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9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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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각스님이 직접 쓴 육남매 출가 이야기
진가(陳家)네 호적등본은 수십년 변함이 없다.

본각 스님이 출가 15년후, 성철 스님과 6남매가 함께 찍은 사진. 뒷줄 왼쪽부터 적조스님(둘째 딸), 보명스님(셋째 딸), 천제스님(장남), 현경스님, 도성스님. 앞줄 왼쪽부터 삼소스님(차남), 성철 큰스님, 본각스님(막내), 인홍스님, 혜근스님(맏 딸).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이후로 우리 진가(陳家)네 호적등본은 정지한 듯 변함이 없다. 지난 1982년 내가 일본유학을 준비할 때 여권 발급에 문제가 될 것을 염려해,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호주를 큰 형으로 바꾼 것이 단 한번의 변화였다. 몇 십년간 변함없는 호적등본이지만 아마도 얼마의 세월이 지나고 나면 한 사람씩 세상을 떠난 표시가 기재될 것이다. 차례대로 떠나자고 약속했으니 막내인 내가 제일 마지막까지 호적등본을 지켜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별세한 아버지 천도를 위해 성철스님 만난 것이 출가 계기

부모님의 얼굴을 나는 사진을 통해서 알 뿐이다. 어릴때 부모님 얼굴을 모른다고 했더니, 큰 형이 친척집을 다 뒤져서 도민증에 붙었던 아버지 사진과, 친구 분들과 나들이 가서 찍은 어머니 사진을 구해다 주었다. 그리고 그 뒤에 태백산 홍재사에서 어머님의 보살계 수계산림 회향기념으로 찍은 사진을 얻었다. 그 사진에는 아버지와 큰 형이 빠지고 모친과 다섯 형제가 들어있다. 그것이 내가 아는 재가(在家) 시절 가족에 대한 기억의 전부다.

형들은 부모님 특히 아버지 이야기를 할 때면 행복한 얼굴이 되곤 한다. 아버지는 여양 진(陳)씨로 훈장을 지낸 할아버지의 막내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가난한 선비집의 막내로 태어나 제대로 글공부를 하지 못했기에, 자녀교육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무척이나 자상하셨다. 당시 지방명문이었던 마산동중학교에 큰 형(천제스님)이 합격하자 큰 형을 위해 그 여름 마산으로 이사하셨다가 병을 얻어 돌아가셨다. 지금도 큰 형은 마산을 지날 때면 “마산은 아버지와 이별한 회한의 땅”이라는 말을 되뇌이곤 한다.

신창 표(表)씨인 어머니는 과묵하고 점잖은 분이셨다. 우리 여섯 남매를 키우는 것을 생의 전부로 여겼던, 전형적인 이 땅의 어머니의 모습을 지녔다. 어머니는, 뒤에 스님이 되신 친척 고모님의 권유로, 한을 남기고 떠나신 아버지를 위해 49재를 지내드리기로 했다. 고승으로 이름높은 성철 스님을 찾아뵙고 부친의 천도를 부탁드린 것이 우리 일가의 불교와의 인연의 시작이다. 부친의 사망이 계기가 되어 우리육남매는 출가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부친의 갑작스러운 별세로 참담한 마음으로 있던 큰 형(천제 스님)은 부친의 49재를 마치자마자 집으로 돌아와 신변을 정리했다. 그리고 곧바로 통영 안정사 천제굴에서 수행하시던 성철 큰스님께 귀의했다. 나이 15세였다. 출가 암자인 천제굴의 ‘천제’는 뒤에 큰 형의 법명이 되었다. 그 때가 1952년. 부친이 사망한 해이면서 내가 이 사바세계에 첫 발을 디딘 해다. 지금도 큰 형의 누님스님이 외우고 있는 글은 당시 형이 느꼈을 인생무상을 뼈저리게 표현하고 있다.

“오호 애재라, 부세사(浮世事)여. 인생은 왜 앞길을 모르는가. 석화(石火) 같은 인생의 평생, 인생은 죽음의 길을 행하면서 왜 공포심이 없으며, 왜 생로(生路)를 찾지 않는고. 슬프다 인생사여. 아무리 친해도 이별이 있고,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려도 사시(死時)가 있으니, 이 어찌 하련고. 벼슬이 높으면 죽지 않는가, 생사에 얽매인 부세인(浮世人)이여. 숨 한번 잘못 쉬면 가는 이 세상, 일시 속속 성불도(日時 速速 成佛道)”라는 내용의 편지를 당시 친구에게 보낸 것을 누나가 보았고 지금까지 인생무상의 경구로 삼고 있단다.

이 편지를 받은 1년 뒤 큰 언니까지 출가하자, 모친은 남편을 보내고 두 팔처럼 믿었던 두 자식까지 출가한 현실 앞에서 스스로도 출가를 결심했다. 모친은 다섯 명의 자식에게 출가에 대해 의견을 물었다. 어린 나에게도 출가 의사를 물으니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나 역시 “출가할 것”이라고 분명한 의사를 표명했다고, 언니 스님은 지금도 자랑삼아 나에게 이야기 해주곤 한다.

이렇게 의견이 모아지자, 모친은, 추억의 찌꺼기를 없애버리려는 듯 가족사진을 모두 불태우고 살림을 처분해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절로 갔다.

어머니는 1955년 태백산 홍재사 보살계 산림에서 자운 율사스님에게 출가를 앞두고 ‘성종’이라는 법명까지 받았으나 뜻밖의 병을 얻어 출가의 뜻까지는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출가하기 위해 절에 가던 날의 에피소드다. 교육열이 높았던 부모님 덕분에 형들은 한번도 학교를 결석한 일이 없었다. 아침 일찍 집을 떠나 태백산으로 향하던 우리 가족은, 부산 근처를 지날 즈음에 날이 밝아 등교 길에 오르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당시 중학교 1학년이던 둘째 언니는 출가하러 가는 것도 잊어버리고, 모친에게 오늘 결석해서 어쩌느냐고 걱정을 하였단다. 그리고 비로소 상황이 바뀐 것을 알아차리고는 마음이 몹시 쓸쓸했다고 회상하곤 한다.

그렇게 츨가해 수행자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 여섯 남매는 이제 큰 언니 혜근 스님, 큰 오빠 천제 스님, 둘째 언니 적조 스님, 셋째 언니 보명 스님, 둘째 오빠 삼소 스님, 그리고 나 본각이다.

육바라밀 수행자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담소를 나누며 조계사길을 걷고 있는 적조스님과 본각스님(오른쪽)
나는 언제부터인가 마음 속으로 우리 형제를 육바라밀 수행자라고 부르곤 한다.
혜근 스님(마산 금륜사)은 보시바라밀, 나는 지혜바라밀. 어쩌면 그렇게 수행하고자 하는 염원에서 인지도 모른다. 혜근 스님은 그야말로 남에게 온통 베푸는 보시의 삶을 살고 있다. 월정사 적멸보궁에서 부처님께 손가락으로 등명(燈明)을 삼아 밝히고, 우리 6남매 모두가 참다운 수행자로서 살아가기를 서원하는 소신공양을 행한 일이 대표적인 예다. 주위에 어려운 사람이 있을 때에는 그 사람을 위하여 수년동안 기도로써 베풀어 준다. 1년 전부터는 하도 열심히 능엄주 기도를 하기에 누구를 위한 기도냐고 물어보았더니, 사제(師弟) 스님 절의 불사 원만성취와 내년에 있을 샤키야디타(국제여성불교도대회) 대회의 성공, 그리고 또 누구 누구를 위한 기도라고 이야기 해 주었다.

천제 스님(조계종 법규위원장)은 성철 큰스님의 맏 시봉인 관계로 많은 분들이 잘 아는 스님이다. 15년간 총무원 종정사서실을 지키면서 남다른 면모를 간직해온 분이다. 수행에 엄격하시고 청정가풍을 지키신 성철 큰스님을 모시는 마음가짐이 몸에 배어 혹시 누가 될세라 늘 그림자처럼 처신하신다. 사서실 소임을 살던 시절, 해제를 하고 올라오는 사제스님들, 그리고 우리 형제들이 찾아가면 언제나 월급을 가불한다고 농담처럼 이야기 했다. 천제스님도 이제는 7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고, 뒤늦게 큰스님의 뜻을 펴고자 부산 큰스님 인연 터에 가르침을 받드는 봉훈(奉訓)의 전각을 짓느라 현재 애를 쓰고 있다. 고령에 불사로 애쓰는 천제스님을 만날 때 마다 생전에 제자를 몹시 아꼈던 성철 큰스님의 자비가 드리워지기를 기도한다.

형제중 셋째인 적조 스님(서울 금장사). 위로 세 형제(천제 혜근 적조)가 아래 세 형제의 교육과 생활 전반을 맡아서 지도하기로 약속을 했단다. 나는 적조스님의 담당이다. 1967년 이래 석남사, 운문사에 함께 있으면서 나의 걸음걸이, 밥 먹는 것, 웃고 이야기하는 것, 도반들과 사는 일상에 이르기까지 적조스님께 꾸중을 듣지 않은 항목이 없다. 석남사에서 발우 공양할 때, 남은 무 깍두기 하나 먹으려고 접시의 국물까지 닦아 먹다 야단을 맞은 적이 있다. “깍두기가 하나 남았으면 먹지 말고 그대로 남겨둬야 많이 덜은 어른이 찬상에 되돌려 놓을 것 아니냐”는 불호령이었다. 다른 스님들이 잔뜩 덜었다가 도로 내놓을 것까지 마음을 써야 하나 하는 억울함이 가득 했는데, 세월이 지나고 나도 남을 가르치면서 때로는 한발 앞서서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필요할 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지극한 마음으로 남을 배려하는 것이라는 것을 적조 스님의 꾸중을 통해 깨달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넷째 보명스님은 형제 중에 제일 고생을 많이 했다. 요즈음은 몸이 병약하다. 성격도 솔직담백해서 금방 화를 냈다가도 씽긋 웃으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우리 형제 파수꾼으로서 누가 나쁜 이야기를 하면 그날부터 그 사람과는 담을 쌓아버리는 격한 성격도 있지만, 인정 많고, 가진 것 없는 사람 사정 잘 아는 정감 넘치는 스님이다. 부모님에 대한 정성도 남달라 부모님 제사는 늘 보명스님이 맡아서 지내고 있다.

다섯째 삼소스님, 부산 정혜사에서 조용히 살고 있다. 절 앞 오륙도를 바라보면서 무엇을 생각하고 살고 있는지 1년에 한두 번 만나서는 그 속마음을 알 수가 없다. 어떤 때는 속마음조차도 없어 보이는 무심도인이다. 부엌에 들어가면 주걱 국자서부터 깔끔히 정돈돼 늘 정갈하다. 지금 살고 있는 작은 토굴도 혼자서 자재를 사서 지었다고 한다. 하도 조용한 성격이라 함께 있어도 없는 것 같을 때가 있다. 무슨 말을 해도 웃기만 한다. 바로 밑의 동생인 나를 무척 좋아하는 형이다. 늘 바쁘게 사는 나를 위해서 부산에 가면 스스로 운전기사를 자처하는 마음 좋은 형이다. 삼소스님의 도반들이 활발한 종단활동을 하는 것에 비해 볼때 삼소스님은 참 조용하게 정진하고 있다. 부산에 일이 있을 때면 언제나 삼소 스님께 들르려고 한다. 스님에게서 느끼는 여유와 정적이 나의 부산함을 쉬게 하기 때문이다.

나 본각은 막내로 태어나서 부모님께 걱정을 남겼고 형들께 고생을 끼쳤다. 어린 나 때문에 모친은 뜬 눈으로 밤을 새웠고, 형들은 가슴아파했다. 이제 50을 넘기고 60을 바라보면서, 학자이고 교수 이기 이전에 언제나 수행자 집안의 일원임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늦게 철이 난 탓인지 요즈음 들어 부쩍 부모님과 스승님, 형들의 은혜에 감사하다. 참다운 승려의 길을 걸어가는 것으로써 모든 분들께 보은하고 싶다.

너희 집안이 이렇게 망할 줄은 몰랐다고 위로하던 동네 친척의 말과 같이 세속에서는 ‘망한’ 집안일지 모르지만 우리 육남매가 부처님 법의 집에 다시 태어나서 부처님의 가계(家系)를 이어가려는 것이 자랑스럽다. 부처님의 가계를 더럽히지 않는 수행생활이 되도록 서로 격려하면서 정진하고자 한다.

글= 본각스님 (중앙승가대 교수)
2003-05-12 오전 10:07:00
 
한마디
지혜롭고, 자비로우신 본각스님 정말 부럽습니다. 형제간에 이러케 우애롭게 부처님의 제자로서의 인연을 맺어가시니 존경스럽습니다. 세간에 현실은 부모 자식간에도 종교가 틀려서 지옥같은 삶을 사는 중생들이 많은데..... 그 것은 불자 부모로서의 직무유기가 아닌가 생각이 되며, 어떻게 부처님(성불)을 이루려는지..... 이런 불자 부모님들은 정말 본바다야할 모범적인 가족사라 생각이 되며 많은 깨달음을 주셨읍니다. 앞으로도 본각스님의 지혜을 우리 재가불자들한데 지도해주십시요. 건강하십시요. 나무석가모니불.
(2003-05-13 오전 12:2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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