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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결혼 30주년을 맞는 최오균(54), 박정희(55) 씨 부부. 은행지점장이라는 사회적 지위를 벗어던지고 난치병에 걸린 아내와 4년간의 세계여행을 떠난 이 부부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약혼식 날 예물을 교환하는 대신 장미꽃을 심고, 첫 눈 내리는 산사에서 결혼식을 올린 부부. 1973년 11월 11일 11시, 일곱 송이의 국화꽃을 부처님께 올리며 백년가약을 맺은 최오균, 박정희 씨는 주위의 축복 속에 가정을 꾸렸다.
셋방살이의 설움을 겪기도 하고 남편 최 씨가 급성 간염에 걸려 몇 년간 휴직하기도 했지만 두 아이의 부모로서 살아가는 생활은 평범했고 그 속에서 소소한 행복도 찾을 수 있었다. 갖은 고생 끝에 단촐하지만 자신들의 집도 생겼고 자녀들도 건강하게 커 줬다. 하지만 이 행복은 1995년 어느 날 부인 박 씨가 쓰러지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탈모증과 혈관염, 우울증 등의 합병증에 시달리던 아내에게 내려진 병명은 확실한 치료법이 없다는 ‘유사 루푸스(자가면역질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전국 곳곳의 용하다는 사람들을 찾아 다녔지만 돌아오는 것은 ‘공해와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 체질을 바꾸어야만 나을 수 있다’는 대답뿐이었다.
결국 최 씨는 아내의 간호를 위해 은행 지점장이라는 자리에서 물러나 시골로 내려가기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그렇게 전원생활을 준비하던 아내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기운이 있을 때 세계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집에만 틀어박혀 있다고 병이 낫는 것이 아니잖아요. 걸을 수 있는 힘이 있을 때 여행을 다니고 싶어요.”
아내의 이 한 마디에 이들은 결혼 25년째를 맞은 1998년, 길을 떠났다. 하루 네 차례씩 맞아야 하는 인슐린 주사와 구급약, 그리고 <금강경>이 든 배낭을 멘 이들의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혹시 생길지 모르는 불의의 사고를 대비해 유서까지 써서 자녀들에게 맡겼다. ‘목숨을 건 여행’인 셈이다.
50대의 이 부부 배낭여행자는 4년에 걸쳐 유스호스텔과 게스트하우스, 기차에서 잠을 자고 직접 요리를 해먹으며 인도와 네팔, 스코틀랜드, 독일, 로마, 그리스 등 30여개 나라를 여행했다. 여행지에서 ‘저혈당 쇼크로 혼절한 아내를 부둥켜안고 죽음을 떠올렸던 아찔한 순간들’도 있었지만, 힘들 때 마다 함께 <금강경>을 독송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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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개월에 걸친 여행에서 돌아올 때면 남편 최 씨는 여행 칼럼니스트와 숲 해설가로 활동하고, 아내 박 씨는 루푸스 환자 모임에서 자원봉사를 하거나 조계사에서 상담봉사를 하고 있다. 박 씨의 병은 여전하고 하루에 4번씩 스스로 인슐린 주사를 놓아야 하지만 이들은 ‘삶의 활력을 되찾으면서 병과 친구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
“살면서 어떻게 병에 걸리지 않고 살기를 바라겠어요. 중요한 것은 병을 대하는 마음이죠. 조금은 불편하고 짜증나겠지만, 그 병과 타협하고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후 남편 최 씨는 틈틈이 자신들의 여행 이야기를 인터넷에 ‘하늘 땅, 여행(cafe.daum.net/skyearthtour)’이라는 이름으로 올렸고, 이 글을 본 출판사에서 최근 <사랑할 때 떠나라>는 책으로 묶어냈다. 책 출간 후 밀려드는 언론의 취재요청과 주위 사람들의 관심으로 정신없이 바빠 ‘여행의 약효’가 떨어진 탓일까. 이들은 요즘 또 다시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11월 11일, 남미의 어느 곳에선가 ‘결혼 30주년 기념 파티’를 열 예정이기 때문이다.
“결혼은 나무를 심고 가꾸는 것과 같습니다. 심기만 한다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것이 아니듯, 결혼 생활도 부부가 함께 물과 거름을 주고 돌보듯이 해야 합니다. 서로에 대한 인내와 믿음, 이해가 바로 부부에게는 물과 거름이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