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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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문수동자 만났다는 것 절대 발설치 마십시오"
조선 왕릉에서 불교를 읽다15-7대 세조 광릉(2)
광릉 전경 헝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참도가 없다

상원사로부터 월정사에 이르는 계곡물은 콸콸 거침없이 흐른다. 왕은 호위하는 시종들을 멀찌감치 물리고 홀로 상수리나무 가지를 헤치며 계곡으로 내려간다. 온몸을 뒤덮다시피한 피부병에 정신이 혼미하다. 긁고 긁어서 진물이 나고 딱지가 일어 그 꼴이 처참하다. 누구를 원망할 힘조차 없다. 꿈에 침을 뱉어 이 지경을 만든 형수도, 온 나라를 뒤져 명약이라고 갖다 바친 어의들도 미워하고 호통 칠 힘이 없다. 목덜미를 긁으면 옆구리가 또 가렵다. 손톱에 살점이 묻혀나도록 긁는다.

거추장스런 용포가 나뭇가지에 걸린다. 시종들이 보이지 않는 바위 뒤에 이르러, 화려한 용포를 찢듯이 벗어던진다. 진물 질질 흐르는 알몸이 된다. 중천에 든 여름해가 벌거벗은 왕을 내려 본다. 돌부리를 피해가며 물속에 몸을 담근다. 아! 시원하다. 홀로, 벌거벗고, 맑은 하늘 아래, 처음이다. 이것이 자유인가. 뼛속까지 시린 기운이 파고들지만 개의치 않는다. 얼굴과 가슴, 사타구니를 씻는다.

그 때, 떡갈나무 잎사귀 사이로 언뜻 인기척이 난다. 왕은 흠칫 놀란다. 자객인가? 평생 처음 맞는 황홀한 순간인데, 내 목을 노리는 놈이 여기까지? 조그만 아이가 형상을 드러낸다. 왕은 숨을 고르고 몸을 움츠린다.

“너, 넌 누구냐? 이 산중에?”
“아랫마을에 사는 아이예요. 아저씨는 누구세요? 왜 혼자 목욕하세요?”

휴우! 왕은 긴장을 푼다.
“아저씨, 등 밀어드릴까요? 아저씨 몸에 점이 많네요.”
얼룩진 피부를 보고 아이가 그렇게 말한다.
“허허, 그래 점이 많지. 시원하게 등을 밀어다오.”

왕은 등짝을 아이에게 맡겼다. 고사리 같은 아이의 손이 정성스럽게 등을 민다. 시린 물을 끼얹으며 등을 민다. 간지럽고 시원하다.

“아가야, 됐다. 허허! 산중에서 아이를 만나 등을 밀다니. 그런데 아가야, 산을 내려가서 누구에게도 지금 일을 말해서 안 된다. 계곡에서 왕을 만나 왕의 등을 밀어주었다고 말해선 안 된다. 내 뜻은 아니지만 너는 왕의 몸에 손을 댔다는 죄목으로 죽음을 당한다. 명심해라.”
“예, 전하. 전하께서도 약속하십시오. 상원사 계곡에서 문수동자가 등을 밀어주었다고 결코 발설하지 마십시오.”

왕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아이는 이미 흔적도 없다. 아이의 손이 닿은 왕의 몸은 말갛다. 시궁창 같던 온몸이 뽀송뽀송하다. 세조는 아이가 사라진 쪽을 향해 합장했다. ‘아! 문수동자시여….’

상원사 목조 문수동사상 국보221호
왕은, 상원사 일대와 오대산 전 암자를 뒤졌지만 동자를 찾지 못했다. 이름난 화공을 불러 자신이 보았던 문수동자의 모습을 자세히 설명하고 화상을 그리게 했는데 두 번을 그려도 모양이 같지 않더니 세 번째 가서야 겨우 비슷한 형상을 그렸다. 이렇게 그려진 문수동자 화상은 상원사에 받들어 모시고 강릉 신석평 7백석지기 땅을 하사하여 문수동자를 위해 매일 불공을 드리도록 했다. 화상은 지금 소실되고 본당 오른쪽에 목각 문수동자상이 모셔져 있다.

상원사와 세조의 인연은 다시 이어진다. 100일 기도 덕분에 문수동자를 친견하고 병이 나았다. 이듬해 세조는 기적의 성지인 상원사를 다시 찾았다. 불전에 참배코자 법당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난데없이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지엄한 용포 자락을 물고 늘어진다. 깜짝 놀란 시종들이 막대기를 후려치며 고양이를 쫓았으나 앙칼진 비명을 지르며 옷자락을 놓지 않는다. 왕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병사들을 시켜 법당 안을 샅샅이 뒤지라했다. 그러자 불상을 모신 수미단 속에 자객이 숨어있었다. 자객을 붙잡아 끌어내자 용포를 물고 늘어진 고양이는 사라졌다.

세조는 상원사 사방 40리의 임야와 강릉 일대 만석전답을 하사하고 묘전(猫田)과 고양이 석상을 조성했다. 또한 세조는 신미대사와 상의하여 상원사를 크게 중창하고 안동에 가 있던 상원사 대종을 옮겨오도록 명했다. 세조 12년(1466) 상원사 중창 낙성식에 왕이 직접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상원사에 행차했다.

세조의 숭불 업적은 화려하다. 신륵사, 내원사, 쌍봉사, 해인사 등 여러 사원에 노비를 하사했다. 건봉사, 표훈사, 회암사, 도갑사 등을 중수하고 용문사와 흥천사에 종을 기증했다. 세조 7년에는 천민들의 출가를 허락하고 9년에는 대원각사를 중창했다. 현존하는 원각사지 13층탑(국보 2호)도 세조 때 조성된 것이다.(세조12년, 1467)

경전의 언해사업도 화려하다. <법화경>, <선종영가집>, <금강경>, <반야심경> 등을 한글로 번역했다. 석가모니의 전기인 <석보상절>은 세조의 역작이다. 모두가 불교적, 국어학적 보배다.

세조의 숭불, 불교 융성의 치적을 어떻게 이해할까. 진정한 신앙심의 발로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발심과 더불어 선택적 측면도 있다. 세조는 유교적 입지가 취약하다. 불교 융성책은 유교적 입지가 허약한 세조의 선택이기도 하다. 수천 년이 지나도 그가 행한 패륜적 행적은 삭제되지 않는다. 형제들을 죽이고,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고 급기야 죽여 버렸다. 명분과 예를 중시하는 유교적 입장에서는 용납될 수 없다. 세조의 친불정책은 유교 이념에 투철한 성리학자들을 견제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끝없는 참회를 통해 업장을 녹이려는 치열한 수행의 방편이었을 것이다.

광릉의 무인석 세조를 닮아 얼룩이 심하다
광릉은 애초부터 세조가 편히 안장될 곳은 아니었다. 왕릉 택지에 관여된 이들은 극락과 지옥을 오가야 한다. 채택되면 일약 벼락출세요, 흠결이 도출되면 죽음도 각오해야 한다. 조선 왕실은 툭하면 왕릉으로 신권을 눌렀다. 신하들의 군기를 잡는 방법 중에 왕릉 점령보다 더 막강한 특효약은 없다. 광릉은, 주변 산모양이 기이하고 빼어나다는 품평에 따라 정흠지의 선산이 채택되었다.

정흠지는 정창손의 아버지다. 정창손은 세조 때 영의정을 지냈고 광릉 택지 시 좌익공신에, 봉원군으로 시퍼렇게 살아 있는 실세였으나 그의 문중 선산이 왕릉으로 택지되었다. 이미 8기의 무덤이 자리한 선산을 송두리째 이장당한 정창손을 달래기 위해 예종은 호조에 명한다. ‘정창손에게 관곽 8개와 유둔(기름칠한 천막)8개, 종이 100권, 쌀과 콩을 100가마 내려주어라.’ 또 승정원에 명하여 경기관찰사는 선산 이장에 필요한 인부 50명을 뽑아 보내게 했다. 그러나 이것은 특별한 경우다. 인근 수백여 민초들의 무덤은 국물도 없다.

세조의 오른 쪽 언덕에 누운 비 정희왕후 윤씨 또한 대단한 용맹가, 지략가다. 계유정난 당시 거사가 누설되었다며 손석손 등이 만류하자, 중문에 이른 수양대군에게 직접 갑옷을 입혀 거사를 결행케 했다. 덕종, 예종과 의숙공주 등 2남1녀를 두었다. 맏아들(의경세자, 덕종)이 20세로 요절하고 둘째 아들 예종이 19세에 즉위하자 최초로 수렴청정했다. 예종이 재위 1년2개월 만에 죽자 맏아들인 덕종의 둘째 아들(그녀의 손자) 자을산군을 즉일로 즉위케 했다. 그가 성종이다. 남편, 아들, 손자의 즉위에 직접 힘을 쏟아 부은 대단한 여인이다. 정희왕후는 1483년(성종14) 온양 행궁에서 춘추 66세로 승하했다. 세조는 그녀보다 15년전, 1468년 9월7일 병세가 악화되어 왕세자(예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그 이튿날 수강궁에서 보령 52세로 승하했다.
글=이우상(소설가)/사진=최진연(사진작가) | asdfsang@hanmail.net
2007-08-10 오후 3: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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