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선불(選佛) 즉 ‘부처를 뽑는다’는 말은 마조(馬祖, 709~788) 선사의 문하에서 참학하던 방온(龐蘊, ?~808) 거사의 다음 게송에서 비롯한다.
시방에서 함께들 모여들어 (十方同一會)
모두 무위를 공부한다 (各各學無爲)
여기가 바로 부처를 뽑는 곳 (此是選佛處)
마음 비우고 급제해 돌아간다 (心空及第歸)
“마음 비우고 급제해 돌아갈” 고향은 과연 어디인가. 그곳은 곧 ‘본래의 자기’일 터, 그 본지(本地)의 풍광(風光)을 보기 위해 오늘도 수많은 납자들은 ‘화두’를 든다. ‘이뭣고(是甚?)’ 혹은 ‘무(無)’, 이른 바 1,700공안이 바로 그것이다.
불기 2547년 하안거 결제일 아침. 기자도 화두 하나 들었다. 감히 은산철벽에 도전하는 화두는 아니고, 선객(禪客)들은 왜 ‘이뭣고’라는 ‘의심 덩어리’를 내려 놓지 못하는 걸까. 조사들의 오도기연을 보면 하나 같이 한 순간인데, 왜 평생을 운수(雲水)의 삶으로 일관하는 걸까, 하는 의문을 화두로 삼은 것이다.
인천 용화선원. 선원장 송담 스님으로부터 결제 법문을 듣기 위해 용주사 중앙선원을 비롯한 제방의 선객들이 속속 모여든다. 재가 불자들의 행렬도 끊이지 않는다. 결연한 의지를 담은 얼굴도 있고 소풍 나온 아이 같은 설렘이 드러나는 얼굴도 있다. ‘비장한 환희심’이 법당 가득하다. 얼추 스님 200, 재가자 500여 명 쯤 될 것 같다.
송담 스님의 법문은 참으로 절절했다. 일상의 언어로, 일상의 삶에 빗대어, 선수행의 고원한 경지를 열어 보이셨다.
“오늘 도반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 오늘 방부를 들인 수좌나 이들을 옹호하는 외호 대중들이 다 일대사를 해결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수좌나 외호나 근본은 같습니다. 참된 선객이라면 죽이면 죽 국수면 국수, 그저 묵묵히 공양을 수용할 뿐, 맛이 있느니 없느니 정성이 부족하다는 불평을 하지 말고 묵묵히 화두를 드십시오. 부처님께서는 앞장서서 제자들을 이끌고 일곱 집을 돌며 걸식을 하셨습니다. 이에 비하면 요즘 어느 절이나 선방도 의식주는 괜찮습니다. 외호 대중 또한 인연 도리에 따른 소임이므로 정성을 다해 불법의 전통을 잇는 수좌를 외호하십시오. 이렇게 한마음 한뜻이 되어 최고의 정진이 되는 한철을 사십시오. 그래서 몽산(?~?, 진나라 때의 스님으로 혜능 스님의 가르침으로 개오함) 스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함께 정진을 할진대는 세상의 모든 인연 버리고, 모든 집착이나 전도된 망상 제거해 버리고 진실로 생사대를 위해 정진하되, 그 선방의 규칙을 자발적으로 지켜야 할 것이니…, 삼경이 아니면 수면하지 말고, 도량을 벗어나지 말 것이며 대중적인 행사가 아니면 경전을 보지 말아야 한다. (…) 이렇게 하여도 확철대오를 못하면 거짓말한 과보로 발설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앞으로 삼복도 남았습니다만, 한 생각 한 생각 단속해 나가면서 번뇌 망상도 화두를 들게 하는 선지식의 채찍으로 아십시오. (…) 재가자들도 역경계에서 성취가 더 크다는 걸 아시고 가정을 선방으로 삼으면 가정이 생불보살이 사는 도량으로 변해갈 것입니다. (…) ”(지면 관계상 스님의 법문을 압축하였음.)
용화선원을 뒤로 하고 비구니 선방인 용인 화운사(주지 혜완, 54)의 능인선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참으로 고맙게도 화운사의 수좌 스님들이 재가 불자들을 위해 결제 대중의 정진 모습을 지면에 담을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 인연으로 송담 스님의 법문도 듣게 된 것인데, 화운사의 수좌들이 용화선원에서 결제 법요식을 함께한 덕분이다.
화운사로 가는 차 안에서 송담 스님의 법문을 되새겨 보았다. 평소 품어왔던 몇 가지 의문의 실타래가 조금 풀릴 기미를 보인다. 일반적으로 재가 불자들이 참선 수행을 어렵게 생각하는 이유는, 강 저편의 경지와 강을 건너는 과정의 어려움만을 말할 뿐, 강을 건너는 구체적 방법에 대해서는 대단히 불친절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체험하지 않으면 자기 공부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오늘, 송담 스님의 법문을 통해 일찍이 남전 스님이 도(道)를 묻는 조주 스님의 말에 ‘평상심이 도(平常心是道)’라고 한 뜻을 조금은 알겠다. 하지만 그 도의 본질에 대해서는, 말로 할 수도 들어서 알 수도 없음 또한 조금 알겠다.
옛 큰스님의 말씀, “크게 의심하면 크게 깨닫고, 작게 의심하면 작게 깨달으며, 의심하지 않으면 아예 깨닫지 못한다.” 원각경의 그 곡진한 당부, “알음알이로 원만하게 깨달은 여래의 경지를 헤아려 보려는 것은 마치 반딧불로 수미산을 태우려는 것과 같아서 결코 될 수 없는 일이다.”‘선객들은 왜 평생 화두를 들까’ 하는 기자의 화두는 여기서 허물어지고 만다. 스스로 의심하지 않는 한 1,700공이 다 사구(死句)인 까닭이다.
화운사 능인선원. 방선 시간에 잠시 입승(일태, 51) 스님을 만났다.
“결제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한철 공부로 확철대오할 수는 없는 겁니까.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끝없이 반복되는 결제 해제가 무슨 의미일까요.”
“글쎄요. 몸소 한번 해 보시죠.”
“….”
“성불 전에는 해제가 없겠지요. 그렇지만 다생겁래로 다져온 습기를 한 순간에 조복받기란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그러다보니 해제 때는 조금 풀어지는 것이 사실이고, 결제 때면 또 한번 더 신심을 굳게 하고 그럽니다만….”
저녁 6시 30분. 딱, 딱, 딱 죽비 내리는 소리 세 번. 선방은 적멸의 공간이 된다. 그리고 나는 저잣거리로 발길을 돌린다. 그 순간, 까치 울음소리 요란하다. 영역 다툼이다. 세상은 이렇게 돌아간다. 시간의 살에 얹혀서. 해탈도 윤회도 다 그 안에 있을 터인데…. 어디로 가야 할까. 오직 모를 뿐이다.
지금 전국의 절 마당에는 불두화가 만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