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9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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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교도소 수감중인 재소자의 불교 수행담
아래에 소개하는 글은 어느 미국의 교도소에 수감중인 수인이 어떻게 해서 자신이 불교를 배우게 된 수행담을 담고 있다. “스프링 윈드” 라는 미국의 불교 잡지의 최근 호 (이천 삼년 여름호)에 실린 글이다. 이번 호의 특집은 “교도소”로서, 다섯편의 글이 실려있는데, 그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면, 미국의 교도소 행정과 정책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글도 있고, 현재 미국 정부가 주장하는 국가주의와 “애국심”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반 평화적이며, 불교에서의 정의와 평화와 공존의 원칙을 들어 그에 위배됨을 지적하기도 한다. 또한 “프리즌 다르마 네트워크“ 라는 불교인들의 교도소 포교 조직에 대해 소개하는 글도 있고, 아들을 교도소에 두고있는 한 아버지가 쓴, 자식을 통해 불교를 배워 간다는 신행담도 있다. 또한 인간의 마음이 다름 아닌 곧 교도소라는 철학적인 글도 담겨있다. 어떤 글은 교도소 포교에 있어서 교도관들의 불교에 대한 이해 부족과 교도관들의 편견 때문에 부딪치는 어려움을 털어 놓고 있다.

갑자기 왜 교도소 이야기인지 의아해 하실 분들에게, 이들 미국 불자들의 스토리가 가져온 감동을 같이 나누고 싶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다. 이런 분들의 짧고 간소한 담담한 인생이야기를 들으며 명색이 불교학을 전공하고 가르친다는 나의 불교가 그들의 불교 앞에 형편없이 보였다. 특히 이 글에 나오는 교도소 포교를 하는 불자들은 한국과 같이 조직적인 사찰 조직이나 자금 지원 없이 기독교 국가인 미국에서 소수 종교인으로서 오로지 자신의 원력 하나로 법회를 하는 분들이다. 미국의 불자들은 짧은 불교 역사를 통해 맛본 불교의 진리를 가지고 이렇게 큰 수행을 하는데 비해, 우리 한국 불교는 오랜 전통과 전통이 주는 여러 강점을 등뒤에 지고 있으면서도 그 보물을 조금밖에 못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서 하이웨이를 타고 지나가다가, “이곳은 교도소 지역입니다. 히치 하이커들을 태워주지 마시오”라는 팻말을 보게 되면 그 근처에 교도소가 있음을 알게된다. 인가가 얼마 없고 지나가는 사람도 없는 유령 도시 같은 동네를 높은 담장과 철조망이 감싸고 있다. 이런 비현실적인 공간에서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도, 아마 평생 한국 사람을 한번도 본 적도 없을 어떤 미국 사람이 아침에 일어나 고요히 앉아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서투른 한국 발음으로 관-세-음-보-살 을 외는 것을 상상을 해보기 바란다. 언젠가 이름도 모르게 뿌려졌던 씨가 멀리 멀리 날아가 연을 따라 이렇게 꽃을 피우는 것이다.

요즘 한국 불교계에서 비구니에 대한 이야기가 한창이다. 비구니 스님이 사상 처음으로 조계종 총무원의 고위 행정부장에 임용된 것 뿐 아니라, 세계 유수의 불교 학자들이 모여 한국 비구니에 대한 국제 회의를 하게 되었고, 또한 불교를 신행하는 여성 불자들이 전 세계에서 수백명 모이는 세계 여성 불자 대회가 내년에 서울서 열리게 되었다. 한국의 비구니 전통은 천 육백년의 오랜 역사 뿐만 아니라, 현재 비구니 만을 위한 강원과 선방의 교육 체제가 마련되어 있고, 법맥과 계맥이 존재하며, 조직적인 사원 생활을 하는 점에서, 가히 세계적인 종교적 문화적 전통이다. 이제 이런 큰 회의를 준비하는 것은 과거의 비구니 수행자들과 큰스님들의 발자취를 되살려 내 오늘의 수행 전통에 지침으로 삼고자 하는 것임에 다름 아닌데, 그 분들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하는 우리의 수행은 오늘 어떤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인가.

여성의 지위가 낮고 인간의 삶의 수준이 낮았던 전통 사회에서 사회적 편견과 차별 속에서 피눈물나는 수행을 한 그분들의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 분들의 수행은 당신들 만을 위한 나의 집단 만을 위한 수행은 아니었을 것이다. 현대에 사는 우리에게 수행이란, 더 큰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이야기하고,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어야 한다. 대행 큰 스님이 법문을 통하여 지구의 문제를 걱정하시고 우리 불자들이 단지 내 가정, 내 사회 뿐만 아니라 지구라는 거대한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자고 말씀하시는 것 처럼, 멀리 서양 어느 곳에서 불자들이 영세한 조건 속에서 교도소 포교 자원 봉사를 하는 것은 남의 일이 아니다. 미국 사회는 기본적으로 유신론 사회이며, 죄와 벌의 개념이 흑백으로 분명히 나뉘어 있다. 죄를 진자는 벌을 받아야 한다는 원칙 하에서, 교도소에 하염없이 갇혀 있는 사람들이 현재 미국 전역에 이백만명이 넘는다. 그 중에는 흉악범들도 있지만, 인종적인 문제 또는 구조적인 사회악 때문에 개인의 의지나 삶과 관계없이 운명처럼 교도소에 종착하는 인생들도 있다.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이다. 주마다 법률 적용이 달라 어떤 주에서는 삼세번 규칙이라 하여 아무리 경미한 마약 사범이라도 세 번째 걸리면 무조건 종신형을 산다. 이런 엄격한 죄와 벌의 제도 하에서, 교화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전제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불교의 관점에서 본다면 죄 라는 것도 자성이 없는 것이며, 어제의 악한이 오늘의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 아닌가. 더군다나 불교에는 너무나도 강력한 마음 다스리는 도구가 있다. 불교는 명상을 통해 마음을 가라앉히며, 기도나 참회를 통해 과거의 업장을 소멸시키고 현재의 마음을 바꾸는 수행법이 발달되어 있으며, 그 점에서 불교는 교도소 포교에 다른 종교가 따라갈 수 없는 교리적 또 수행적 강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도 한마음 선원 여러 지부가 있는 것을 알고 있다. 타향살이에 마음 아픈 동포들을 달래 줄 뿐만 아니라, 그 사회의 다른 마음 아픈 사람들도 들여다 볼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인적 지원이 모자라면, 약간의 물질적 지원 만으로도 얼마든지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고 본다. 결국 교화에 필요한 것은 마음이지 물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 글은 한 죄수가 불자가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인디아나 주립 교도소에서의 자유”
데이비드 쉐인 씀

나는 1967년 일월 칠월, 인디아나 주 먼시이라는 곳에서 열 여섯 살의 미혼모 엄마에게 태어났다. 나는 태어난지 나흘 만에 어떤 근로자 가정에 입양이 되었다. 그집은 규칙을 엄하게 지키는 나자렌 교단 소속 기독교인 가정이었다.

나의 소년기는 별탈 없이 지났다. 나는 내가 필요한 모든 것, 즉 의식주와 기호품을 가질 수 있었다. 나는 신을 믿었고, 내가 지었다는 죄가 무엇인지 잘 모르면서도 용서를 빌었다. 열세 살이 되도록 내 인생은 아무 탈 없이 이렇게 지나갔다. 열 세 살 되던 해 아버지는 교회에 더 이상 나가지 않기로 결정했고 나도 같은 결정을 내렸다. 이 교회에서는 내가 열 살이었을 때부터 세계의 종말이 온다고 했는데 아직도 세상은 끝나지 않았고 나는 회의하게 된 것이다.

그 때부터 나는 신이 아닌 나 자신 만을 의지하는 삶을 살았다. 그 즈음 나는 술을 알게 되었고, 마약도 배우게 되어 28살이 될 때까지 계속 그런 인생을 살았다. 열 세 살부터 열여섯까지 고등학교에 다녔고, 그후 이년간 기술학교에 다녔다. 그리고는 결혼도 했고 또 이혼도 두 번하고, 그러는 사이 아주 예쁜 자식도 하나 갖게 되었다. 아이는 나에게 보물과도 같은 존재이다. 그러는 동안, 나의 술버릇 때문에 경범죄로 체포되는 일이 있었고, 가정 문제가 생기고, 결국 직장도 잃었다.

1994년에 결국 술로 인하여 나는 육십 년이라는 형을 받게 되었다. 나는 그때 친구와 같이 있었는데, 그 친구가 자기 여자 친구를 죽인 것이다. 나는 유죄 선고를 받았다. 내가 방아쇠를 당긴 것은 아니지만 그 친구를 그곳에 데려다 준 것이 나이고, 또 그 당시 친구를 말리지도 않았으며, 또 범죄 후 바로 경찰에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 친구와 같은 형량을 받았다. 소위 말하는 공범이었다.

나는 인디아나 주립 교도소에서 오 년 간 감옥을 한 후 어떤 친구를 하나 만났다. 그 친구는 불교 신자로, 그 당시 나는 기독교를 다시 믿던 중이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철학과 이념에 대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 친구는 나에게 불교에 대한 간단하게 가르쳐 주었고, 교도소에서 어떻게 불교 수행을 하는지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는 Ball State 대학을 통해 우리는 비교종교에 관한 강의를 듣기도 했다. 그 강의를 통해 불교 역사와 교리에 대해 알게 되었다. 점점 더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목요일마다 하는 참선 모임에 들어가게 되었다.
처음 모임에 나갔을 때 좀 쑥스러웠다. 왜냐면 염불이 뭔지 몰랐고, 따라하다가 자꾸 틀리곤 했다. 또 처음 해보는 108 배는 정말 힘들었다. 하지만 결국은 그런 수행법에 익숙하게 되고, 염불, 독송, 그리고 절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인디아나 주립 교도소에서의 정기적인 모임을 이끈 사람은 관음 젠 센타에서 온 론 키드와 우담바라 젠 센터의 트리샤 티터 두 사람이었다. 그 두 분은 아주 친절하고, 우리들의 모임에 내적인 힘과 사랑과 평화를 가져다 주었다. 우리는 금요일 마다 교도소 안 예배당에서 모이는데, 보통 예불은 네시 사십오분에 시작한다. 먼저 사홍서원을 하고, 절을 시작한다. 그리고 삼법인을 독송하고, 이십오분 내지 삼십분간 참선에 들어간다. 방선하고는 십분가량 포행을 한다. 그리고는 반야심경 독송을 하고,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주력을 한 후에, 법문을 듣는 시간이 있다. 이런 스케줄은 가만 앉아 있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나, 나같이 마음이 천갈래 만갈래로 달리는 사람들에게는 참 어려운 수행이다. 요즘 나는 매일 내 감방에 앉아서 참선을 하고, 반야심경을 외운다. 이러한 수행이 내 삶은 구석 구석에 스미어간다. 어떤 때 스트레스가 오거나 긴장 상태에 빠지는 경우도 있는데, 그때 관세음 보살을 부르면 신기할 정도로 마음이 이완된다.

교도소의 “자유“라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서로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종교인들은 종교에 따라 다른 생각을 한다.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죽어서 천당에 가는 것이 자유로와 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슬람교 신자들이나, 유태인, 또는 아메리칸 인디언에 따라 그들 나름대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교도소에 나가는 순간 자유를 얻는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 ”어떤 것“, 또는 그 ”어떤 사람“을 없앨 때에만 자유롭게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내게 있어서 자유란, 미래에 오기를 기다리는 어떤 것이거나, 또는 어떤 다른 사람이 가져다 주어서 받는 어떤 것이 아니다. 자유란, 내가 어느 곳에 있거나, 또는 어떤 사람이냐에 관계없이 지금 그리고 이곳에서 경험되는 것이다. 그것은 추상적인 어떤 것이거나 저 멀리 있는 개념이 아니다. 자유는 내 속에서 오는 것이다. 나에게 자유롭다는 것은 매순간 매순간을 충실히 산다는 것을 의미하며, 과거나 미래에 대해 걱정치 않는 것이다. 나는 인생의 매순간을 빠짐없이 경험하려고 노력한다. 가만히 멈추어 나의 호흡을 관하고 이 세계의 있는 그대로를 지켜보는 것이다.

이제 불교를 수행한지 삼 년이 되었다. 이곳 교도소에 있는 우리 대중들과 함께 올 칠월에 계를 받으려고 한다. 나는 계속 선을 수행할 것이고, 오계를 받는다면 그것을 꼭 지키겠다는 서원을 하고 받는 것이니까 내게 아주 큰 결정이다. 나 외에도 이번 칠월에 계를 받을 다른 여섯 사람이 있다. 앞으로 바라는 것은 그 분들과 같이 이곳 인디아나 교도소에 상가 공동체를 이루어 우리가 불교인으로 점점 커지고 서로에게서 배우는 것이다.


◎ 위의 글은 삼우스님이 미국에서 발행하는 잡지 <스프링 윈드>에 실린 내용을 소개한 글입니다. 여름호 특집으로 '교도소'를 다뤘고 그 중 미시건 대학 조은수 교수가 개인적으로 가슴에 와 닿아 번역을 한 글입니다.
권형진 기자 | jinny@buddhapia.com
2003-06-24 오전 8: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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