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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선덕 고봉스님 13일 원적
조계종 제12교구 본사 해인사 선덕 고봉당 혜웅 대선사가 해인사 극락전에서 원적에 들었다. 세납 72세, 법납 55세.

스님은 3월 13일 정오에 해인사 극락전에서 문도들을 모아놓고 “서로 화합하여 중노릇 잘하라”고 당부한뒤 임종게를 수서하고 열반에 들었다.

일생동안 상을 버리려는 상 속에 살았는데
모든 상이 이제야 무너지는구나
서쪽에서 전한 조사의 도리를 누가 묻는다면
가야산 높은 봉은 칠불봉이라 하리라

고봉스님은 1931년 충주에서 출생하여 18세에 해인사에서 영월스님을 은사로 득도했으며, 인곡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스님은 해인사 선원장, 조계종 교무부장·중앙종회 의원 역임했다.

영결식은 15일 오전 10시 해인사 보경당에서 산중장(山中葬)으로 봉행되며, 다비장은 가야산 해인사 연화대이다. 해인사종무소 055) 931-1001~2.


* 고봉스님 행장

고봉스님은 1931년 10월 23일 충북 충주시 동량면 대전리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상호(相浩).

17세가 되던 1948년 홀연히 발심하여 가야산 해인사를 입산 출가하여 영월스님을 은사로, 인곡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 하였으며, 이때 스승으로부터 받은 법명은 혜웅(慧雄)이었다.

1950년 19세가 되던 해에 상월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하신 후 수년간 선원에서 정진했다.

1958년(27세) 해인사 강원에서 불조어록을 열람하고 대교과를 수료했으며, 이듬해인 1959년(28세)에는 가야산 환적대에서 목숨을 내놓고 용맹정진을 했다. 그 해 겨울 환적대에서 오도의 노래를 불렀다.

昨夜千萬毘盧峰(작야천만비로봉)
今覺一無太虛空(금각일무태허공)
無無無子亦無空(무무무자역무공)
幻寂臺下幻寂空(환적대하환적공)
어제 밤의 그 많던 비로봉들이
이제 깨고 보니 본래 빈자리네
무라, 무라 하는 무자도 또한 비었으니
환적대도 환적한 공이네.

1962년(31세) 응석사와 백흥암에서 일타스님 등과 함께 탁마장양하면서 수선수행에 일관했다.

1964년(33세)에는 포교일선에 뛰어들어 하양포교당에서 중생제도에 전념했으며 그 후 1971년(41세)에는 종회의원을 역임하고 1973년(43세)에는 총무원 교무부장 소임을 맡아 종단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1983년(52세)에는 해인총림 선원장의 소임을 맡아 선풍을 진작하고 후학을 제접했으며 또한 본분 납자로서의 정진원력은 수행자의 사표가 되었으므로 대중으로부터 존경과 흠모가 이어졌다.

이후 1985년(54세)부터는 해인사 극락전에 주석하며 선덕으로서 개인적 수행에 철저하였으며, 총림대중에게는 정신적 스승이 되었다.

2001년(70세) 8월에 팔공산 갓바위에서 조탑법문을 하시다 병환을 얻으시고 지리산 함소굴에서 요양하면서 문도들과 안거를 했다. 하루는 시자에게 전법을 하고 싶다고 하면서, 벽암록의 ‘벽암’ 두 글자를 써 보이고 상좌 지산에게 다음과 같이 법을 전하는 전법게를 내렸다.

碧水深處泥牛耕(벽수심처니우경)
巖刻古佛石人去(암각고불석인거)
푸른 물 깊은 곳에 진흙소가 밭갈고
바위에 새긴 고불이 돌사람 되어가네.


(다음은 현대불교신문에 실린 스님의 법문내용.)

* 고봉스님<해인사 선덕>

내가 태어난 곳은 충주에서도 한참 더 들어가는 벽지인데 어릴 때 스님구경이라고는 못했어요. 그런데 이웃에 사는 친구의 누님이 해인사로 출가를 했어요. 그 친구를 통해서 불교얘기랑 해인사얘기를 많이 듣게 됐지요. 해인사에는 도닦는 사람들이 가득하다고 했어요. 도인들은 한결같이 말도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데 딱 소리만 나면 먹을 것이 들어오고 또 딱 소리만 나면 먹을 것이 나간다고 해서 어린 마음에 신기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그 친구는 또 부처님일대기랑 6조 혜능스님 얘기도 들려줬어요. 그게 제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평소에도 막연하게나마 도 같은걸 한 번 닦아봤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친구의 말이 도화선이 되었지요. 자나깨나 해인사가 무릉도원처럼 다가왔습니다. 해인사는 어린 소년의 꿈이요, 이상향이 돼 버렸어요. 부모님한테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출가한다고 하니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습니다. 3년만 공부하고 돌아오겠다고 하니까 네가 도를 깨치면 이세상에 도 못깨칠 사람 없겠다며 허락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는수 없이 말도 않고 집을 나와 해인사로 향했습니다. 그때가 내 나이 18세되던 해였습니다.
대구를 거쳐 고령에 도착한 다음 해인사까지 걸어갔습니다.

마을사람들에게 도닦으러 해인사에 간다고 하니 주지스님을 찾으라고 해요. 그런데 마을사람들이 ‘스님’ ‘스님’하는데 불교용어를 잘 몰랐던 나의 귀에는 꼭 ‘神님’ ‘神님’하는 것으로 들렸습니다.

정화전이었던 당시 해인사에는 현당 등에 대처승들이 머물렀고, 가야총림으로 불리던 관음전과 퇴설당 그리고 선열당 등에는 비구승들이 살았습니다. 나는 가야총림에서 행자생활을 했습니다. 당시 해인사에는 방장 효봉스님을 비록 청담스님 구산스님 등 큰스님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퇴설당 너머로 언뜻 언뜻 보이는 큰스님들의 좌선하시는 모습은 그야말로 선풍도골의 풍모 그대로 였습니다.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발심이 될 때는 돌마루나 툇마루 혹은 우물가에 앉아서 큰스님들의 흉내를 내곤 했었지요.

당장이라도 도를 깨치고야 말겠다는 그 초발심이 지금까지의 수행생활의 밑받침이 되어 주었습니다. 요즈음 수행 납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도 초발심때의 마음을 항상 간직하라는 것입니다. 공부가 어느 단계에 이르게 되면 그것에 그냥 안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는 공부에 진척이 없으면 포기를 하거나 타성에 젖는 경우를 흔히 봅니다.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천산 암벽이라도 깰 것 같은 초발심때의 마음을 지속해야 합니다.

행자생활중에 염불을 익히라고 하는데 하기가 싫었습니다. 오로지 선방에 가고싶은 생각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스님노릇 제대로 하려면 염불도 알아야 된다고 해서 마지못해 염불도 배우고 강원에도 들어갔습니다. 강사스님께서 천수경을 가르쳐주며 외워오라고 하는데 금방 암기가 됐습니다. 반야심경을 하루만에 다 외워버리니 스님이 어디서 중노릇하다가 왔느냐고 묻더군요. 해인사에 오기전 고향에서 사서까지 익혔던 터라 문리는 어느정도 터져 있었습니다.

일제 암흑기를 막 벗어나 6·25전쟁을 치러야 했던 당시의 한국사회는 암담하고 배고프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스님들의 눈빛은 푸르고 성성하게 살아 있었습니다. 다른 잡생각이 생길 여지가 거의 없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옷한벌에 일단사 일표음의 두타행이 저절로 되던 시절,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마음은 넉넉했습니다.

기한발도심(飢寒發道心)이라고 했어요. 춥고 배고파야 발심이 된다는 얘깁니다. 문명이 발달하여 편리해질수록 도닦기 힘들어집니다. 다 해준다고 되는게 아닙니다.

절실해야 공부가 됩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야 화두가 타파되지요. 기본자세가 잘못되면 기름때묻은 공부, 남보기에 점잖은 공부밖에 안됩니다.

6·25전쟁당시 은사이신 영월스님과 함께 해인사를 떠나 양산 통도사, 언양 석남
사, 청도 운문사 등지를 전전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이 팔공산 파계사 성전암이었어요. 전쟁의 와중이었는데도 공부가 참 잘 됐어요. 거기서는 화두로 밥을 먹고 화두로 길을 걷고 화두로 잠을 자는 생활이 지속됐어요. 그냥 대충 후다닥 해치우는게 없었습니다. 매사에 화두가 살아있는 생활이 계속됐지요. 그러던 어느 날 가슴에 맺힌 것이 확 트이는데 모든 미운 감정들이 싹 없어져 버리는 겁니다.

계속 공부를 밀어붙였어야 되는데 전쟁이 끝나고 해인사로 돌아가 절살림을 맡는 바람에 공부를 제대로 끝까지 못한 것이 지금도 안타깝습니다.
백련암에서 약 1㎞ 떨어진 곳에 옛날 조선시대 한적스님께서 벽곡(벽穀·곡식대신 솔잎·밤 따위를 날것으로 조금씩 먹고 삶)하시며 수행하시던 장소가 있습니다. 그곳에 토굴을 짓고 2~3년간 살았습니다. 진주 응석사 토굴에서도 몇개월 산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1종식에 장좌불와를 하며 용맹정진을 했더랬습니다.
그때 느낀 것이 공부에는 자신의 의지가 제일 중요하다는 겁니다. 현실에 대한 집착을 그대로 두고는 발심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발심하려면 먼저 나라는 것을 버려야 됩니다. 내가 있음으로 명예가 있고, 돈이 있고, 여자가 있습니다.

나라는 근본무명 내지 착각을 벗어나 불성으로 안내하는 길잡이가 바로 화두입니다. 화두는 곧 생명체입니다. 화두를 드는 순간, 잡념망상이 다 떨어지는 순간은 살아있는 상태요, 화두를 놓치는 순간은 곧 무명속입니다. 현실에 집착하여 분별심을 일으킴은 곧 역경계에 걸리는 것이니 이는 무명입니다. 화두를 드는 순간은 이런 경계가 다 떨어져 버리니 화두는 곧 생명이요 광명이며 지혜고 문수입니다.

<금강경>의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타납니다.
약보살(若菩薩)이 심주어법(心住於法)하고 이행보시(而行布施)하면 여인(如人)이 입암(入闇)에 즉무소견(則無所見)이니라. 약보살(若菩薩)이 심불주법(心不住法)하고 이행보시(而行布施)하면 여인(如人)이 유목(有目)하고 일광(日光)이 명조(明照)하야 견(見) 종종색(種種色)이니라.

(만약에 보살의 마음이 법에 머물러 있으면서 보시를 행하면 마치 사람이 어둠속에 들어가 아무 것도 못보는 것과 같고, 만약에 보살의 마음이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행하면 마치 사람의 눈이 있고 햇빛이 밝게 비쳐 가지 가지의 색을 봄과 같으니라)

화두를 들고 놓는 것도 이와같아 화두를 들면 모든 것에 걸리지 않으니 광명이요 태양이지만 화두를 놓치면 곧 무명입니다. 화두가 순일하게 잘 이어지려면 나라는 생각에서 나오는 집착이 모두 떨어져야 합니다. 태풍이 불고 파도가 치는데 배를 띄워봐야 배는 파산하고 맙니다. 근본적으로 마음속에 있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다 떨어져야 합니다. 마음속의 바람이 가라 앉아야 화두를 들면 순식간에 쏙 몰입하게 됩니다.

이런 도리는 제가 공부를 해봐서 잘 압니다. 공부가 잘 안될 때는 반드시 세간사 어떤 일에 걸려 있어요. 그런게 남아 있으니까 공부가 안돼요. 그게 다 떨어진 순간이 바로 발심입니다.

은사이신 영월스님은 일평생 참선만 하신 분입니다. ‘참선공부만 하라’는게 스님의 평소 지론이셨습니다. 다른 것은 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늘 강조하셨어요. ‘죽어서 뭐 될래? 공부하라’는게 스님의 가르침이셨습니다. 책을 보고 경학을 공부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러한 스님의 참선수행 일변도의 외곬은 스님의 열반송에도 잘 나타나 있어 지금도 노상 외우고 있습니다.

八十人間事 猶如夢中夢
古路依舊然 山上白雲歸

한평생 사람일이 꿈속의 꿈이로다
변함없는 옛길따라 흰구름 돌아가네

내가 25세되던 무렵 희랑대에 경하노스님이 계셨습니다. 하루는 일어나다 현기증으로 쓰러지셨는데 척추를 다치는 바람에 거동을 못하시게 됐습니다. 노스님이 제 은사이신 영월스님한테 시봉을 부탁했는데 제가 그 소임을 맡게 됐어요.

노장님이 시봉을 받으시다 미안해서 안되겠다며 저더러 법상좌가 돼 달라고 해요.
그래야 마음의 부담이 줄어들 것 같다며 계속 부탁하시는 바람에 응낙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대소변 받는 일을 약 3년간 했습니다.

참으로 모든 일은 사소한 일 하나까지도 인연따라 일어나지 않는게 없고 내 마음이 지어내지 아니한 바가 없는 것 같습니다. 해탈을 하면 인(因)에도 걸리지 않고 과(果)에도 벗어날 수 있습니다만 그러한 경계에 도달하기까지는 일체의 현상이 다 내 마음작용이 씨가 되어 일어나며 인연과보에 응하여 발생합니다. 경하스님과의 인연을 통해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었습니다. 특별한 가르침이 있었다기 보다 시봉드는 일상생활을 통해서 인내와 하심하는 법을 체득할 수 있었습니다.

법문이란 공식석상에서만 전해지는게 아닙니다. 일상생활속에서 시시각각으로 다가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체가 다 나의 스승이요, 일체처가 다 법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하스님은 독성님(나반존자)과 인연이 깊은 분이셨습니다. 경하스님의 은사이신 우련스님이 상좌가 없어서 독성님에게 1주일간 기도를 했더랍니다. 기도를 시작한지 1주일 되던 날 초라한 행색의 한 젊은이가 올라오는데 스님이 되고자왔다고 해요. 시원찮아 보였는데 기도회향날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입산을 허락했다고 합니다. 그 젊은이가 바로 경하스님입니다. 경하스님은 당시로는 불치의 병으로 여겨지던 등창(종기)이 있어서 절에 들어 왔는데 어떻게나 신심이 깊던지 아주 신명나게 절도 하고 염불도 하고 그랬답니다.

어쨌든 경하스님이 들어오고 나서 절에 불공이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논도 사고 밭도 사고 부자가 됐어요. 하루는 경하스님이 꿈을 꾸었는데 웬 노인이 한뼘도 더 되는 커다란 침을 갖고 와서 한손으로 스님의 머리를 꽉 잡고는 “이놈, 꼼짝마라”하는 것이었답니다. 그러고는 침을 콱 찌르는데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잠을 깼답니다. 이날 이후로 등창이 다 나았다고 합니다. 독성님과의 인연으로 해인사에 오신 경하스님은 경학에도 능하고 전계도 받는 등 대법사가 되셨습니다. 해인사주지도 2번이나 하셨지요.

하루는 통영에서 49재가 들어왔는데 재주(齋主)가 여타 중진스님들을 제껴놓고 경하스님더러 49일간 법문을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사흘째 되던 날 백련암에 집채만한 호랑이가 나타나서는 포효를 하는 바람에 대중들이 재를 잘못 지냈는 줄 알고 겁을 집어먹고 크게 당황했어요.

경하스님이 대중들을 모아놓고 말씀하시기를 <화엄경>을 설하니까 산신(호랑이)이 신심이 나서 이러는 것이니 안심하라고 하셨습니다. 한 번은 호랑이가 스님앞에 오더니 넙죽 엎드렸습니다. 스님이 호랑이더러 저쪽으로 가라고 지시하니 바람처럼 사라졌다고 합니다. 호랑이는 49일내내 계속 와서 법문을 듣더니 재가 끝나자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답니다.

경하스님을 시봉하는 동안 많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호랑이도 감명시킬수 있는 신심을 가진 불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요? 지극한 불심앞에서는 미물이나 천지자연도 저절로 감응하게 마련입니다. 근본 마음자리에서는 시방세계 어느 한구석 통하지 않는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집착을 티끌도 남김없이 완전히 놓아 버리면 곧 우주심과 하나가 됩니다. 그때는 달리 삼매를 논의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모든 집착을 놓는 일은 아상을 버리는 데서 시작됩니다. 나라는 생각, 내것이라는 소유심이 팔만사천 번뇌를 만들어 내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망상을 가만히 살펴보면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되풀이하고 있어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빠져 있어요. 그렇게 보면 뛰어넘어야 할 장애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의 뿌리를 잘 다스리면 망상은 없어집니다. 거부함이 없이 망상의 실체를 반조하십시오.


* 고봉스님 <해인사 선덕>
“내 주장부터 먼저 버리자”

“한 마음 돌이키면 치우침 없어
불교 매개로 민족 동질성 회복”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할 때마다 우리나라에는 호국불교의 전통이 되살아나곤 했다. 불교가 국교였던 신라, 고려시대에는 말할 것도 없고 억불숭유의 조선시대에도 서산·사명 대사 같은 스님들이 승군을 조직해 나라를 도탄에서 구하는데 앞장섰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다시한번 나라를 위해 스러져간 호국영령들을 추모하면서 호국불교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해 본다. 12~14일 분단 50년만의 역사적인 남북정상의 만남으로 통일의 기운이 새롭게 싹트는 이때 호국불교의 의미와 정신에 대해 큰스님의 말씀을 청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고봉스님이 주석하시는 해인사는 세계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이 있는 곳. 호국불교의 표상과도 같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면서 오늘도 화엄법문을 토해내고 있는 팔만대장경은 ‘호국불교란 바로 이런것이야’라고 말하는 듯 하다. 방밖에서는 까치들이 싱그럽게 지저귀고 있는 가운데 기자를 따뜻하게 맞아 주신 고봉스님은 동안(童顔)의 미소를 띠시며 “마음을 비우고 민족성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호국불교로 가는 바른 길임을 강조하셨다.

─우리나라에는 호국불교의 전통이 면면히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특히 불교는 우리나라의 국가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무학대사는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했고 도선스님은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하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역사의 대전환기에 이러한 스님들이 계셨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라고 할 수만은 없을 것 같은데요, 이같은 독특한 현상의 원인 내지 배경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불교경전이나 <한단고기(=환단고기)>와 같은 우리나라의 고대사서를 보면 그에 관한 힌트를 얻을수 있습니다. 경전에 보면 제석천에 석제환인이라는 임금이 있어 불교를 수호하고 널리 전파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런데 <한단고기>에 보면 7명의 환인과 18명의 환웅 그리고 47명의 단군이 있어 대를 이어 고조선을 다스렸다고 나오는데 7명의 환인중에 석제임환인이 있어 불경에 나오는 석제환인과 일치함을 알수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나라는 건국에서부터 불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환웅이 중생들을 다스리기 위해 하늘에서 가져왔다는 삼부인(三符印)에 보면 교화이제로 성통광명(性通光明)과 홍익인간(弘益人間)을 들고 있습니다. 이는 불교의 견성성불(見性成佛)과 요익중생(饒益衆生)과 같은 의미입니다. 단군의 단(檀)이란 말에는 베풀고 산다는 의미가 있으며 보시바라밀을 원음으로 단바라밀이라고 합니다. 단군시대의 수련법을 국선도라고 하는데 신라시대에는 불교와 접목되어 화랑도로 거듭나게 됩니다. 국선도의 단전호흡법은 불교의 수식관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많습니다. 불교에서는 수식관에 부정관 인연관 자비관 계분별관을 더해 오정심관(五停心觀)이라 합니다.

─12일 분단50년만에 첫 남북정상회담이 평양에서 열렸습니다. 그동안 수차례나 무산되었던 남북정상회담이 새천년에 들어서자마자 성사됨으로써 통일조국의 여명이 밝아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전망도 나오고 있습니다. 통일조국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우리 불교가 지향해야 할 방향과 불자의 역할은 무엇인지요.

▲반야사상, 공(空)사상으로 되돌아 가야합니다. 우리 앞에 5개의 찻잔이 있다고 합시다. 가운데 있는 것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하나씩 있는데 가운데 것이 서쪽 것에 대해서는 동쪽에 위치하지만 동쪽 것에 대해서는 서쪽에 위치합니다. 자기 위치란 것은 모두 상대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자기 위치나 주장을 내세우지 않는 것이 불교입니다. 남쪽이다 북쪽이다 경상도다 전라도다 내세우지 말고 무아(無我)의 사상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남더러 버려라 하기전에 내가 먼저 내 주장을 버리면 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민족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어떤 새는 자기가 낳은 알을 직접 부화하지 않고 다른 새의 둥지에 몰래 갖다 놓는다고 해요 그 알이 부화하면서 다른 새의 알을 밀어내어 죽이는 경우가 허다해요. 주객이 전도되는 셈이지요. 지금 우리 국민이 그 지경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최근 들어 우리는 우리 조상을 부정하는 경우를 종종 목격합니다.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단군신화를 가짜로 매도하면서 교정에 모셔놓은 단군성상을 훼손하고 있습니다. 비록 동상에 불과하지만 자기 조상의 목을 베는 후손이 어디 있습니까? 환부역조(換父逆祖)하는데 나라가 잘될 리 있겠습니까? 민족성과 역사를 되찾는 것이야말로 호국불교입니다.

─임진왜란때에는 스님들도 창과 칼을 들고 분연히 일어서 나라를 구했습니다. 그러한 행위가 불살생의 계를 범했다는 비판도 없지 않습니다. 이같은 논의는 오늘날 참여 對 순수불교의 논쟁과도 관련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스님들은 수행에만 전념해야 하는지 아니면 경우에 따라 사회참여를 해야하는지 그 경계점이 자못 궁금합니다.

▲<초발심자경문>에 보면 계는 개차법(開遮法)으로 지켜야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 한 마리가 나뭇꾼을 지나쳐 갔습니다. 잠시후 사냥꾼이 나타나서 나뭇꾼에게 사슴이 도망친곳을 묻자 나뭇꾼은 엉뚱한 방향을 가리켜 주었습니다. 나뭇꾼은 비록 불망어계를 범했지만 살생계를 지켰으니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 경우라 하겠습니다. 하나는 열고 다른 하나는 막은 것이라서 개차법이라 합니다. 이러한 개차법으로 스님들이 창과 칼을 들고 일어선 것입니다. 의로운 다수의 생명과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의롭지 못한 자들을 징벌하는데 나선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는 호국불교외에 화두선(간화선)과 대승불교의 전통이 있습니다. 이들은 서로간에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앞에서 개차법을 얘기했습니다만 불교는 엄격하면서도 폭이 넓습니다. 스님들이 창과 칼을 든 것은 대승불교 차원에서 가능합니다. 부처님 재세시에 두명의 수행자가 있었는데 한 여인이 시봉을 했습니다. 어느날 한 수행자가 출타하자 여인은 다른 수행자를 유혹해서 파계시켰습니다. 수행자가 돌아와보니 도반이 여인때문에 파계한지라 홧김에 칼로 그 여인을 죽여버리고 맙니다.

음행과 살인을 저지른 두 수행자는 곧 후회하며 통곡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두 수행자는 부처님 제자중 계율제일로 소문난 우바리존자를 찾아가 참회할 길을 물었으나 우바리존자는 “참회가 불가능하며 아무리 수행해도 성불하지 못할것”이라고 했어요. 마침 유마거사가 지나가다가 이 사실을 듣고는 “한마음 돌이켜 참회하고 수행하면 성불할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두 수행자는 진심으로 참회하고 정진을 거듭하여 훗날 아라한과를 증득했어요. 이것이 대승불교입니다. 일체유심(一切唯心)이요, 만법유식(萬法唯識)이라는 관점에서 한마음 돌이킬 것을 강조합니다. 우리나라의 간화선(화두선)도 불립문자요 교외별전이며 직지인심하여 견성성불할 것을 주장합니다. 곧 바로 마음을 가리켜 부처 이룰 것을 강조하니 호국불교와 대승불교, 간화선이 각각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로 통하여 돌아간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호국불교의 얼과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대표적인 문화재입니다. 팔만대장경이 조성된 배경에 알려지지 않은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장경판전에는 대장경판을 봉안하고 있는 수다라전과 법보전외에 동서사간전이 있는데 거기에 있는 사간판이 팔만대장경판 보다 먼저 만들어졌습니다. 그 사간판에 보면 팔만대장경이 만들어진 경위에 관한 얘기가 실려 있습니다. 해인사 아래 합천에 이거인(李居仁)이라는 거사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길을 가다가 눈이 셋 달린 개 한 마리를 만났는데 집까지 따라와서는 나갈려고 하질 않아요. 3년을 키우면서 정이 들었는지 주인이 출타할 때는 10리까지 따라나오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 개가 갑자기 죽어버렸는데 이거사는 마치 가족이 죽은 것처럼 관에 넣어 묘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1년후에 이거사도 죽게 되었습니다. 염라국의 어느 궁궐에 도달하니 가운데에 우두머리인듯한 자가 앉아 있는데 눈이 3개였어요. 그 우두머리가 버선발로 내려오면서 “주인님 어떻게 오셨습니까? 제가 원래 염라국 사람으로 죄를 지어 3년동안 개로 태어나게 되었는데 주인님을 만나 잘 대접받으며 살다 왔습니다.”고 말해요. 이 우두머리가 바로 3목구왕(三目狗王)입니다.

“그런데 왜 이리 일찍 오셨습니까? 내일 염라대왕님을 만나게 되면 하계에서 팔만대장경을 만들다가 왔다고 하십시오. 그러면 다시 돌아가실수 있을 겁니다”염라대왕을 만난 이거사가 삼목구왕이 시키는대로 하자 염라대왕이 “어서 돌아가셔서 경판을 완성하고 오십시오.”이거사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그 엄청난 일을 내가 어떻게 해낸단 말인가?” 삼목구왕은 “아무 걱정마시고 제가 시키는 대로만 하십시오. 내려 가시거든 권선문을 만들어서 합천군수한테 도장을 받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길이 보일 것입니다.”깨어보니 꿈이었지요. 꿈이 괴이했으나 하도 생생한지라 이거사는 권선문을 만들어서 합천군수를 찾아갔어요. 합천군수도 염부에서 시키는 일이라고 하는 말에 도장을 찍어 주었습니다.

그때 고려국의 공주가 병이 나서 미친 듯이 소리지르며 대장경 화주만 찾는 것이었습니다. 합천까지 소문이 퍼져 이거사가 궁궐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거사를 보자마자 공주의 병은 거짓말처럼 나았어요. 공주의 강력한 건의로 사간판의 제작이 시작되었고 후일 외적의 침입을 물리칠 팔만대장경판을 제작하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합니다.

즉 부처님의 법력으로 나라를 구하겠다는 굳센 발원과 믿음이 호국불교의 발로인 것입니다. 나라 전체가 한마음이 되어 불법과 부처님의 위신력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컸으면 경판으로 외적을 물리칠 생각을 하겠습니까? 불법에 대한 믿음과 부처님가피에 대한 믿음이 이처럼 철두철미해야 불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팔만대장경은 호국불교의 결정체입니다.

─최근 경제사정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과소비 풍조는 늘고 있고 사회기강은 점점 해이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불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신지요?

▲사람이 몸 관리를 잘못하면 병이 들 듯이 우리 민족은 현재 병들어 있는 상태란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남북이 분단되고 국론이 분열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치료방법이 따로 없습니다. 몸이 극도로 쇠약할때는 수혈을 해야합니다. 혈액형에 따라서 수혈되는 것이 있고 안되는 것이 있듯이 우리 민족이 다시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해야 하는데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할려면 불교가 제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민족의 피속에는 불교의 정신과 사상이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봐도 불교가 흥할 때는 나라가 융성했고 불교가 쇠퇴할 때는 나라가 어려웠습니다.

지금은 모든것이 새롭게 변화하는 시기입니다. 이러한 시기에는 비울수 있는 종교, 자리이타(自利利他)할 수 있는 수행법만이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불야타 조야타’라, 부처도 버리고 조사도 버리며 살불살조(殺佛殺祖)하는데까지 나아갈 수 있는 방편이라야 합니다. 남을 지배하고 나를 따르도록 해서는 조화와 평화가 오지 않습니다. 이제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습니다. 마음비우고 욕심을 버리면 욕심낸 것 보다 더 잘됩니다. 욕심내면 잘될 것 같지만 안됩니다. 진실로 참회하고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열심히 하다보면 묘하게 이뤄집니다. 하다말다 하면 안되고 성실하게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남한테 베풀어 주는 것을 잘하되 가진대로 분수껏 하면 됩니다. 불교적 처세법으로는 사섭법을 들수 있는데 보시 애어 이행 동사섭, 이것만이라도 생활에서 열심히 실천해 보세요.

─재가불자들이 생활속에서 수련할수 있는 방편을 일러주십시오.

▲중도(中道)로 나아가야 합니다. 마음을 여유롭게, 어느 한곳에 치우치지 않도록 유지하는 것이 좋습니다. 자기 자신을 가두는 틀을 만들지 말고 순리에 따르는 생활이 필요해요. 욕심을 놓고 근심걱정도 다 놓으세요. 나는 아침예불을 올리고 나서 금강경을 1독하고 좌선시간을 가진 다음 하루일과를 시작합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들이고 수련을 규칙적으로 하기만 해도 건강을 유지할 수 있을뿐만 아니라 생활에 중심을 세울수 있다고 봅니다. 저녁 늦도록 술마시고 들어와서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허겁지겁 출근해서야 늘 쫓기는 삶을 살 수밖에 없지요. 수행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김원우 기자 | wwkim@buddhapia.com |
2003-03-13 오후 5:04:00
 
한마디
색즉시공 공즉시색! 하양포교당 시절 스님으로부터 수계받고 불명받고도 세속에 사느라 찾아뵙지도 못하고 수십년을 지내다 입적하시기 며칠전 해인사 극락전에 스님을 뵈오니 말씀도 못하시고 거동도 못하시고 떠나올 때 웃으시며 손 잡아주시던 그 모습에 가슴아려했는데 다시 찾아뵙기 전에 열반에 드시니 천상 다음생에 만나뵈야 겠군요. 아미타불! 극락왕생하시길...
(2003-03-24 오후 3:53:11)
10
무너진 상 속 그 곳은 어디입니까? 가야산 칠불봉은 고봉이 되었군요.
(2003-03-13 오후 11:3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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