정직성, 근면성, 철저함, 열린 마음, 올바름 등을 추구하는 재가 수행자들은 정념 위빠사나를 행함으로써 기름에 불이 붙듯이 수행이 빠르게 진보될 수 있는 것이다.
과거, 미래가 아닌 현재 이곳에서 우리들 마음속에 일어나는 생각, 말, 행동 등이 정화됨에 따라 사회 생활도 바르게 영위되고 올바른 정신통일과 마음챙김으로 직장 생활에서도 의사 결정력, 추진력, 인화단결, 기술 혁신 등의 향상을 가져 올 수 있는 것이다.
거짓 없는 언행과 현재 하고 있는 일에 철저히 몰두하는 습관은 수행에 결정적인 도움이 된다. 평소 올바른 생활 자세가 결여된 상태에서 수행 테크닉에만 의존해 수련해 나간다면 또 하나의 이기심과 집착을 가져올 뿐이다. 총체적으로 개인과 전체가 상호 연결된 팔정도에서 완성된 인격, 완성된 수행이 나오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의 핵심은 평상시 일상 생활에서 알아차림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붓다는 24시간 가장 완벽하게 깨어있는 관(觀)을 하신 분이다. 붓다에 비하면 너무나 부족하지만 생활 속에서 위빠사나인 반야관과 선행을 티끌 모으듯이 계속 쌓다보면, 물방울이 바위를 뚫듯이 언젠가는 붓다에 이를 수 있다. 왜냐하면 살인자, 죄인, 심지어 미물에서 현자, 성자에 이르기까지 불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벗이여, 지금 이 순간도 알아차리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