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19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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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 업보 지고 요절…세조가 직접 무덤 챙겨
조선왕릉에서 불교를 읽다16-추존왕 덕종 경릉
서오릉

덕종(의경세자):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맏아들, 1438~1457(20세)

아비의 업보를 지고 꽃다운 스무 살에 종생한 의경세자. 산맥보다 더 듬직한 아버지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예절이 바르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특히 해서에 능했다. 그러나 철이 들고 세상 이치의 전후를 가늠할 정도가 되자 밤마다 악몽에 시달린다. 날이 갈수록 악몽의 강도가 세어진다.

“이노옴! 네 아비가 저지른 악행만큼 네가 받아라.”
하얀 소복에 뻘건 핏물을 뒤집어쓴 여인이 칼을 들고 달려든다. 세자는 비명을 지른다. 자리옷은 식은땀으로 축축하다. 내관이 들어와 세자를 흔든다. 야윌대로 야윈 세자의 몸은 부처의 고행상처럼 뼈만 앙상하다. 악몽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목을 조르고 사지를 비틀고 가슴팍에 비수를 꽂는다. 내의원에서 근기를 돋우는 탕재를 올려도 소용없다. 밤낮 없이 세자 주변을 맴돌며 세자를 옥죄는 여인은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다. 아들을 원통하게 잃은 여인의 혼령이 저주의 굿판을 멈추지 않는다. 맏아들에게 달라붙은 원귀를 쫓으려고 세조는 눈이 뒤집힐 정도로 애썼다.

자식에게 대물림된 업보에 억장이 무너진다. 원귀를 향한 분노에 치를 떤다.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쳐 유골을 바닷가에 흩뿌린다. 원혼을 달랜 것이 아니라 불타는 원귀의 한에 기름을 부은 것이다. 백골마저 능멸당한 원혼의 저주는 하늘을 찌른다. 결국 세자는 식은땀을 비오듯 흘리며 가위 눌려 죽었다. 단종이 죽은 지 한 달 후의 일이다.

사태의 전말을 알고 있는 세조는 아들의 시신을 안고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자식을 가슴에 담고 명당을 찾아 나섰다. 아비의 업장을 대신 지고 떠난 아들의 무덤을 위한 세조의 노력은 광적이었다. 세조는 이미 조선 초 내로라하는 풍수의 대가다. 세조는 기구한 팔자에 풍수 살이 단단히 끼어 있다. 아버지 세종의 왕릉을 잡으러 다녔고, 형인 문종의 능 그리고 이제는 자식의 무덤마저 잡아야하는 기막힌 팔자다. 후일에는 며느리의 무덤에까지 관여했던 것이 세조의 풍수 팔자다.
단촐한 경릉

택지 천거가 봇물처럼 쏟아지자, ‘상중하로 구별하여 올리라’는 어명과 함께 통행 계획을 짜서 친히 현장 답사를 한다. 고르고 골라 조성된 것이 경릉이다. 서오릉은 세조가 마련한 세조 혈통의 선산 왕릉이다. 동구릉 지역과 맞먹는 55만평의 서오릉이 만들어지게 된다. 경릉은 조선 왕릉 중에서 가장 소박하다. 병풍석, 무인석이 없다. 아담한 민간 무덤 같다. 장식을 버리고 편안하게 잠들라는 교훈 같다. 자식이 무슨 죄인가. 세조의 피울음이 흥건히 녹아 무덤을 쓰다듬고 있다.

의경세자는 한확의 딸 한씨(소혜왕후)를 아내로 맞아 1454년 월산대군을 낳고, 1457년에 자을산군(성종)을 낳았다. 경릉 정자각에서 바라볼 때, 왼쪽 높은 언덕에 묻혀 있는 이가 소혜왕후다. 그녀의 인생 역정 또한 만만치 않다. 15년간 왕세자비라는 딱지를 달고 살았다. 한창 나이인 21세에 과부가 되어 13년간 사가에서 살았다. 설움의 세월은 아들 덕분에 풀려나간다.

남편 의경세자가 죽기 한 달 전에 태어난 차남 자을산군은 운 좋고 잘난 아들이다. 그녀의 나이 32세에 세조가 승하하자 시동생인 예종이 19세로 보위를 잇는다. 그런데 예종은 재위 1년2개월 만에 요절한다. 왕위 계승 결정권자는 세조비 정희왕후 윤씨다. 왕통 계승 후보자는 3명이다. 1순위는 예종의 직계 장남 제안대군, 2순위는 그녀의 장남인 16세의 월산대군, 3순위는 그녀의 차남 13세 자을산군이다. 세조비 윤씨는 3순위인 자을산군을 전격적으로 결정해버린다.

왕이 승하한 다음 날 바로 즉위시킨 유래가 없어 조정 대신들의 논란이 들끓는다. 그것도 3순위자에게 덜컥 왕관을 씌웠으니. 분분한 논란은 논란일 뿐, 역사는 흐른다. 차남이 왕이 되자 사가에 머물던 그녀는 존엄한 궁궐로 모셔져 당장 ‘인수대비’로 명명된다. 5년 후에는 왕대비로 봉해진다. 남편보다 48년이나 더 살다가 1504년 춘추 69세로 승하했다.
서오릉을 지키는 문인석

조선 왕릉 중 비의 능이 왕의 능보다 더 높은 곳에 자리 잡은 것은 경릉이 유일하다. 석물도 더 풍성하게 차려져 있다. 이유는 이렇다. 지아비 덕종은 1457년 20세로 요절했고 당시 신분은 왕세자였다. 지어미 인수대비는 승하 당시 신분이 왕대비였다. 왕릉 자리 원칙은 남존여비가 아니라 군신관계 우선이다. 종묘사직을 위한 왕릉이기에 군신관계가 절대적이다

실재 재위하지는 않았으나 후대 왕이 선왕을 기려 왕위를 올리는 것이 추존왕이다. 조선 개국 이후 최초의 추존왕이 덕종이다. 원귀에 시달리다 죽은 아비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 아들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1471년 덕종으로 추존했다.

정희왕후는 왜 3순위자인 자을산군에게 왕관을 씌워 줬을까? 한명회, 신숙주 등이 정치적으로 결탁한 결과라는 설이 있으나, 세조비 윤씨의 내심을 달리 읽을 수도 있다. 왕실의 번영은 왕손의 다산에 있다. 덕종, 예종이 모두 20세에 요절했다. 왕의 건강이 왕실과 종묘사직의 건강이다. 비록 13세에 불과하지만 자을산군은 튼튼한 강골풍이었다. 어느 날 뇌우가 몰아쳐 옆에 있던 환관이 벼락에 맞아 죽어 주위 사람들이 혼비백산했지만 자을산군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성종은 재위 25년1개월 동안 12명의 여인들에게서 16남12녀 도합 28명의 자녀를 생산했다.

권세와 영화를 누리던 정희왕후(인수대비)도 무도한 손자인, 연산군 앞엔 무력했다. 노년의 기력을 다해 그의 무례와 부덕을 꾸짖다가 참으로 어처구니없이 삶을 마감했다. 실록에는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쉽게 말해, 할머니를 헤딩으로 박아 죽게 했다. 레슬링, 축구에만 헤딩이 있는 게 아니라 지엄한 구중심처에도 있었다. ‘아야! 아이고 머리야!’ 왕후의 신음이 능침을 타고 내린다.

***경릉(敬陵)은***
덕종(의경세자, 1438~1457)과 원비 소혜왕후(1437~1504) 한씨의 능이다. 동원이강의 능제를 따르고 있다. 서오릉에 들어선 최초의 왕릉이다. 일반적으로 앞에서 볼 때 왼쪽이 왕, 오른쪽이 왕비의 능이 있기 마련인데 조선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왕비가 왕보다 더 높은 자리인 왼쪽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의경세자는 세조의 장남으로 1455년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20세에 승하하여 대군묘 제도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1471년 둘째 아들인 성종에 의해 덕종으로 추존.

소혜왕후는 1455년 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성종이 즉위하자 왕대비(인수대비)가 되었다. 성품이 총명하고 학식이 깊어 부녀자들의 예의범절을 가르치기 위한 ‘내훈(內訓)’이란 책을 간행하기도 했다. 손자 연산군이 생모 윤씨의 폐비 사사 사건에 대해 보복하려 하자 이를 꾸짖다가 연산군에게 머리를 박치기 당한 얼마 후 승하했다.
글=이우상(소설가)/사진=최진연(사진작가) | asdfsang@hanmail.net
2007-08-28 오후 3: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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