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19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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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이룬 왕, 그러나 ‘몸 잃은 넋’ 어디에…”
조선왕릉에서 불교를 읽다 19 9대 성종-선릉
성종 1457-1494(38세)
재위 25년 1개월 1469.11(13세)-1494.12(38세)

땅값이 가장 비싼 서울 강남의 노른자위에 성종이 묻혀 있다. 주변 땅값이 평당 1억을 넘나든다. 뚝섬 나루를 건너 봉은사 지나 멀찍이 능을 조성했는데 세상이 변해 돈과 환락이 몰린 곳이 되었다. 성종은 부인이 12명이다. 조선 역대 왕 중 랭킹 1위다. 공동 1위 : 11대 중종도 12명, 그들은 부자지간이다. 조선조 최대 스캔들을 일으킨 어우동도 성종 때 사람이다. 어우동 야사에는 성종이 어우동과 함께 유흥을 즐겼다는 내용이 있다. 성종이 얼마나 야행을 즐겼는지 짐작케 한다.

성종은 20여년에 걸쳐 완성한 조선 최고의 법전 경국대전을 비롯해 동국여지승람, 동문선, 동국통감, 악학궤범 등을 완성했다. 모든 것을 다 이룬 왕이라 해서 성종(成宗)이란 묘호가 붙었다.

그러나 공덕 쌓는 일에는 소홀했다. 업보라 단정 짓기는 송구하지만, 폐비 윤씨 사건, 연산군의 폭정, 중종반정 등은 성종이 뿌린 씨앗의 결과물이다. 연산군과 중종은 성종의 친아들이다. 성종의 능은 현재 유해가 없는 빈 무덤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적들이 무덤을 파헤쳐 도굴했다. 정자각은 불태웠다. 왕의 시신은 행방을 알 길 없다. 임란이 끝나자 선조는 성종의 유해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전란 중 몽매한 왜군들이 아무렇게나 흩뿌려버렸을 것이다. 선조는 새로 관을 짜서 부장품으로 넣었던 옷을 태운 재를 담아 다시 안장했다. 성종의 무덤 속에는 수의로 넣었던 옷을 태운 재만 관에 들어 있다. 몸을 잃은 넋은 어디를 떠돌고 있을까.

세종조 후반 누그러지기 시작한 배불의 기세는 세조대에 이르러 완전히 숭불호법의 정책으로 바뀌어 불교가 다시 옛 고려시대로 돌아갈 것 같은 분위기가 풍겼다. 그러나 성종이 즉위하자 다시 척불의 시대가 된다.

성종 2년(1471) 6월에 도성 안에 있는 염불소를 폐지한다. 더불어 무당들을 성 밖으로 내쫓아버린다. 12월에는 간경도감을 폐쇄시킨다. 간경도감은 세조 7년에 설치된 이래 불전의 국역사업을 하던 기관인데 성종 때 문을 닫는다.

왕 4년 8월에는 양반가 부녀자들이 머리 깎고 출가하는 것을 금한다. 6년에는 도성 안팎에 있는 비구니 사찰 23곳을 헐어버린다. 8년 12월, 국왕의 탄신일에 사찰에서 베풀던 축수재를 못하게 한다. 이듬해 4월에는 당시 존경받는 원로 문신 김수온이 독실한 불자라 해서 성균관 출입을 금지시킨다.

성종 23년 2월에 도첩법을 정지시킨다. 도첩이 없는 승려는 부역과 군역을 해야 했다. 새로이 출가하는 것을 금하고 기존 승려를 강제로 환속시키기까지 했다. 남은 사찰이 텅텅 비게 될 지경이었다.

이를 보다 못해 두 왕대비, 인수대비와 인혜대비가 나선다. 승려 되는 것을 금하지 말라는 전교를 내려 금승의 법은 한 때 중지되고 불교 억압이 조금 주춤했다. 그러나 왕과 유생들의 척불사상은 여전히 격렬했다. 인수대비가 불상을 만들어 정업원(비구니 절)에 보냈는데 무례한 젊은 유생들이 이것을 도중에 빼앗아 불태워버렸다. 대비가 크게 노했으나 왕은 그들을 벌주지 않았다. 일반 백성이 상을 당해 절에서 재 올리는 것을 금했다. 불사에 공양물 바치는 것을 금하고 새로 절을 짓지 못하게 했다. 승려의 수가 줄어 절들이 텅텅 비어갔다. 1489년 향시에서 ‘불교를 믿어 재앙을 다스려야 한다’는 내용의 답안을 작성한 유생을 귀양 보내기까지 했다.

불교의 암흑기는 이후에도 계속된다. 폐륜아 연산군 때 절정을 이룬다. 연산은 성종이 얻은 첫아들이다. 공덕 쌓는 일에 소홀하면 어떤 소용돌이가 이는지 생생하고 섬짓 하게 보여준 이가 연산군이다.

두 번째 부인 윤씨는, 왕이 규방 출입이 잦고 자신을 멀리한다고 왕의 얼굴을 손톱으로 긁어버렸다. 이 일로 성종과 모후 인수대비에 격분을 사서 폐비가 되고 사사되고 만다. 당사자를 죽일 수는 있었지만 얼굴에 그어진 손톱자국은 역사가 되었다. 왜병의 만행으로 시신마저 사라진 성종, 모든 것을 다 이루었는가, 다 잃었는가? 그의 넋이 떠도는 선릉 일대의 밤은 오늘도 휘황찬란하다.

***선릉***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능이다. 성종은 추존왕 덕종과 소혜왕후의 아들로 태어나 생후 두 달 만에 부친을 여의었다.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이 즉위 1년 만에 승하하자 정희왕후의 명으로 전격적으로 왕위에 올랐다. 태조 이후 닦아온 모든 체제와 기반을 완성시켜 조선 초기 문화를 꽃피웠다.

정현왕후는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가 폐출되자 이듬해 1480년 왕비로 책봉되었다. 정현왕후의 아들 진성대군(중종)은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선릉은 유난히 많은 변고를 겪었다. 임진왜란 때 왕릉이 파헤쳐지고 재궁이 불태워지는 수모를 겪었다. 인조3년(1625) 11월 15일에는 홍살문, 정자각에 불이나 완전히 타버렸다. 능참봉과 능수호군은 하옥되었다. 그 다음 해 2월 4일, 2월 15일 연이어 능상에 불이 났다.

왕과 왕후의 능이 동원이강식으로 배치되었다. 세조의 유언에 따라 석실을 쓰지 않았다. 제반 상설은 국조오례의 양식에 준하였다.

***선정릉***
9대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능인 선릉과 그들의 아들 11대 중종의 능 정릉을 합쳐 선정릉이라 한다. 사적 199호. 서울 강남구 삼성동 131번지. 면적 72,778평.
글=이우상(소설가) 사진=최진연(사진작가) | asdfsang@hanmail.net
2007-10-10 오후 1: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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