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일곱의 앳된 소년과 쉰 둘의 중년 남자가 국적과 나이를 뛰어 넘어 깔깔거리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지난 주말 경기도 일산 여래사에서는 이 절 주지 정우스님의 주선으로 티베트 왕사(王師)인 링 린포체와 도올 김용옥이 자리를 같이했다.
링 린포체는 다음 생(生) 달라이 라마의 스승으로 환생해 수행 중인 스님. 도올은 30일 있을 EBS의 여래사 특강 준비를 위해 들렀다가 마침 해인사 1200주년 창건기념 법회(10월1일) 참석 차 내한한 그를 만났다.
기자는 우선, 영락없이 한국 고등학교 남학생 얼굴을 한 링 린포체에 관심이 갔다. 붉은 가사에 가려진 체구는 약간 컸지만, 눈이 유난히 맑고총명해 보였다. 세속적 제도는 그를 ‘달라이 라마와 함께 절대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종교적 지도자’로 만들었지만, 그에게는 권위주의 같은 것은 한 점도 없어 보였다. 대신 그 나이 또래 소년처럼 겸손했고 호기심이 많이 보였다.》
우선 그에게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했다.
“티베트에서 태어난 부모님은 망명한 달라이 라마를 좇아 59년 인도로왔다. 나는 85년생이고 속명은 텐진 초광이다. 두 살 되던 해 달라이 라마를 포함한 고승들로 구성된 추대위원회를 통해 왕사로 추대됐다. 내가 83년 입적하신 링 린포체가 쓰시던 물건도 골라내고 선문답 등 108가지 선정 시험을 통과했다고 한다.”
당시 추대위에 소속돼 있었다는 옆 수행비서가 한마디 거든다.
“나는 돌아가신 링 린포체와 아주 친했다. 그는 나를 ‘TD’라는 애칭으로 불렀는데 87년 당시 두 살짜리 어린 아이가 나를 보자마자 대뜸 ‘TD’라고 부르며 안겨 얼마나 놀랍고 기뻤는지 모른다.”
기자가 “두살 때 일이 기억나느냐”고 묻자 그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 사람들이 당신을 누군가의 환생이라고 하는데 이를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내가 누구다’하는 생각이 없다. 단지 남들이 누구의 후신(後身)이라고 하니 그렇게 알 뿐이다. 티베트인들은 불교가 생활이다. 누구나 부처님 가르침을 구현해 살고 싶어한다. 내가 누구의 후신이라는 것은중요하지 않다. 다만 나는 전생에 훌륭하셨던 분을 닮으려고 노력할 뿐이다. 달라이 라마께서도 내게 링 린포체가 되라고 하지 않으신다. 그저 부처님 말씀을 잘 깨달아 실천하는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그러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다.”
-일반 사람들 중에는 환생을 비과학적이라고 생각한다.
“환생은 물리적인 몸이 아니라 마음이 환생하는 것이다. 추상적인 거다. 마인드라고 하는 에너지는 과학이다. 어디서 이 마음이 오는가, 마음이 무엇인가. 마음은 비록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과학적으로 따져보면 분명 어딘가 오는 데가 있다.”
-식민지 조국에 태어나 어려움이 많은 줄 아는데.
“티베트 사람들이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은 불교 이론으로 말하면 긴 윤회의 억겁에서, 과거의 지은 죄 때문에 받는 것이다. 그래서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아프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유를 원하지 않는가. 경제권 군사권 박탈같은 것은 참을 수 있다 하더라도 종교생활을 보장받지 못해 가장 슬프다.”
차분하면서도 단호한 그의 말을 듣고 있으니 숙연해진다. 내친 김에 좀근본적인 물음을 던졌다.
-행복은 무엇인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세속적인 행복은 더 많이 갖는 것인데 문제는 더많이 가질수록 갈망도 커진다는데 있다. 따라서 궁극적 행복은 세속적인것에서는 얻을 수 없다. 결국 부처님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이 본질적인 행복을 얻는 것이다. 티베트 문화는 물질적 쾌락없이도 행복한 삶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는 치매 환자가 거의 없다. 이 한가지 사례만 갖고도 얼마나 우리가 안정된 삶을 사느냐는 것을 보여 주지 않는가.”
-이번에 네 번째 방문인데 한국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올 때마다 물질적으로 더 번영해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럴수록 정신적 갈증이 느껴질 것이다. 한국도 훌륭한 불교 전통을 갖고 있지만 티베트 불교가 그 정신적 갈증을 해소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미국 유학가서 경제학 과학 공부하는 열정의 일부라도 티베트불교를 연구해 보고 싶다는 사람들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런 교류를 내가 도울 수 있다면 좋겠다.”
링 린포체는 영어가 유창했다. 도올이 통역을 도와 주었다. 도올은 링 린포체의 대답이 나올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간혹 수첩에 적기도 했다.
최근 티베트 불교와 달라이 라마에 관심을 갖고 있는 도올에게로 질문을 옮겼다.
-최근에 달라이 라마를 만나고 책(달라이 라마와 도올의 만남·통나무)까지 펴 냈는데….
“그는 정말 정직한 사람이다. 도무지 권위적이지 않다. 나도 모든 권위를 거부해오며 살아온 사람이라 그 점이 특히 감동적이었다. 책에 실린그의 사진을 보라. 앞으로 바싹 다가앉아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 지식도 대단했다. 종교 지도자라기보다 존경하는 석학을 만난 듯한 느낌이었다. 지혜와 지식의 이분법에 한국불교가 망하고 있는데 그는 세속적인 지식과 지혜에 구분없이 자신이 모르는 것을 배우려 했다. ‘내가 스님이다’ 라는 의식도 없었다. 티베트불교의 힘이 그런 것 아닐까….”
-왜 그를 만날 생각을 했나.
“이제 우리가 선진 문명으로 비약하는 마당에 세계 문명에 대한 다양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그동안 중국 문명 전문가로서 살아 오긴 했지만,언젠가는 인도문명도 공부해보고 싶다는 향심(向心)이 있었다. 인도 문명의 기저를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어떻게 인도 문명의 맥락 속에서 불교를 이해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또 나는 달라이 라마를 통해 티베트불교라고 하는 또 하나의 새로운 영역을 발견했다. 티베트불교는 대승 소승밀교가 어우러진 보고이며 문헌도 많이 남아있다. 불교를 제대로 공부하려면 한역대장경, 팔리어 대장경, 티베트 대장경 이 세 장경을 다 알아야온전하게 된다.”
도올은 특히 티베트불교의 세계화에 대해 느낀 점이 많은 듯 했다.
“우리는 불교를 너무 과거의 문화유산으로만 인식한다. 우리가 익숙한불교는 중국화된 불교인데 이젠 너무 난숙(爛熟)해서 생명이 끝난 느낌을 준다. 그러나 불교는 서양에서 20세기에 들어와 비로소 연구되기 시작했고 미국을 비롯한 일류 문명의 주류로 들어가고 있다. 마치 초기 기독교가 이스라엘에서 로마로 들어가 전 세계 사람들에게 문명사의 주류로 편입을 했듯이 말이다. 거기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티베트불교다. 그들은 달라이라마 말대로 조국을 잃었지만 세계를 얻었다.
이제 한국 불교도 세계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티베트 불교가 그렇게 세계인들에게 설득력을 갖는 것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나.
“불교를 과학과 연결시켜 합리적으로 설명한다. 수행방법도 정확하고 다양하다. 마음의 평화를 흩어뜨리는 것은 대부분 비과학적인 사실들이다. 정말로 과학적으로 생각하면 자기 고통도 사라질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과학과 접목할 수 있는 종교가 내 생각엔 진정한 불교다.”
도올은 “불교야말로 가장 미래적인 종교”라고 거듭 강조하면서 “나 자신은 수행자가 아니지만 철학자로서 불교가 과학에서 벗어나 광신으로 흐를 때는 역시, 처절하게 비판하겠다”고 말했다.
“불교는 종교가 아니다. 즉 과거 서양사람들이 말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라는 타율적 신앙의 모델로 규정한 종교가 아니라는 말이다. 불교는 초월적인 신이나 자기외의 타자에 대한 기대나 믿음이 없이도 성립하는 종교다. 그래서 자각의 종교다. 이러한 것이 이해되는데, 다시말해 인류가 싯달타의 발상을 받아 들이는 데 2000여년 걸렸다. 예수의 발상은1∼2세기만에 지중해 연안을 휩쓸었다. 그러나 불교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끝으로 도올은 링 린포체에게 이런 당부를 했다.
“불교를 불교적 용어로 이야기하면, 쉽게 사람들이 받아 들이지 못합니다. 한마디로 물려 버립니다. 불교를 불교가 아닌 용어로 이야기 하려면 너무 종교적인 공부만 하지 말고 나처럼 세속공부도 해서 세속 대중을비불교적 언어로 설득해야 합니다.”
링 린포체는 두 손을 모으고 머리숙여 인사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