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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초 은사 트룽파 린포체를 만난 페마 스님은 74년 37세에 칼마파 스님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았으나, 처음 3년간은 머리를 깍지 않았다. 낮에는 평상복을 입고 샌프란시스코의 학교에 나가 가르치고, 오후에는 아이들이 살고 있는 아빠 집으로 가서 아이들을 보살폈으며, 밤에는 불교센터에 돌아와 가사를 입고 사원의 업무를 보았다. 아이들이 각각 18, 20세가 되었을 때 페마 스님은 비로소 콜로라도 주 볼더 시의 샴발라센터 원장 자리를 맡아 사원에 머물며 수행과 포교에만 전념하게 된다.
샴발라센터에서 페마 스님은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미국 대중의 마음에 가닿는 설법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는다. 샴발라 명상 뿐만 아니라 불교정신이 배어있는 다도, 꽃꽂이 등 불교문화도 가르쳤다. 이는 스승이 종교라는 틀에 매이지 않고도 참된 불자를 키울 수 있도록 고안한 프로그램이었다.
샴발라 교육은 밀교 경전에 트룽파 린포체의 설명을 곁들인 5단계의 교육과정으로 만들어졌다. 그 과정을 마치면 사회에 만연한 지배의 정치학, 권위주의적 인간관계에 종지부를 찍고 명료함, 온화함, 사랑, 건강한 정신을 키워 불국토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트룽파 린포체는 ‘인간은 원래 선하다. 이 세상은 성스럽다. 전통 종교는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삼발라 교육의 신념을 그의 저서 <샴발라: 영적 전사의 성스러운 길(Shambhala: The Sacred Path of the Warrior)>에 자세히 밝히고 있다.
샴발라교육 이념에 따라 1974년 설립된 나로파불교대학 역시 다양한 과목을 개설하고 있다. 유명한 비트 문인 앨런 긴즈버그, 심층 생태학자 그레고리 베잇슨, 하버드 교수였다가 구루(요가의 스승)가 된 램 다스 등 뛰어난 강사진들이 명상, 기공, 탱화, 다도, 티베트어, 산스크리트, 중관철학, 심리학 등을 가르치고 밤에는 시낭송회, 공연, 세미나 등을 열기도 했다. 이러한 열린 도량은 ‘정신의 우드스탁 축제’라고 불릴 정도로 인기를 끌었으며, 23년이 지난 후 나로파불교대학은 정식대학 인가를 받아 학사 및 석사학위를 수여할 정도로 성장했다.
비트 문인들이 대거 참여한 나로파 문학프로그램은 늘 성황을 이뤘다. 나로파의 석사학위는 불교학, 글쓰기, 노인학, 참여불교, 명상심리치료학 등 다섯 분야에 주어진다. 나로파의 학생들은 전원 명상을 해야 한다. 아울러 인근의 병원, 양로원, 말기환자 보호소 등에서 실습하며 학점을 따도록 해 불교를 현장의 삶에 적용하는 교육을 병행하고 있다.
불교를 공부하는 학인들의 내면에 자비심을 일깨우고 실천력을 키워주는 이러한 샴발라 교육은 대승불교의 꽃인 티베트 불교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페마 스님은 개인과 사회의 변화를 위해 이론과 실천을 하나로 묶어주는 이러한 명상중심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 문화에 티베트 불교 붐을 조성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서구인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던 어려운 불교용어와 교리들을 쉽고 이해할 수 있도록 영어로 번역했던 트룽파 린포체. ‘티베트 불교가 서양을 위해 특별히 마련한 선물’이란 찬사를 받은 트룽파 린포체의 가르침에 따라 전법에 나서고 있는 페마 스님은 이제 천년을 이어 온 전통의 미래가 티베트 밖에 놓여있음을 느꼈다. 이런 확신을 준 스승에 대한 페마 스님의 회고다.
“나의 현재 상태와 수행 문제의 해결 방법을 스승님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전혀 예기치 않은 곳에서 전혀 예기치 않은 시간에 스승이 내게 툭툭 던진 한 마디는 내 앞에 가로놓인 장막을 걷어주었고, 내가 갇힌 감옥의 빗장을 부수어 주었지요.”(<샴발라 선> 인터뷰 중에서)
제자이든 아니든 관계없이 수많은 이들에게 명의와 명선생 역할을 했던 트룽파 린포체로부터 페마 스님이 받은 가장 큰 가르침은 무엇이었을까?
“스승께서는 가끔 복도에서 나를 불러세우고 난데없이 말씀하시곤 했지요. ‘너무 종교적이 되지는 마라. 지나치게 종교인인 척도 말고.’ 처음에는 이 말이 참 모욕적으로 들렸지요. 그러나 그 말씀은 내가 풀어야 할 화두처럼 되어버렸지요. 그리고 마침내 그 법문의 뜻이 분명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