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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기조강연에 나선 전국선원장회의 회장 혜국 스님(제주 남국선원장)은 “간화선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간화선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일부 수좌들과 학자들의 수용상의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간화선 수행현실에 대해 경책하고 탁마하는 이러한 자리를 통해 수행풍토가 바르게 자리잡히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혜국 스님은 “간화선이 '뜬구름 잡는것' '어렵다'는 등의 비판은 간화선을 깊이있게 천착하지 않은 데서 나온 단견”이라며 “간화선은 가장 잘 갖춰진 수행체계로 제대로 발심해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일 뿐이며 간화선이 흔들리면 한국불교가 흔들리게 된다”고 강조했다.
혜국 스님은 “근래에 검증도 거치지 않은, 애종심에서 나왔다고 볼 수 없는 이야기들이 언론지상에 대서특필되는 경향이 있다. 조계종지를 훼손하는 이러한 일이 없기를 간곡히 당부드린다”고 덧붙였다.
이어 초기불전연구원 각묵 스님은 발제를 통해 한국 간화선의 힌두화와 화두 수행을 지도해줄 스승의 부재 등을 문제로 제기하며 간화선 수행풍토를 비판했다. 각묵 스님은 “한국 간화선은 불성, 여래장, 참나 등 힌두이즘적 개념인 아트만(자아)이라는 대상을 세우고 그것과 하나되는 수행으로 전락해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각묵 스님은 “간화선의 권위의 원천인 '인가'(점검)해줄 스승이 없는 점도 한국 간화선의 슬픈 현실”이라며 “이는 인가의 법맥이 이미 끊어졌기 때문으로 이제 간화선의 권위를 인가가 아닌 다른 것에서 찾는 수 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대표 토론에 나선 보조사상연구원 인경 스님은 “소수 수좌들의 잘못된 간화선 참구는 인정할 수 있지만, 간화선이 힌두이즘적이라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화두의 본질은 문제의식과 의심이고, 자기불안에 대한 궁극적 해결이며 의심이 없으면 깨달음과 직관도 없다”며 반박했다. 그러나 인경 스님은 간화선이 최상승 수행법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도 수행자의 경전이해, 사회참여 문제 등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데에는 공감했다.
사회자인 미산 스님(백양사 참사람수행원장)은 “매회 90여 선원에서 2천여 수좌들이 정진하는 구도열은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집결된 수행력을 보여준다”며 “교육체계 확립 등 방향성만 잡아주면 한국불교의 잠재력은 무한하다”고 말했다.
참석 수좌들은 특히 인가 문제와 관련, “한국 불교사에 존재했던 큰스님들의 깨침을 완전히 부인하는 발언은 매우 위험하다”고 각묵 스님의 발제를 비판했으나, “수행정도를 세세하게 지도하고 점검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는데 대체로 의견을 같이했다.
■제7회 선우논강 : 간화선-위빠사나 무엇이 같고 다른가
최근 수행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남방불교의 위빠사나와 북방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인 간화선과의 비교와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이는 상호 갈등을 유발하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근래의 위빠사나 수행 붐과 간화선 위기론이 맞물리면서 더욱 주목을 끌고 있다. 이런 가운데 2월 25일 전북 남원 실상사에서 열린 선우논강(대표 철오) 주최 ‘간화선과 위빠사나, 무엇이 같고 다른가’ 주제의 논강은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다.<편집자 주>
■간화선 자체 보다 ‘발심’을 문제삼자
전국선원장회의 회장 혜국 스님 기조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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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화선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간화선을 받아들이는 현실과 수행풍토가 문제일 뿐이다. 간화선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일부 수좌들과 학자들의 수용상의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간화선 수행현실에 대해 경책하고 탁마하는 이러한 자리를 통해 우리 수행풍토가 바르게 자리잡히길 기대한다.
간화선은 대혜종고 스님으로부터 주창된 것이 아니다. 이미 부처님께서 수제자인 가섭(迦葉) 존자에게 세 곳에서 불교의 진수를 전했다는 삼처전심(三處傳心), 즉 ‘다자탑전 분반좌(多子塔前 分半座)’, ‘염화미소(拈化微笑)’, ‘곽시쌍부(槨示雙趺)’의 교외별전의 고사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 세 가지 사건은 선(禪)의 유래가 되었기에, 화두법은 부처님께서 설한 연기법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대혜종고 스님 이전, 300여년전에 조주 스님은 이미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무(無)’, ‘판치생모(板齒生毛)’ 등의 화두를 말씀하셨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 성주산문(聖住山門)의 개조(開祖)인 무염(無染) 선사가 화두법으로 제접한 실례가 나와있다. 대혜종고 스님이 공안을 문자화, 구체화 시킨 것은 이미 간화선이 죽어가는 시작임을 반증한다.
간화선은 눈에 보이는 모든 대상을 상(相)으로 본다. 한 생각 일어나는 순간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 18계 전체를 ‘상’이나 환영으로 보는 것이다. ‘언어도단(言語道斷) 심행처멸(心行處滅)’이 화두다. 아예 꽉 막혀 모를 뿐이니, 뜬구름 잡는 것 같고, 어렵다. 그래서 간화선에 애정을 가진 스승들은 노파심으로 제자들의 지도했다. 하나같이 ‘20~30대에 깨닫지 못하면 내 목을 베라’, ‘제자가 깨닫지 못한다면 대신 지옥에 가겠다’고 공언한 것이다.
물리학에서 아인슈타인은 에너지가 바로 질량이라는 E=mC제곱의 원리를 밝혔다. 하지만 상대성이론은 역시 일반인들에겐 이해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마찬가지로 도(道) 역시, 설명이 쉽지 않다. 진리가 말과 글로 자세히 설명됐다면 오늘과 같은 세계적인 갈등이나 위기는 초래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간화선의 위기는 세계적인 문명위기의 하나이다.
불성, 진여, 여래장, 본래면목이니 뭐라 해도 그것은 존재의 개념이 아니다. 무아, 진여, 불성은 언어와 개념 이전의 세계를 표현하는데 말을 빌렸을 뿐이다.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표현했을 뿐이다. 나와 대상이 함께 없어지는데 그 무엇이 붙을 자리가 없다. 간화선의 견성은 일체의 대상을 떠난 철저한 자기 체험이다. 깨달음은 이해 보다는 체험, 즉 자기 경험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수행풍토는 이해가 우선시 된다. 먼저 믿음이 서지 않은 것이 문제다.
한국불교의 정체성은 간화선이다. 우리 불교의 저력인 간화선마저 부정한다면 한국불교는 아무 것도 남는게 없다. 좀더 검증과 토론을 거친 후 안으로 성숙되어가는 노력이 강구돼야 한다. 우리의 화두 참선법으로 세계 어느 나라보다 많은 도인이 나왔다. 세계에 내놓을만한 수승한 참선법은 간화선이다. 간화선 자체에 대한 문제 제기를 남발하지 말 것을 당부드린다.
발심(發心)이란 것은 ‘내가’ 문제다. 나는 괜찮은데, 남이 문제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조사어록이나 경전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하면 중노릇 잘할 지를 생각해야 한다. 간화선에 대한 비판도 그것이 얼마나 애종심에서 나온 것인지를 되돌아보아야 한다.
진리는 새로 이뤄가는게 아니다. 허공이 완전무결한 것처럼 진리도 완전하다. 허공이 언제나 우리를 감싸고 있는 것처럼 내 마음이 눈뜨면 진리도 바로 내 것이다. 진리는 말을 붙일 수 없는 자리다. 최상승선은 말이 끊어진 자리다.
한 생각 일어나는 즉시 대상이 망념임을 알아차려 본래 공임을 보며, 나아가 보는 놈까지 바로 없어지는 단계가 견성(見性)이다. 이는 봄이 없이 보는 것이며 무아를 꿰뚫어 봄과 다름 없는 것이다. 주관과 객관을 넘어선, 말길이 끊어진 화두의 세계를 사량분별의 세계로 끌어내린 게 문제이다. 간화선 자체보다는 발심을 문제 삼아야 한다.
■각묵 스님(초기불전연구원) 발제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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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수행법은 모두 ‘챙김’(마음챙김)을 중시한다. 간화선의 핵심은 화두를 끊임없이 챙겨 의정을 일으킬 것을 강조한다. 위빠사나 역시 몸, 느낌, 마음, 법 등의 명상주제를 끊임없이 챙길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챙김에 바탕한 간화선과 위빠사나는 견성(見性)과 해탈(解脫)로 승화되어 귀결되는 점에서 일치한다. 간화선의 견성은 일체의 상(相)을 여읜 본자청정한 성품을 체득하는 것으로 개오(開悟)나 돈오(頓悟)라고도 한다. 위빠사나 역시 무상(無常), 괴로움, 무아(無我)를 통찰해 지혜를 얻으면 해탈을 얻는다. 간화선과 위빠사나는 모두 오랜 수행기간이 필요하지만 깨닫는 순간은 즉각적으로 이뤄진다는 점에서 ‘돈오’라는 입장도 공유하고 있다.
간화선 수행의 필수요소인 대신심(大信心) 대분심(大憤心) 대의정(大疑情)과 위빠사나의 오근/오력(信, 精進, 念, 定, 慧)은 동일하다. 대신심, 대분심, 대위정은 자성청정심과 선지식을 신뢰하는 심리현상(信), 분발하는 심리현상(精進), 화두를 챙기는 심리현상(念), 고요함(定), 분별경계를 뛰어넘는 심리현상(慧) 등에 해당한다.
또 간화선과 위빠사나는 모두 선정보다 지혜를 중시한다. 간화선이 견성과 화두 챙김을 중시하는 이유는 선정의 고요함에 함몰하기 보다는 지혜로서 돈오견성할 것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위빠사나도 사마타의 적정처에 머물지 않고 온갖 물질과 마음의 현상이 무상, 고, 무아임을 통찰해 해탈을 실현하는 가르침이다.
북-남방 수행법을 대표하는 간화선과 위빠사나는 이러한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차이점을 갖고 있다.
간화선에서는 견성의 도구로 화두참구를 들고 있고, 위빠사나에서는 해탈의 방법으로 법(法)을 통찰하라고 가르친다. 여기서 화두는 고정된 대상이고, 법은 변화하는 대상이란 것도 차이점이다. 간화선에서는 화두 참구를 통해서 언로와 심로가 끊어져 주와 객, 마음과 대상을 초월한 성(性)을 즉각적으로 볼 것을 다그친다. 반면, 위빠사나에서는 법을 매순간 무상, 고, 무아로 꿰뚫어 궁극에는 공하고 모양을 여의었고, 일체 의도가 끊어진 해탈을 성취할 것을 가르친다. 화두 참구는 직관에 근거하고 위빠사나는 분석에 바탕한다. 견성을 주창하는 간화선은 교학을 무시하고, 대신에 선지식의 인가를 중시한다. 한편 해탈을 중시하는 위빠사나는 아비담마(논장)에 대한 정확한 분석지를 중시하며, 인가 대신에 법의 정확한 이해를 강조한다.
■인경 스님(선상담연구원)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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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담마에 기초한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법의 존재를 전제하여 성립한다. 그리고 아비담마의 법체계를 충실하게 구현, 내증하는 수행이론이다. 그러나 아비담마가 ‘인무아설’에 기초한다면, 대승 중관(中觀)의 입장은 법의 자성을 부정하는 ‘법무아’의 입장에 서 있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동일하지만 전혀 다른 내용을 함축한다. 따라서 수행으로 얻어진 반야의 내용도 서로 다르다. 무상, 고, 무아라는 위빠사나의 중심된 아비담마의 개념을 대승에서는 방편 가운데 하나로 보지, 그것을 결코 궁극적인 실재라고 보지 않는다. 즉 초기불교의 무상, 고, 무아는 또 다른 집착이고 관념이며 희론일 뿐이다. 그것들은 연기공에 대한 철저한 자각으로서 법무아에 대한 통찰이 없는 소승의 반야이다.
위빠사나와 간화선에서 반야(般若)라는 용어를 공동으로 사용하지만, 그 내용은 전혀 다르다. 아비담마에서 반야는 사물의 본성으로서 법을 통찰하는 것이라면, 간화선의 반야는 일체의 분별을 초탈한 연기공의 이법을 체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간화선은 개별적인 법에 대한 분석이나, 법체계에 대한 순차적인 절차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 법은 개별적인 ‘자기의 성품(自性)’이 결여된 연기일 뿐이다. 이 연기법은 여래께서 세상에 나오시거나 나오지 않거나 관계없이, 존재하는 그대로의 법계이다. 모든 법은 하나로 귀결되며, 각각의 법은 모두 ‘한 맛(一味相)’으로서, 그 자체로 공성(空性)이다. 이것은 오직 직관, 돈오에 의해서 인식된 중도이다. 여기서 아비담마적인 분석적 접근은 오히려 적절하지 못하다.
실천적인 측면에서는 위빠사나가 대상을 인정하고 그것과 하나됨을 추구함으로써 번뇌를 극복하려는 입장에 있다면 간화선은 대상관계를 배제하고 견성을 강조한 점, 번뇌 자체를 부정한 점에서 차이가 있다. 전자가 긍정의 길이라면 후자는 부정의 길이다. 그러나 양자는 서로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 간화선 위주의 한국불교는 수행문화의 다양성과 창조적인 긴장을 위해서라도 초기불교의 수행이론을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논강의 쟁점
제7회 선우논강에서 참석자들은 간화선이 최상승의 수행법이라는데 동감하면서도 간화선 교육체계와 발심 부재의 수행풍토에 대해서는 개선의 여지가 있다는데 한 목소리를 냈다.
가장 첨예한 논란을 불러온 선지식 부재와 인가 문제와 관련, 각묵 스님은 “간화선의 권위의 원천인 '인가'(점검)해줄 스승이 없는 점이 한국 간화선의 슬픈 현실”이라며 “이는 인가의 법맥이 이미 끊어졌기 때문으로 이제 간화선의 권위를 인가가 아닌 다른 것에서 찾는 수 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참석 수좌들은 “한국 불교사에 존재했던 큰스님들의 깨침을 완전히 부인하는 발언은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매우 위험한 발언이다”며 거세게 반발했다.
금강경 결제에 이어 각묵 스님이 제기한 간화선의 힌두화 문제도 논쟁을 야기했다. 각묵 스님은 “한국 간화선은 불성, 여래장, 참나 등 힌두이즘적 개념인 아트만(자아)이라는 대상을 세우고 그것과 하나되는 수행으로 전락해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인경 스님은 “소수 수좌들의 잘못된 간화선 참구는 인정할 수 있지만, 간화선이 힌두이즘적이라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미공 스님도 “성품, 불성, 여래장 등을 아트만으로 파악하는 수좌는 극소수에 불과하다며, 그런 수행자가 있다면 그것은 체계적인 선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참석자들은 간화선 교육체계의 확립과 수행정도를 세세하게 지도, 점검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는데는 대체로 의견을 같이했다. 논강의 사회자인 미산 스님(백양사 참사람수행원장)은 “매회 90여 선원에서 2천여 수좌들이 정진하는 구도열은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집결된 수행력을 보여준다”며 “교육체계 확립 등 방향성만 잡아주면 한국불교의 잠재력은 무한하다”고 말했다. 미얀마에서 위빠사나를 수행했다는 한 스님은 강원에서 조사선과 함께 4제, 8정도, 37조도품 등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함께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오늘과 같은 간화선에 대한 다양한 문제제기는 수행풍토의 원천인 개인의 발심 부재에서 기인한다는 고언도 나왔다. 혜국 스님은 “간화선이 '뜬구름 잡는것' '어렵다'는 등의 비판은 간화선을 깊이있게 천착하지 않은 데서 나온 단견”이라며 “간화선은 가장 잘 갖춰진 수행체계로 제대로 발심해 실천하면 된다”고 강조했다. 한 수좌는 “성철 스님에게 왜 화두가 안들리느냐고 여쭈었더니, ‘네가 공부 안하니까 발심이 안돼지’ 라고 하셨다”며, 먼저 목숨을 걸고 공부한 후, 간화선에 대해 고언(苦言)하라고 말했다.
논강의 막바지는 간화선의 사회적 회향으로 귀결됐다. 실상사 주지 도법 스님은 비폭력 평화운동의 종가인 불교가 세계적인 전쟁위기에도 불구하고 침묵을 지키는 현실을 꼬집고, “구도심과 보현행은 일치돼야 한다며 간화선의 사회적 역할 증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미산 스님은 한국불교도 서양의 불교처럼 수행불교, 참여불교, 생활불교로 나아가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