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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식 부천대 교수
신도회에 대한 최우선의 문제는 신도회가 왜 필요한가에 대한 의문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 일반 신도들이 과연 신도회가 하는 일이 무엇이며, 무엇을 해 왔고, 종단과는 어떤 연계가 있는지에 대해서 소상히 알지 못하고, 즉각적인 대답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는 신도회의 이념과 지향에 대한 문제이다. 불교를 믿고 수행하고 실천하고 그리하여 불교를 삶의 중요한 증거로 하여 살고 있는 다수의 불자들은 신도회의 정체성에 대한 의식이 미약함을 말한다. 이에 대한 응답을 위해서는 신도회 내부적으로 치열한 자기 반성과 이념 정립, 노선의 재정비 등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1954년 전국신도회가 창립한 이후 조계종단의 오늘이 있기까지 신도회의 헌신과 역할을 지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2년 통합종단이 출범한 이후 70~80년대의 제반상황을 조망할 경우 결과는 신도회의 위상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중앙신도회의 출범은 94년 종단개혁에서 찾을 수 있다. 전국신도회의 내분, 개혁주체와의 이질성 등으로 인해 전국신도회는 참가하지 않았다. 참여 주체는 민주화운동, 불교 사회화 운동에 참가한 신진 불교대중들이었다.
전국신도회, 중앙신도회의 역사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종단의 사부대중 운영체의 요망이다. 이는 신도회 차원 뿐만 아니라 모든 신도, 불자들이 당위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는 정화불사가 진행되던 당시부터 현재까지 조계종단의 역사의 한 줄기로 분명히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신도회의 활동, 역사, 지향에서 사부대중 공동체, 사찰 및 종단 운영에 신도회가 어떻게 참가하고, 이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는 중요한 과제라 할 수 있다.
신도회의 전통이 무엇인가에 대한 처절한 자기 반성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바탕위에 21세기를 주도하는 신도회가 될 수 있고, 급변하는 정보화사회에서 살아 남을 수 있는 신도회로 나아갈 수 있다. 신도회는 신도들의 조직이요, 지향이다. 그후 종단의 구성원, 구성체로서의 신도회이다. 이러한 등식이 성립되지 않을 경우 신도회의 노선과 성격은 이미 신도회라고 말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손안식 전국신도회 상임부회장
재가불자들의 순수한 신행조직체로 설립된 전국신도회는 94년 종단개혁 당시 아무런 절차없이 종단에 의해 사무실 폐쇄, 해체 선언을 당했다. 재가불자들의 자발적인 신행조직이 종단에 의해 폐쇄된 좋지 못한 선례라 할 수 있다. 또한 전국단위 연합 조직으로서의 특성을 강화하여 통일된 실천이념으로 불교를 선도해야 함에도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는 하부조직과 중앙간의 괴리에서 기인한 것이다.
따라서 향후 통합신도회는 중앙과 하부조직의 강한 조직력을 갖출 수 있도록 정비해야 하며, 대중이 참여하는 신도회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아울러 재정의 자립도 통합신도회의 절실한 문제이다. 이를 통해 통합신도회는 사상과 이념의 올바른 정립, 조직역량의 강화, 실천의 내용을 혁신해야 한다.
◇임동현 중앙신도회 기획실장
중앙신도회의 출범 의의는 과거 교계의 권력과의 유착을 통한 불자의식의 왜곡, 부정과 비리로 인한 불교의 명예실추, 그로 인한 불교의 사회적 신뢰 저하 등을 재가불자 차원에서 결별하고 바른 신행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신도조직의 결성이라는 점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앙신도회의 출범 초기 보여준 문제점은 여전히 현재적 과제인 승가와의 관계설정에 있다. 신도회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인식의 차이, 신도회의 구성원칙에 대한 인식의 차이 등의 문제가 드러난 것이다.
앞으로의 통합신도회는 전국신도회 초기 활동가들의 불교와 종단에 대한 열정과 헌신, 중앙신도회를 통해 나타난 신도운동에 대한 지향, 역사와 사회 앞에 책임있는 신도회의 추구 등이 어우러지는 모습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전국신도회의 역사와 불자들의 바른 신행에 앞장서고 사회와 역사에 책임 있는 신도회를 지향하는 중앙신도회의 창립정신을 이어나가야 할 것이다.
◇최승천 중앙신도회 정책위원
전국신도회의 창립 시기는 불교계의 정화불사가 한창이던 어수선한 시기였다. 종단 정화 적극 참여 결의, 분규사찰 정화에 대한 제반대책 수립 등의 활동사항이 담겨있는 것을 보면 종단 정화 문제가 당시 신도회의 최대 화두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조직 활성화를 위한 움직임이 활발해져 67년 13개 시도지부, 24개 교구지부회, 153개 시군지회, 812개 사찰 신도회가 결성됐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당시 권력자였던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이 회장에 취임하면서 권력에 예속되는 아픈 전철을 밟았다. 권력자의 신도회 진출은 그 자체만으로도 신도회가 정치적 이용의 대상이 된다는 점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정치권 인사들의 신도회 유입은 단체의 이름을 알려 세를 불리는데 어느 정도 기여할 지는 모르나 길게 보면 정치적으로 이용돼 왔던 게 저간의 실정이다. 부득이 한 경우에는 의사 결정권이 없는 자리로 제한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