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심귀명례 삼계도사 사생자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아이들은 새벽 5시반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예불에 참석한다. 늘 그랬던 것처럼 오늘 아침에도 성진(14)이가 목탁을 치며 집전을 했다.
초등학교 3학년 이상은 모두 예불문과 반야심경을 왼다. 오후 5시 저녁예불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너나할 것 없이 예불 때마다 발원을 한다. ‘지훈이 병 낫게 해 주세요’ ‘엄마 아빠 만나게 해 주세요’ ‘부처님 말씀대로 착하게 살겠습니다.’
버려진 아이들. 의정부시 호원동 통일안국사(031-876-2235)에는 이런 아이들 48명이 모여 산다. 아직 학교에 가지 않는 꼬마들과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에 대학생까지 있다.
이 아이들은 저마다 치유되기 힘든 아픈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엄마, 아빠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아이, 친척집을 전전하다 이곳에 오게 된 아이, 엄마가 가출한 뒤 아빠 손에 이끌려 온 아이….
사람들은 이곳을 ‘선재동자원’이라 부른다. 통일안국사 주지 지산스님이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데리고 살기 시작한지 어느덧 9년. 가엾은 생각에 돌배기 고아를 데려다 키우면서 버려진 아이들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이곳을 거쳐 나간 아이들만 해도 벌써 30여명. 세상은 이 아이들을 ‘고아’라고 부르지만, 지산스님은 ‘선재동자’라고 부른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 선재동자원.
12월 22일 오전, 인근 회룡사 어린이법회 아이들 12명이 선재동자원을 찾아왔다. 이틀 동안 이곳 아이들과 함께 뛰놀게 해달라는 지산스님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님은 이곳 아이들이 보통 아이들보다 정서가 불안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다른 아이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삐뚤어진 성격으로 자랄까봐 그게 더 걱정이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다른 아이들과 뒤섞여 어울릴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려고 한다.
20평 남짓한 여학생 방에서 레크리에이션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장군(3)이와 세룡(3살)이가 형과 누나들 틈에 끼어들어 재롱을 부린다. 보기에도 가여울 정도로 시커멓게 튼 손. 성민(12)이가 장군이를 번쩍 들어 안고는 손등을 어루만진다.
초등학교 6학년인 성민이는 우등생이다. 공부도 잘하지만 동생들을 잘 돌보기 때문에 인기가 높다. 이곳에 온 지는 벌써 6년째. 엄마, 아빠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성민이는 엄마, 아빠를 찾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유를 묻자 아예 고개를 돌렸다. 부모에게 버려진 아픈 기억이 되살아난 걸까.
성민이에게는 꿈이 있다.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한다. 혹시 나중에 만나게 될지도 모를 엄마, 아빠에게 보란 듯이 자랑하고 싶단다. 미워할수록 커져만 가는 그리움, 성민이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법당 아래 30평 남짓 되는 공간의 주인은 이곳 남학생들이다. 책상10개, 컴퓨터 3대, TV 1대가 세간의 전부지만, 28명이 함께 자는 공간치고는 턱없이 비좁다. 하지만 누구도 불편하다는 내색을 하지 않는다. 이곳 형편이 어떻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지산스님은 그런 아이들이 대견스럽다. 하지만 마음은 늘 안타깝다. 더 좋은 밥에, 더 좋은 옷, 그리고 더 따뜻한 잠자리를 마련해주고 싶지만 언제나 마음뿐이다. 아이들은 스님을 ‘아빠’라고 부른다.
친자식이나 다름없는 아이들. 용돈 몇 백원이라도 더 쥐어주고 싶지만 겨울에는 기름보일러 비용조차 조달하기가 벅차다. 하지만 스님은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야 말로 불국정토를 여는 길이라고 믿고 있다.
선재동자원 운영에 있어 후원자와 신도들의 보시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비인가 시설이라서 정부나 시의 지원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스님이 은행에서 융자받은 돈만도 만만치 않다.
정부로부터 보조를 받으려면 인가를 받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기준에 맞는 시설규모도 갖춰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인가시설이 되면 18세가 된 아이들을 무조건 내보내야 하는 정부의 규정도 지산스님이 인가시설을 마다하는 이유 중 하나다.
미예(16)는 만능 운동선수로 통하는 동순(17) 언니와 이쁜이 옥래(15)와 함께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내년에 고3이 되는 동순이는 체육학과에 진학해 체육선생님이 되겠다는 소망을 갖고 있다.
옥래는 김희선 언니와 같은 유명한 탤런트가 되는 것이 꿈이다. 얌전한 동순이, 톡톡 튀는 옥래, 새침데기 미예는 성격만 보면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서로를 위하는 마음은 끔찍하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세상살이의 고달픔을 일찍 알아버린 탓일까.
의지할 곳도, 의지할 사람도 없다는 것이 이 셋에겐 가장 큰 아픔이자,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 그래도 아이들의 가슴 밑바닥에는 자신들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걱정하는 따스함이 늘 자리잡고 있다. 미예는 돈을 많이 벌어 자기처럼 불쌍한 아이들을 도와주고 싶다고 했다.
“사업가가 될 거예요, 사회복지시설을 지어서 불쌍한 사람들을 살게 해주고 싶어요. 배고프지 않고 춥지 않게 해 줄 거예요….”
스님은 요즘 들어 부쩍 권철(20)군을 자주 찾는다. 지난해 공고를 졸업했지만 아직도 취업을 못하고 있는 권철군은 올 3월에 입대하기로 결심했다. 어디를 가도 ‘고아’라는 꼬리표 때문에 받아주지 않는 현실이 진절머리가 난다. 스님도 그런 사실을 잘 알기에 누구보다 마음이 쓰인다.
선재동자원의 또다른 고민거리는 15개월된 막내둥이 지훈이 병원비 문제. 생후 3일만에 산부인과에 버려진 지훈이를 데리고 왔지만 다운증후군에 심장병까지 앓고 있어 한달 병원비만도 50만원이 넘게 들어간다.
저마다 아픔을 마음 한복판에 걸어놓고 사는 아이들이 모인 곳 선재동자원. 하지만 새해를 맞아 이곳 선재동자들도 갖가지 꿈을 펼쳐 놓는다. 의사가 돼 자기처럼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 주겠다는 뇌성마비 장애인 정자(11), 육군 장교가 되겠다는 명섭(14), 벤처사업가도 선생님도 되고 싶다는 성진(14), 과학자가 꿈이라는 치훈(12)과 성주(11), 카레이서를 꿈꾸는 승환(11)….
이 아이들에게 꿈은 어떤 의미일까. 보통 아이들처럼 ‘어떤 사람이 되겠다’는 희망만은 아니다. 이 아이들에게 있어 꿈은 혼자 사는 방법을 익히는 고된 연습이다.
정훈(7)이가 와락 품에 안겼다. “아저씨, 안녕히 가세요.” 만난지 서너 시간 밖에 안된 사람에게 안길 정도로 정이 그리운 아이들. 이곳 아이들은 또래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또 다른 꿈을 꾸며 살아간다. 새해에도, 그 다음해에도, 또 그 다음해에도… 그리운 사람들을 만날수 있게 해달라는 소망으로.
한명우 기자
mwhan@buddhapi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