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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을 시작으로 열린 이날 영결식에서 조계종 종정 법전스님은 "불일이 서쪽으로 기우니 조사의 심인이 땅에 떨어졌다. 와서 교화의 흔적 남겨두셨으니 어느곳에서 다시 만나리로"라고 게송을 읊은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흔적없이 가고자 한 것이 조사의 가풍"이라고 법어했다.
조계종 원로의장 도원스님은 수석부의장 종산스님 대독을 통해 "큰스님께서 봉암사 장실에서 입적하셨다는 부음을 듣고 후학들은 본분종사로 제대로 모시지 못한 죄책감에 가슴깊은 회한의 눈물을 흘린다"고 밝혔다.
범어사 조실 지유스님은 영결사에서 "구산선문 가운데 유일하게 존속되는 봉암사를 중창하시고, 수도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산문을 폐쇄하신 크나큰 업적은 후학들에게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보람이요 감동"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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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노무현대통령 조문메시지, 이창동 문광부 장관, 이의근 경북도지사, 이상배 한나라당정책의장 조사가 이어졌다.
서암스님 영결식에는 조계종정 법전스님, 원로의원 도천 수산 활안 동춘 스님, 총무원장 법장스님, 종회의장 지하스님, 교육원장 무비스님, 봉선사 회주 밀운스님, 해인사 주지 세민스님, 월정사 주지 현해스님, 법주사 주지 지명스님, 송광사 주지 현봉스님과 본사 주지스님, 전국강원 강주스님, 전국 선원 유나스님, 선원장스님, 수좌회대표 스님. 비구니대표 혜해스님, 이의근 경북도지사, 손학규 경기도지사, 오지철 문광부 차관, 이상배 한나라당 정책위의장, 신영국 의원, 성재도 대통령비서관, 박인원 문경시장, 박성호 문경경찰서장등이 참석했다.
한편 오후 12시 30분부터 희양산 봉암사 연화대에서 다비식이 거행됐다. 문도대표인 서호스님은 "큰스님의 유훈에 따라 사리는 수습치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봉암사=김원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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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성姓은 송宋씨이시고 이름은 홍근鴻根이십니다.
1917년 10월 8일 경북 안동군 녹전면 구송리에서 엄부 송동식宋東植 님과 자모 신동경申東卿 님 사이에서 5남 1녀 중 셋째로 탄생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1932년 16세에 예천 서악사西嶽寺에서 화산華山 스님을 은사로 득도하시고, 1937년 21세에 운달산 김룡사金龍寺에서 금오金烏 대선사로부터 비구계比丘戒와 보살계菩薩戒를 수지하고 서암西庵이란 법호法號를 받았습니다.
1938년 22세에 김룡사 강원을 졸업하고, 일본대학교 종교과에 입학하여 수학하던 중 폐결핵 말기 진단을 받고 귀국하셨습니다.
1942년 26세에 인생의 무상無常을 느끼시고 생사도리生事道理를 해결하기 위하여 김룡사 중암선원中庵禪院에서 용맹정진하시며 각고의 수선修禪을 하셨습니다.
1944년 이후 금강산 마하연과 사불산 대승사·계룡산 나한굴·덕숭산 정혜사·가야산 해인사·지리산 칠불암·오대산 상원사·속리산 복천암·청화산 원적사·금정산 범어사·동화사 내원암·태백산 각화사·도봉산 천축사·희양산 봉암사 등지에서 정진하셨습니다.
특히 1946년 계룡산 나한굴 천연동굴에 들어가시면서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살아서 이 굴에서 나가지 않으리라’ 결심하시고 살이 터지고 뼈가 드러나는 고행으로 선정삼매 속에서 청천백일을 보듯이 밝게 보시고 역경계逆境界 순경계順境界에 자유함을 체험하시니, 후에 누가 오도송悟道頌을 여쭈매 “오도송이고 육도송이고 그런 거 없다.”고 하셨습니다.
1975년 59세에 제 10대 조계종曹溪宗 총무원장總務院長에 취임하셨습니다.
1979년 63세에 희양산 봉암사 조실에 추대되시어 낙후된 가람을 중창하시고 조계종 종립선원으로 만드시어 선풍을 드날리며 납자衲子를 제접提接하시었습니다.
1991년 75세에 조계종 원로회의元老會議 의장議長에 취임하시고
1993년 77세에 제 8대 조계종 종정宗正으로 추대되시었습니다.
2003년 3월 29일 오전 7시 40분에 봉암사 염화실에서 87세를 일기로 입적入寂하셨습니다.
열반송은
“스님께서 입적하신 후 사람들이 스님의 열반송을 물으면 무어라 할까요?” 하니
“나는 그런 거 없다.”
“그래도 한평생 사시고 남기실 말씀이 없습니까?”
“할 말 없다.”
“그래도 누가 물으면 뭐라고 답할까요?”
“달리 할 말이 없다.
정히 누가 물으면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
그게 내 열반송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종정 법전 스님 영결식 법어>
조사祖師의 심인心印이 땅에 떨어졌으니
불일서경佛日西傾하니 조인타지祖印墮地로다
내류화적來留化跡하니 하처우봉何處又逢하리오
불일이 서쪽으로 기우니 조사의 심인이 땅에 떨어졌구나.
와서 교화의 흔적 남겨두셨으니 어느 곳에서 다시 만나리오.
새삼 고인들의 임종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당나라 때 보화 스님의 열반모습은 그대로가 법문입니다. 보화 스님이 거리에 나가 사람들더러 장삼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매번 장삼을 주었으나 보화 스님은 그 때마다 필요없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임제 스님께서는 원주를 시켜서 관을 하나 사오게 하고는 보화 스님이 돌아오자 말씀하셨습니다.
“내 그대를 위하여 장삼을 장만해 두었네.”
그러자 보화 스님은 곧 스스로 그것을 짊어지고 나가서 온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외쳤습니다.
“임제 스님께서 나에게 장삼을 만들어 주었다. 나는 동문으로 가서 세상을 떠나리라.”
시내 사람들이 다투어 따라가보니 보화 스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가지 않겠다. 내일 남문으로 가서 세상을 떠나리라.”
사흘을 이렇게 하니 사람들이 아무도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흘째 되는 날 따라와서 보려는 사람이 없자 혼자 북문으로 나가 관 속으로 들어가서 길 가는 행인더러 뚜껑에 못을 치게 하였습니다. 삽시간에 이 소문이 퍼져서 시내 사람들이 쫓아가서 관을 열어보니 몸은 빠져 나가버렸고 공중에서는 요령소리만 은은히 울릴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아무도 없는 곳에서 흔적없이 가고자 한 것이 조사의 가풍인 것입니다. 서암 대종사 역시 이러한 임제선풍을 이어온 이 시대의 선지식이셨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남기실 말씀을 묻는 시자에게 “그 노장 그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고 하신 것입니다.
돈오문중일척신頓悟門中一擲身하니 석정증다헌종사石鼎蒸茶獻宗師로다
돈오문중에 한 몸을 던지셨으니 돌솥에 차를 달여 종사께 올립니다.
불기 2547(2003)년 4월 2일
조계종 종정 도림법전 분향
<영결사>
서암 큰스님.
큰스님께서는 동진童眞으로 출가하여 선禪과 교敎 그리고 신학문新學問을 겸비兼備한 선지식善知識이셨습니다.
오늘 그 거추장스런 환신幻身을 훌쩍 던져버리시고 일단영광一段靈光이 독로獨露하여 생사에 걸림 없는 법신法身에 계합契合하시니 얼마나 상쾌하시나이까?
큰스님의 철석 같은 신념信念과 원력願力으로 정진하신 모습과 철저한 무소유無所有의 생활生活은 출가사문出家沙門의 귀감龜鑑이었습니다.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에 유일하게 존속存續되는 희양산曦陽山 봉암사鳳巖寺를 중창重創하시고, 수도환경修道環境을 조성하기 위하여 산문山門을 폐쇄閉鎖한 불굴不屈의 노력勞力은 스님만이 하실 수 있는 크나큰 업적業績이기에 후학들에게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보람이요 감동感動입니다.
큰스님.
이 봄날 좋은 계절에 우리 곁을 떠나 다시는 뵈올 수 없는 아쉬움이 남겠지만, 그러나 큰스님의 가르침과 원력은 봉암 계곡에 메아리가 되어 정진대중精進大衆을 이끌어 주는 법력法力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큰스님.
자비의 빛으로 다시 사바娑婆에 오시어 중생을 이끌어 주소서.
불기 2547(2003)년 4월 2일
범어사 조실 지유 분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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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서암 큰스님.
큰스님께서 희양산 봉암사의 장실에서 입적하셨다는 부음을 듣고 저희 후학들은 본분종사로서 큰스님의 만년을 편안히 모시지 못한 죄책감에 가슴 깊은 회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교단과 삼보를 올바로 호지하지 못한 종도들의 공업에 대해서도 제불 보살님과 역대 조사전에 깊이 참회드리며 큰스님의 각령전에 후학들의 정성 모아 한 줄기 향을 바칩니다.
큰스님!
한 조각 향연기가 손을 따라 일어나니 큰스님의 오심도 이와 같으시며 큰스님의 가심도 이와 같습니까(一片香煙隨手起 師來師去如是耶).
서암 큰스님.
본분종사의 산 눈(活眼)으로 보면 생사성괴生死成壞가 허공꽃과 같거니 원친숙업이 어디 있으며, 생사거래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남은 중생의 미혹한 눈에 저희 종단은 아직 안정과 화합의 토대 위에서 수도와 전법의 높은 가풍을 진작하지 못하고 있으며, 세상은 충격과 공포, 전쟁과 살육의 아수라장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큰스님!
위로 제불보살의 자비의 힘에 함께 하시어 저희 종도들에게 교단중흥의 힘을 호념해 주시고, 본태평本太平의 선풍으로 우리 민족과 세계에 평화의 힘을 더해 주소서.
일찍이 큰스님께서는 16세에 예천 서악사로 출가하시어 나라 잃은 식민지 백성의 한을 대승보살의 원력으로 승화하시고 죽음에 이를 병마를 용맹정진의 수행으로 이겨내셨습니다. 때로 경전을 강의하고 학업에 연마하는 모습을 보이시다가도 다시 절학무위絶學無爲의 가풍으로 용맹정진하시어 만공滿空·한암漢巖·효봉曉峰·금오金烏 선사 등 당대 선지식들의 수행가풍을 이어받으셨으며, 성철 청담 도천 선사 등과 결사 정진하시어 후학 대중들에게 위법망구의 정진가풍을 전해 주셨습니다.
큰스님께서는 화광동진和光同塵의 뜻으로 홍진만장에 발을 담그시어 총무원장·원로회의 의장을 역임하시고 종도들의 추대로 조계종정에 취임하셨으나, 홀연히 모든 것을 버리시고 태백산 무위정사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본분종사의 가풍에 버려야 할 유위법有爲法이 없으니 머물러야 할 무위법無爲法이 어디 있겠으며, 떠나야 할 사법事法이 없는데 취해야 할 이법理法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큰스님께서 저희 후학들에게 부촉하신 가풍은 곧 유위법을 다하지도 않고(不盡有爲)무위법에 머물지도 않는(不住無爲) 중도의 선풍이며, 중생의 번뇌를 없애지 않고 구경의 깨달음을 이루는 최상승의 종풍일 것입니다.
큰스님!
중생과 함께 할 보살의 서원을 어기지 마시고 옴이 없이 다시 오시어 교단 중흥불사에 힘을 더해 주시고 고난과 시련에 빠진 온갖 중생을 이익 되게 하시고 안락케 하소서.
희양산에 봄이 오니 산빛 더욱 새롭고(春來曦暘新又新)
자고새 우짖는 곳 백가지 꽃 향기롭네(啼處百花香)
불기 2547(2003)년 4월 2일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 도원 분향
<총무원장 법장스님 조사>
스님은
유여만월현고희양산猶如滿月顯高曦陽山이시니
혜광변조시방慧光邊照十方하여 도무량중생度無量衆生하십니다.
가희 희양산에 높이 뜬 둥근달 같으시니
지혜광명이 시방 끝에 두루 비춰 무량한 중생을 제도하십니다.
이제 스님은 상주어적정常住於寂靜에 드셨으니 상음법감로常飮法甘露하시고 안주보련화安住寶蓮華하시겠습니다.
그러나 스님!
여래자如來者는 무소종래無所從來하고 역무소거亦無所去한다 하셨으니 유심자비有深慈悲하신 스님께서는 어서 오셔서 격무상법고擊無上法鼓하여(무상의 법고를 울려) 종도와 종단은 물론 이일체세간利一切世間하시옵소서(일체세간을 이익되게 하소서).
오늘 소납이 영결식장에 서니 스님이 남기신 말씀과 삶의 모든 것들이 수행의 지침과 교훈이 되어 우리들 가슴에 다시 살아납니다.
“중은 화두가 생명이니 화두가 없으면 산 송장이다.”라고 하시었으며, “이불 깔고 자려고 생각하면 공부하는 수좌가 아니다.”라고 하시어 방일放逸을 경계하고 근수정행勤修精行을 독려하셨습니다. 한때는 잘 먹고 잘 입으려고 중된 것이 아니니 고무신 꿰매어 신듯 순수하고 검박하게 사는 것이 중노릇임을 강조하셨으며, 스님 또한 항상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리고 스님께서는 “많이 아는 것은 귀貴한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귀한 것은 아는 것을 다 털어버리는 것이다.” 라고 하시며 지적 오만과 편견의 함정을 경계하셨습니다.
그리고 스님께서는 “남을 이기는 것은 용기있는 것이다. 그보다 더 큰 용기는 남에게 져주는 것이다.”라고 하시며 대기대용大機大用을 통한 대중화합을 강조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30세 젊은 나이에 계룡산 나한굴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지만 한순간 환희와 탄성으로 마무리하고 게송偈頌을 지어 상相을 내지 아니하시고, 마지막 열반의 말씀마저 거두시는 것으로 안주평등상安住平等相한 가운데 말없는 말로써 광발대비심廣發大悲心하셨습니다.
그렇게 조용히 안주평등상安住平等相한 가운데 사시는 스님께 대중은 무리하게 간청을 드려 ‘종정’에 추대드리니, 자타自他가 일여一如하므로 종단의 일이 나의 일이 아닌 것이 없다는 평소의 신념으로 거부 의사를 철회하시고 종단의 화합과 개혁을 실천하려 하셨던 깊은 뜻을 우매하여 그때 우리는 알지 못했지만, 유유제불唯有諸佛은 능증지能證知하셨고, 지금 대중은 그때를 깊이 성찰하고 있습니다.
스님!
광발대비심廣發大悲心하시어 스님이 이룩한 이 청정한 도량, 봉암사에 다시 오셔서 무량자재無量自在함으로 항상 불이不二의 법문法門을 여시고 많은 납자들이 관찰진실의觀察眞實義하도록 건립지혜당建立智慧幢하소서.
삼가 큰스님의 각령전에 분향하여 정례드립니다.
불기 2547(2003)년 4월 2일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 분향
<종회의장 지하스님 조사>
서암 큰스님!
어찌 이리도 무상無常을 보이시옵니까.
이렇게 저희들에게 훌쩍 헤어짐을 알리시니 마음 허허로움을 수습할 길이 없습니다.
큰스님에게야 생사가 가고 옴이 없는 하나이겠으나, 미혹한 저희들에게는 하나 아닌 둘이기에 그리는 마음은 어찌할 바 없습니다.
큰스님의 법력은 수미산須彌山처럼 높고 깊어서, 중생들은 큰스님을 헤아리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임종게를 물으매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 하셨다니, 그 크신 깨침을 우러러 뵈올 뿐입니다.
큰스님께서는 교계의 어른으로서 주요 소임을 마치시고 종립선원인 이곳 희양산 봉암사에서 주석하시면서 선풍을 드날리며 납자들의 푸른 눈을 밝혀 주셨습니다.
이제 큰스님의 법체는 비록 곁에 없으나 삼천대천세계를 유유자적하면서 가고 옴이 없이 중생들의 미망을 사르기에 오늘도 불제자들은 평상심을 잃지 않고 눈을 밝히고 있습니다.
서암 큰스님.
희양산은 푸르고 흐르는 물소리 여전한데 큰스님 어디로 가시나이까?
가시는 듯 다시금 이 땅에 오셔서 중생을 제접提接하소서.
큰스님께서는 또한 그리 하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옷깃을 바로 하여 향을 사르옵니다.
불기 2547(2003)년 4월 2일
조계종 중앙종회 의장 지하 분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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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암 대종사의 입적을 마음으로 부터 애도 드립니다.
지난 세월동안 삶으로 보여주신 법덕은 사부 대중들의 좋은 본이 될 것입니다. 귀한 가르침들을 국민과 함께 기리며, 다시한번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2003. 4. 2
대통령 노무현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 조사>
존경하는 서암(西庵)대종사 큰스님 !
불가의 도리로는 어찌 기쁜 소식, 슬픈 소식이 따로 있겠습니까마는 조계종 전 종정 서암 큰스님의 원적(圓寂) 소식에 크나큰 슬픔 가눌 길이 없습니다.
큰스님께서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 1932년 출가 득도하신 이후 일생동안 철저한 수행과 이타행(利他行)을 몸소 보여주시어 우리 나라 모든 불자들, 특히 전국선원 수좌들의 숭앙을 받은 우리 불교계의 위대한 정신적 스승이셨습니다.
또한, 큰스님께서는 조계종 총무원장과 원로회의 의장, 제8대 종정을 역임하시면서 종단의 화합과 개혁을 통해 조계종단은 물론 한국불교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시었습니다.
특히, 조계종단 청정 수행가풍 확립의 계기가 된 이른바 '봉암사 결사'의 요람인 이곳 봉암사에 주석하시는 동안에는 가람의 중창과 수행환경 보전에 원력을 베푸시어 오늘날 용맹정진하는 수좌들이 동경하는 선(禪)수행의 중심사찰로 가꾸셨습니다.
큰스님의 법덕을 어떻게 몇마디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비록 큰스님의 육신은 가셨지만 큰스님의 가르침과 덕화의 향기는 우리곁에 영원히 함께 할 것입니다. 이제 큰스님이 생전에 남기신 법어를 되새기며 스님께서 이루신 법력을 기리고자 합니다.
"좋은 말씀 좀 해 주십시오" 라는 수좌의 청에
"좋은 말이 모자라서 세상이 이 모양인가? 부처님과 다른 옛 성현들이 넘칠 만큼 좋은 말씀들을 해 놓았지 않는가? 하나라도 실천해야지"라고 말씀하신 큰스님!
부디 대해탈, 대자유를 누리시고 극락왕생 하시옵소서!
다시한번 충심으로 애도를 표합니다. 감사합니다.
불기 2547년(2003년) 4월 2일
문화관광부장관 이창동
<열반송涅槃頌>
스님께서 입적하시고 나서 사람들이 스님의 열반송을 물으면 어떻게 할까요?
“나는 그런 거 없다.”
그래도 한평생 사시고 남기실 말씀이 없습니까?
“할 말 없다.”
그래도 누가 물으면 뭐라고 답할까요?
“달리 할 말이 없다.
정 누가 물으면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
그게 내 열반송이다.”
<오도송>
계룡산 나한굴에서 나고 죽는 것이 없는 것을 깨달으셨다고 하는데
오도송을 읊으셨습니까?
“오도송인지 육도송인지 그런 거 없어.”
<사리>
“스님, 다비하고 사리가 나오면 어떻게 할까요?”
“사리는 대보살大菩薩이나 나오지, 나는 나오지도 않는다.
찾을 생각 말아라.”
<서암당 홍근 대종사 전국선원수좌회 葬 장의위원회 명단>
1.증명 : 법전 서옹 월하
2.고문 : 고송 석주 관응 범룡
(원로의원) 도원 종산 원명 도천 지종 성수 청화 활안 덕명 숭산
녹원 보성 이두 정천 천운 동춘 지관 원담 진제 지혜 초우 혜정
3.지도위원 : 법장 고산 월주 초우 정대 설정 지하 월서 무비 도영
4.호상 : 도천
5.장의위원장 : 지유
6.부위원장 : 고우 정광
7.장의위원 : (선원대표) 적명 일원 함주 상현 기성 무문 성우 현산 명정 현기 도선 무여 혜국 수경 도법 원융
인각 우송 광제 현봉 현묵 천진 성재 일오 지환 정태 정찬 일륜 철산 활성 범종 정호 도정 의정
밀행 명진 정묵 도오 정견 철인 지근 탄공 일수 지현 법진 종우 원담 철안 효광 영선 제우 영진
정경 지범 법륜
(본사주지) 정락 마근 현해 지명 진각 법정 자광 지성 법타 종상 세민 원정 성오 현문 혜승 평상
명공 명섭 현봉 도형 용주 법현 일면
(총무원·교육원·포교원 부장) 성관 현고 태인 탁연 미산 종열 정산 법선 일관
(종회의원) 지하 정휴 법등 장윤 중원 도후 영담 장주 청화 혜승 영배 진만 종광 자승 인행 정인
지홍 학담 원행 장곡 설송 정념 법안 법조 선광 보선 법보 향적 지만 지현 종훈 원택 현응 광조
도공 지욱 종삼 탄우 장적 원담 월우 도완 도각 정문 진구 무이 선각 지준 동광 지홍 법경 법광
원정 상운 성직 정호 법광 성월 일화 무자 정안 현공 토진 의연 도문 성국 혜림 보경 일문 효림
초격 수현 본각 도문 운달 계호 흥륜 경륜 정성 혜원 혜원
(비구니회) 광우 진관 혜명 명성 묘엄 법준 경순 태경 상륜 법운 대행 자민 묘전 혜운 지명 혜해
명수 지원 현묵 법희 수연 덕수 혜주 내목 창일 태구 보인 정훈 성법 연호 각림 보각 지환
자광 길상 성타 경희 정덕 정성 성우
백창기
8.집행위원장 : 원타
9.총도감 : 법연
10.도감 : 문수
11.병법 : 정훈 능효
12.의전 : 법웅 종성 원봉 등오
13.지빈 : 백담 진각 원운 각안 지공 정진 운제 보성 벽안 보광 원근 정경 일초
14.재무 : 성모 원연
15.홍보 : 지완 청수
16.섭외 : 지완
17.접수 : 청련 혜만 지호 관명 도설 덕산 혜원 원일
18.만장 : 각범 성각 원정 원근 혜륜
19.경호 : 원응 일장
20.영선 : 원오 김호건 이달균 김동일
21.다비장 : 원무 종승 경륜 보현사꽃꽂이회
22.주차통제 : 곡암 혜문 자각 현능 석운 정견 고웅 법여 법신 청거
23.다각 : 대원 해조 윤필암 정토회
24.시자 : 일통 도무 법구 본각 일범 영보
25.원주 : 우선
26.별좌 : 묘경 정행
27.후원 : 광륜 소능 본영 일해 고웅 덕행 혜근 보환 덕림 혜문 성문 무연 도신 일헌 청우 봉암사 신도회
■ 문도대표 : 서호
■ 은 상 좌 : 성진 서호 지정 청공 혜우 근수 범진 대공 혜진 혜수 범린 희정 희봉 범동 현진 고범 학림
■ 법 상 좌 : 두타
■ 손 상 좌 : 고우
■ 재가제자 : 강창구 벽담 성원 송관선 이상두 일우 지현 대행심 덕인월 덕인화
무궁화 불심행 비로행 선묘행 수현심 안심행 서암재가선우회 정토회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