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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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석곽 사용 말라”
조선왕릉에서 불교를 읽다 14-7대 세조 광릉(1)
광릉 들어오는 울창한 숲길. 홍살문과 정자각에 이르는 참도가 없다.

세조 1417~1468년 (52세)
재위 13년 3개월 1455. 6(39세)~1468.9(52세)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 것이며, 병풍석을 쓰지 말라.” 세조의 유명(遺命)이다. 세조는 1468년 9월 7일 병세가 악화되어 왕세자(예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그 이튿날 수강궁에서 52세로 승하했다.

역사의 영욕과 파노라마, 그 기승전결을 온몸으로 보여 준 이가 세조다. 권력의 잉태와 성장, 소멸을 일목요연하게 보여 준 이가 세조다. 영광과 비난을 한 몸에 듬뿍 받으며 지금 ‘빛나는 무덤(光陵)’에 누워 있다. 그의 유언은 영욕의 생애를 압축한 묘비명 같다.

광릉은 조선시대 440여 년 동안 풀 한 포기 채취도 금지되었을 정도로 보호되어 산림이 울창하고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희귀조 크낙새가 이곳에서 서식한다. 능역 내 약 100정보에 150종의 활엽수림, 수령 수 백 년이 기본인 소나무가 장관을 이룬다. 이곳의 지명이 ‘광릉내’로 불리는 것은 광릉이 있기 때문이다. 산림청의 국립수목원이 여기에 자리 잡은 이유도 광릉 덕분이다. 세조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울울창창 속에 있다.

광릉의 원찰인 봉선사의 대종
권력을 얻기 위해서 형제, 조카를 무자비하게 살육한 권력의 화신, 치솟는 신권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한 제왕, 궐내에 사찰을 두고 스님을 궁으로 초대해 설법을 들은 호불의 군주, 왕자 시절 불경 언해작업에 직접 참여한 학자풍의 군왕. 하나의 잣대로 규정할 수 없는 위인이 세조다.

세조는 불후의 성군인 세종의 18남 4녀 중 둘째 아들이다. 형이 문종(5대), 조카가 단종(6대)이다. 대군시절의 이름도 다양하다. 처음에는 진평대군이었으나 세종 15년(1433) 함평대군으로 고쳤다가 진양대군으로 다시 고쳤으며, 세종27년(1445)에 수양대군으로 바꾸었다. 이름이 운명을 바꾼다는 것을 암시한다.

세조의 등극은 우연보다는 필연에 가깝다. 용상으로 가는 설계도를 쥐고, 길이 없으면 만들고 검불이 있으면 헤치고 갔다. 역사는 승자의 몫이라는 비난도 있지만 이기며 만들어가는 것이 역사이기도 하다. 세조에 항거해 몸을 던진 사육신도 애초부터 저항 세력이었던 것은 아니다.

12세의 어린 나이로 단종이 즉위하자 조정은 고명대신에 의해 장악된다. 권력이 신하들의 수중으로 넘어간다.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가 조정을 좌지우지한다. 태종이 왕비 집안을 몰살하면서까지 다져놓은 왕권이 곤두박질친다. 고명대신들은 황표정사(黃票政事)라는 것을 행한다. 의정부에서 대신에 임명할 인물의 3배수를 올리되 자신들이 의중에 둔 인물의 이름 아래 노란 점을 찍어 놓으면 단종은 결재만 하는 식의 정치다. 김종서, 황보인 등 핵심 고명대신들의 아들과 측근이 대거 등용되었고 아들들은 초고속 승진을 한다. 한 사관의 기록에 따르면, ‘왕은 손 하나 움직일 수 없는 허수아비로 전락하고, 백관은 의정부는 알았으나 군주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한 지 오래됐다’고 했다.

재상 중심 체제를 주장하던 성삼문 등 집현전 학자들도 김종서의 지나친 전횡을 비판했다. 할아버지 태종 때 유년기를 보내고 아버지 세종 때 청소년, 청년기를 보낸 30대 중반의 수양대군은 피가 끓는다. 어떻게 일군 왕조인데, 칼과 피를 두려워하지 않고 세운 왕조의 몰락을 처참하게 보고만 있을 위인이 아니다.
능침과 난간석이 기울어져 있다. 평탄작업을 하지 못하게 한 망자의 뜻인듯.

1453년(단종 2년)10월 10일. 역사의 물꼬가 바뀐다. 이른바 계유정난이다. 현대사에도 역사의 가닥이 휘꺾인 때가 10월이었지(10.26 사건). 수양대군의 로드맵은 치밀했다. 그해 초 수양대군은 자청해서 명나라에 간다. 단종의 즉위를 인정한다는 명나라 황제의 뜻에 감사하다는 사은사로 간 것이다. 권력투쟁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시점이다. 수하들이 극구 만류했지만 덤덤한 표정으로 명으로 떠났다. 고명대신들을 안심시키려는 고도 전략이다. 전략은 적중했다.

명에서 돌아온 4월에 신숙주를 막하에 끌어들이고 홍달손, 양정 등 칼잡이들을 양성했다. 6개월 뒤, 10월 10일 밤, 거사는 전광석화 같이 실행된다. 수양대군은 부하 유숙, 양정, 어을윤 등을 대동하고 김종서를 찾아가 철퇴로 살해한다. 영의정 황보인, 병조판서 조극관, 이조판서 민신, 우찬성 이양 등을 어명을 빙자하여 차례로 대궐로 불러들여 참살한다. 한국전쟁 때 폭파된 한강 다리로 떨어지는 목숨들처럼 차곡차곡 죽어갔다. 피비린내 자욱한 밤이 가고 시린 가을 아침, 세상이 바뀐다. 5.16, 12.12가 그랬든 것처럼. 세상이 바뀌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 없는 모양이다. 하룻밤이면 충분하다.

첫째 동생 안평대군을 붕당 모의의 주역으로 지목해 강화도에 유배시켰다가 사사했다. 넷째 동생 금성대군도 유배 후 사사, 단종을 상왕으로 밀어낸 후 다시 노산군으로, 그리고 서인으로 전락시켜 죽였다. 그의 손에 묻힌 피가 너무 많다. 어떻게 업장을 녹이랴.

혼유석을 받친 고석의 귀면 조각이 익살스럽다
역사는 그것을 ‘세조의 왕위 찬탈’이라 부른다. 즉위 기간 내내 죄책감에 시달린다. 야사는 이렇게 전한다. 단종의 어머니이자 형수인 현덕왕후(문종 비) 권씨의 혼백에 시달려 맏아들 의경세자가 20세로 요절한다. 병상에 있을 때 21명의 스님이 경회루에서 공작재를 베풀었지만, 그는 끝내 죽는다. 분노한 세조는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쳐 관을 파내 바닷가에 버린다. 또한 현덕왕후가 지신에게 침을 뱉는 꿈을 꾼 후 온몸에 피부병이 생겨 고생한다. 피부병을 고치려고 오대산 상원사를 찾았다가 문수동자를 만나 쾌유한다. 그 장면은 다음 호에서 살펴보자.

정통성이 없는 정권은 괴롭다. 국제적 인정과 국내 민심을 얻는데 눈물겨운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정통성 있는 정권은 자칫 오만해지기 쉽다. 같은 노력이 없으면 오십보백보다. 세조는 문치가 아닌 강권으로, 인재 등용은 실력 중심이 아닌 측근 중심이었다. 비서실(승정원) 중심의 철저한 측근정치를 펼쳤다.

조선 왕조 최고의 대호불왕(大護佛王)은 세조다. 대군 시절부터 신미대사, 수미대사 등 고승과 친교가 두터웠다. 즉위하자 바로 배불정책을 외면했다. 호불은 선, 배불은 악이란 단순 등식에서 벗어나 세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말없이 누워 있는 그를 광릉 숲 한적한 곳으로 모셔와 담소를 나눠볼까.

***광릉은***
조선 7대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능이다. 사적 197호.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산 99-2 소재, 면적 315,124평. 세조의 유언대로 석곽을 쓰지 않고 조선 최초로 회곽(관과 광중 사이를 석회로 다지는 회격으로 석실과 석곽을 대신하는 양식)을 썼다. 왕과 왕비의 두 무덤에 정자각 하나를 만든 ‘동원이강릉’으로도 최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참도가 없다. 명확한 기록이나 증거는 없으나 유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글=이우상(소설가) 사진=최진연(사진작가) | asdfsang@hanmail.net
2007-07-25 오전 10: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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