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8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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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의 눈꽃처럼 아름답게 회향한 인허스님
월정사 회주 인허당 택호선사 입적

월정사 회주 인허스님이 오대산에 휘날리는 눈꽃처럼 아름답게 회향했다.
80평생 주지등 소임을 맡지 않고, 평 대중으로 하루 16시간씩 간경과 기도의 수행으로 일관해온 오대산 월정사 회주 인허당 택호(宅豪)선사. 한국불교의 큰 산맥인 한암(조계종 초대종정) 탄허(대강백) 스님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은 인허스님은 무소유와 하심을 몸소 실천하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화광동진(和光同塵)의 정진을 닦아왔다.

인허스님이 12일 저녁예불에 참석한 뒤 불자들과 문답을 나누고, 몇 가지 짐을 박스에 담아 정리했다. 스님은 책상에 명정글씨까지 직접 써놓은 뒤 아침이 밝아오는 7시 30분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라는 유훈을 상좌인 무이스님과 대중에게 남기고 방산굴(方山屈)에서 육신의 옷을 벗었다. 세수 87세, 법납 64세.

1월 15일 월정사 서별당에서 열린 영결식에서 조계종 원로의원 지관스님, 총무원장 정대스님, 교구본사주지연합회 회장 법장스님, 월정사 주지 현해스님 등은 법어 영결사 추도사를 통해 스님의 종사열반을 되새기겠다고 밝혔다.

지관스님은 법어에서 “우리가 출가를 해서 수행한뒤 종정을 지낸 것도 중요합니다만 자취를 감추고 일생을 수행에 전념해온 것은 가장 뜻 깊은 일”이라며 “한국불교에 상징적이요, 모범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총무원장 정대스님도 영결사에서 “무소유와 하심의 생활자세를 몸소 실천하여 후학들에게 모범을 보여주셨다”며 “큰스님의 소중한 마음을 잃지 않겠다”고 애도했다.

월정사 주지 현해스님도 추도사에서 “항상 법당에 석불처럼 앉아 계시던 스님. 항상 온화한 말씀으로 선문답해주시고 후학을 경책하다 열반에 드시니 조사열반이 따로없다”며 “스님의 뜻을 받들어 중중발전에 이바지 하겠다”고 밝혔다.

법장스님은 조사에서 “스님게서는 생사일여가 아니라면 팔만대장경도 아무런 쓸모가 없음을 보여줬다”며 스님께서 일대사를 해결하신 법력을 받들어 승가화합을 이루겠다“고 말했다.

영결식에 이어 인허스님 법구는 2.5km 떨어진 일주문 옆 다비장으로 옮겨져 한줌의 재로 남았다.

한편 이날 행사에는 조계종 원로의원 지관스님, 교구본사주지연합회장 법장스님, 관음사 주지 종하스님, 직지사 주지 자광스님, 대흥사 주지 도형스님, 신흥사 주지 마근스님, 종회의원 법등 현응 세영스님, 함종한 전 한나라당불자회장, 최흥집 강원도청 관광문화환경국장, 여익구 민주당 불교특위 부위원장, 권혁승 평창군수와 월정사 주지 현해스님, 교구종회 부의장 일봉스님 상좌 무여 무상스님등 문도스님 100여명을 비롯 500여명의 사부대중이 참석했다.


◎ (인허스님 행장) 후학제접 항상 겸손‘오대산의 자비보살’

‘새매가 서 있고 뱀이 누워있는 형세가 쉬지 않으니
五千(오천)의 문자가 귀신을 근심하게 하는구나!
공자의 십대제가들이 어찌 이 뜻을 알 수 있으리오!
귀고리한 胡僧(호승, 달마대사)이 때때로 고개를 끄덕이는 구나.
以字(이자)는 새매가 서 있는 것이요.
八字(팔자)는 뱀이 누워있는 것이니,
今人(금인)은 이것을 준칙으로 삼으라.’

소임 맡지 않고, 무소유와 하심 실천

항상 겸손함을 갖춘 오대산의 자비보살의 삶을 살아온 인허스님이 13일 열반게를 남기고 열반했다. 인허스님은 언제나 찾아오는 신도들과 수좌들을 기꺼이 맞으며, 늘 사람답게 살 것을 강조해왔다. 스님은 개벽과 같은 대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해왔다. 총과 칼이 사라지고 신명(神明)이 악인을 벌하는 그런 시대가 오려면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런 시대가 오게 하려면 부디 바르게 살아야한다는 가르침을 펴왔다.

“도(道) 자리는 재미도 없고 화두 역시 맛이 없지만 무심히 정진하다 보면 무색 무취 무미의 도를 체득할 수 있다”는 ‘지음(知音)’의 경지를 표현한 인허 스님은 귀와 마음이 열린 사람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지음’. 도의 본체에 다가선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그 자리는 언설로는 말할 수 없기에 ‘구업 짓지 말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스님은 법문도 아꼈을 정도다.

또 스님은 “사회가 금수세상으로 갈수록 부처님 도량만은 중생들의 의지처와 삶의 올바른 지향점을 알려주는 나침반이 되어야 한다”며 후학들에게 열심히 정진하라며 항상 경책했다.

인허당 택호선사는 1916년 6월 15일 전북 김제시 만경면 대동리 257번지에서 5남 3녀중 넷째로 출생했다. 스님은 속가 둘째 형인 탄허 스님이 출가한 2년 뒤인 36년 오대산 상원사 방한암 스님을 친견하고 발심하여 입산, 39년 한암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했다. 39년 월정사 강원을 수료한 뒤 45년 한암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하고 51년 한암 스님이 열반할 때까지 상원사 청량선원에서 정진했다.

83년 탄허 스님이 입적할 때까지 그 그늘에서 묵묵히 참선, 독경, 염불의 정진을 계속해 온 인허 스님은 95년 한암문도회 대표로 추대되었으며, 96년 월정사 회주로 추대돼 후학 양성에 정성을 쏟아왔다. 특히 근년에는 기도정진에 전념하시어 견처를 얻고, 근검 절약과 정진의 원력으로 사부대중의 사표가 되었다.
스님은 87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며칠 전부터 미질이 있었으나 입적하는 날까지 매일 새벽 예불에 이은 독경, 참선을 멈추지 않았다.
김원우 기자 | wwkim@buddhapia.com |
2003-01-16 오전 11: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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