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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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요한 책략가의 딸…어질고 자애롭지만 ‘단명’
조선왕릉에서 불교를 읽다 18 8대 예종 원비 장순왕후 - 공릉
장순왕후 1445~1461(17세)

‘압구정동엔 출구가 없다’ 어느 시인의 시집 제목이다. 필자는 매일 지하철 압구정역을 지나다닌다. ‘압구정(狎鷗亭)’은 한명회가 노년에 권좌에서 물러나 한가로이 갈매기와 벗하며 지내고 싶다하여 한강변에 지은 정자다. 지금 압구정동엔 압구정이 없다. 갈매기도 없다. 대한민국 대표적 부촌의 대명사, 강남 1번지로 자리매김 한 곳, 고급 패션, 외제차가 넘치고 성형외과가 즐비한 곳이 압구정동이다.

역사에는 위대한 인물이 있고 드라마틱한 인물, 문제적 인물이 있다. 한명회는 후자에 속한다. 사극 드라마에 단골로 등장할 만큼 캐릭터가 강하다. 드라마, 소설은 평범한 위인보다 자극적이고 절묘한 캐릭터를 선호한다. 역사는 교훈의 창고만이 아니라 재미의 샘이다. 교훈은 숙성이 끝난 후 훈습되는 차맛 같은 것이다. 재미는 혀끝을 짜르르 쏘는 청량음료다. 한명회의 삶은 팔팔한 재미 욕구를 충족시켜준다. 절세의 처세가요 탁월한 책략가, 모사가다. 딸들을 예종, 성종에게 시집보내 세조와 겹사돈을 맺은 유능하고 뻔뻔한 아비다. 셋째 딸이 예종 비 장순왕후, 넷째 딸은 성종 비 공혜왕후다. 셋째는 넷째의 언니임과 동시에 시숙모가 된다. 권력과 연루된 기묘한 촌수다. 위의 두 딸은 이미 출가하여 왕가에 헌납할 수 없었다.

예종의 원비 장순왕후 한씨는 한명회와 부인 민씨의 셋째 딸이다. 아비는 희대의 모사꾼이지만 딸들은 잘 키웠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필자가 직간접으로 접한, 손가락질 받는 정치가, 군인, 사업가들도 자식 교육만은 열성적이고 진지하다. 심지어 조폭 냄새나는 이들도 자식은 반듯하게 키운다. ‘그 아비에 그 자식’이란 말에는 선뜻 동의하지 않는다. 한씨는 아름답고 정숙하여 1460년 4월 11일, 16세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그 책문(冊文)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그대 한씨는 훌륭한 집안에서 태어나 온유하고 아름답고 정숙하여 종묘의 제사를 도울 만하다. 이제 효령대군 보(補)와 우의정 이인손 등을 보내 그대에게 책보(冊寶)를 주어 왕세자빈으로 삼는다. 그대는 지아비를 공경하고 도와서 궁중의 법도를 어기지 말고 왕업을 융성하게 하라.’

세자빈으로 책봉된 지 1년 7개월만인 1461년(세조 7년) 11월 30일 원손 인성대군을 낳고, 산후병으로 닷새 후 열일곱 꽃다운 나이에 눈을 감는다. 목숨 바쳐 나은 자식도 네 살 때 죽었다. 세조는 생전에 맏아들 잃고 며느리 잃고 손자까지 앞세웠다. 세조는 재위 중 초상을 치르고 묘역을 조성하느라 늘 바빴다. 아버지 세종, 형 문종의 국상도 그가 발 벗고 나서야할 책무였다.

그런 세조에게 한명회는 필요한 인물이었다. 어린 단종이 즉위하여 김종서, 황보인 등이 전횡을 휘두르자 수양대군은 지략과 용맹을 갖춘 참모가 필요했다. 한명회는 대세를 읽었다. 1415년(태종 15년) 예문관 제학 한상질(조선 개국 당시 명나라에 파견되어 ‘조선’이란 국호를 확정 짓고 돌아온 공신)의 손자, 한 기의 아들. 본관은 청주, 자는 자준, 호는 압구정, 사우당이다. 왜소하고 볼품없는 칠삭둥이로 태어나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불우한 소년 시절을 보냈다. 과거 운이 없어 늘 낙방하여 공신의 자손은 과거에 의하지 않고 관리로 채용하는 문음(門蔭)제도로 1452년(문종2년), 38세에 개성 경덕궁직으로 관직에 들어갔다.

수양대군에게 가장 먼저 접근한 수양의 좌장 권람의 주선으로 한명회는 수양의 ‘장량’, 수양의 최고 책사가 된다. 1453년 계유정난 때 자신이 끌어들인 무사 홍달손 등이 김종서를 살해하고 살생부를 만들어 정적을 제거한다. 세조의 즉위와 함께 그의 시대가 활짝 열린다. 좌부승지, 우승지, 도승지, 이조판서, 병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이 그의 이력이다. 일개 궁직에 불과했던 그가 13년 만에 52세의 나이로 조정을 완전히 장악한다.

그의 지략은 집요했다. 세조와 사돈을 맺어 딸을 예종 비, 성종 비로 만들어 2대에 걸쳐 왕후로 삼게 했다. 집현전 학사 출신 중 세조의 신임이 두터운 신숙주와 인척 관계를 맺고 친구인 권람과도 사돈 관계를 맺는다. 한명회는 세조~성종에 이르기까지 요직을 독점하고 이를 바탕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한다. 압구정동이 부촌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닌가보다.

세조, 예종, 성종에 이르기까지 절대 권력을 행사한 한명회는 네 번이나 1등 공신으로 추대되어 많은 토지와 노비를 상으로 받아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1487년(성종 18년) 73세의 나이로 이승을 하직했다. 청년 시절의 삶은 꼬질꼬질했지만 중년 이후의 삶은 찬란했다. 뛰어난 지략, 권력의 양지쪽을 파고드는 힘이 있었다. 거기에 아름다운 딸들의 헌신적 희생도 한몫을 했다. 아비의 야심에 의해 세자빈이 되었다가 열일 곱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난 장순왕후의 음덕을 아비는 알까.

그 후 한명회는 1504년(연산군 10년) 갑자사화 때 연산군의 생모 윤씨 폐사에 관련했다하여 부관참시 되었으나 뒤에 복권되었다. 무덤에서 썩은 시신을 꺼내 토막 내는 수모를 당했으나 살아생전은 털끝 하나 뽑히지 않았다.

아비의 정략적 야심이 아니었다면 장순왕후는 세자빈이 될 일도, 17세에 요절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공릉을 바라보니 어린 장순왕후는 말없이 누워 있고 아비는 능침 위에서 여전히 천하의 주무르는 재주를 부리고 있다. 지금도 권력을 향해 질주하는 이들이 자욱하다. 부디 자식을 방석으로 삼거나 재물로 삼지 말지어다.

공릉은 애초 세자빈 묘로 조성되었다. 봉분의 난간석, 병풍석, 망주석이 모두 생략되었고 무인석도 없다. 아담한 문인석 곁에 갈 곳 없는 게으른 석마가 졸고 있다. 소풍 나온 여학생들에게 물어볼까. ‘네 꿈이 뭐니?’ 이렇게 대답하는 아이들이 있을까? ‘왕비요!’라고. ‘너, 열일곱 살에 죽어도 왕비 되고 싶니?’라고 되물어 볼까. 허허허! 실없는 농담이다. 결코 그런 질문을 하지 않을 것이다. 죽음 앞에선 경건해진다.

***공순영릉(恭順永陵)***
예종의 원비 장순왕후의 공릉, 성종의 원비 공혜왕후의 순릉, 영조의 맏아들 진종과 그의 비 효순왕후의 영릉이 모여 있다. 사적 제205호.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봉일천리 산4-1번지. 면적 1,323,105㎡ (40,239평)

***공릉(恭陵)은***
8대 예종의 원비 장순왕후 한씨의 능이다. 장순왕후는 한명회의 셋째 딸이다. 의경세자가 죽고 둘째 아들(예종)이 왕세자에 책봉되자 한명회는 1460년 그의 딸을 세자빈 자리에 앉혔다. 장순왕후는 아름답고 정숙하여 시아버지인 세조의 사랑을 받았다. 세조는 왕세자빈에게 장순(章順)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온순하고 너그럽고 아름다우며(章), 어질고 자애롭도다(順). 1470년(성종1년) 능호를 공릉이라 했고, 1472년 장순왕후로 추존되었다.
글=이우상(소설가) 사진=최진연(사진작가) | asdfsang@hanmail.net
2007-09-18 오전 11: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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