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19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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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왕후여, 이제 한을 푸소서
6대 단종 비 정순왕후(1440~1521) 송씨- 사릉(思陵)
사릉 전경

제향을 서둘러 마치자 기어이 하늘이 터졌다. 아침부터 시커멓게 심술인지, 독기인지, 원한인지, 잔뜩 머금고 있던 하늘이 북북 찢어진다. 천둥 번개가 연거푸 으름장을 놓더니 소나기가 쏟아진다. 3월 비 치고는 세차다. 찬비는 이내 우박으로 변한다. 바둑돌만한 우박이 파편처럼 사정없이 내리 꽂힌다. 참반원(제향에 참가한 사람)들은 체면 불구하고 관리소 옆 비닐하우스로 냅다 뛴다. 초대받지 않은 참반원인 나도 총탄을 피하는 전장의 병사처럼 머리를 감싸며 뛰었다.

“왕후님이 아직도 원한을 풀지 않았구먼.”
“쉽게 풀리지 않겠지. 80평생 수모와 핍박으로 살다가 죽어서도 남편을 300리 밖에 두고 그리워해야하니 오죽하겠는가.”

“그러게나. 영월로 천장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여인의 한풀이니 너무 서운해맙시다. 선생은 어느 문중에서 오셨습니까?”
비닐하우스 안에 마련된 제향 뒷풀이 자리다. 검은 양복으로 정장한 이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는데 불쑥 내게 묻는다. 당황해하며 그냥 추모객이라고 얼버무렸다. 술잔을 주고받으며 오래된 한을 되짚는다.

사릉 제향에 참가한 이들은 세 부류다. 단종과 정순왕후 사이에는 자식이 없다. 살벌한 분위기에서 가례를 올리고 동거한 기간이 1년도 안 된다. 후사가 있을 리 만무하다. 단종의 직계 후손은 없다. 제향을 주관하는 전주 이씨 문중 사람들, 정순왕후의 친정인 여산 송씨 문중 사람들 그리고 이곳이 선산인 해주 정씨 문중 사람들이 모여 매년 정순왕후의 넋을 위로하는 제사를 올린다.
사릉 능침 근처에 오르면 주변 풍경이 의아하다. 능 주변에 일반 무덤이 여러 기 있다. 능으로 택지되면 사방 10 리 안에 있는 주변 무덤은 강제 이장된다. 마을마저 철거된다. 그런데 사릉 바로 곁, 불과 100~200미터 곁에 무덤들이 있다. 사연이 많다.

1440년(세종 22년) 판돈녕부사 송현수의 딸로 태어난 정순왕후는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해 가히 종묘를 보존할 인물이라 하여 1453년(단종 1년) 간택되어, 이듬해 15세로 왕비로 책봉된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고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나자 의덕왕대비에 봉해진다. 단종이 사사된 후 세조3년(1457) 노산부인으로 강봉된다. 송씨의 운명은 기름을 안고 불로 뛰어든, 예견된 길이다.
제향 참반원의 숫자도 조촐하다

청계천 영도교(永渡橋)에서 18세 소녀 왕비 송씨는 영월로 떠나는 17세 소년왕 단종을 영원히 이별한다. 영도교, 영영 이별한 다리, 임이 영원히 건너간 다리라고 후세 사람들은 의미를 붙인다.
궁궐에서 쫓겨난 송씨는 지금의 동대문 밖 연미정동(숭인동) 동망봉 기슭에 초가삼간을 짓고 한 많은 여생을 이어간다. 정업원이라 이름 붙여진 그곳에서 함께 쫓겨난 세 명의 시녀와 살았다. 시녀들이 해온 동냥으로 끼니를 잇는 비참한 생활이었다. 근처 동망봉(東望峰)에 올라 아침저녁으로 단종이 무사하기를 빌었지만 통곡은 허사였다. 왕비의 오열과 궁핍을 인지한 마을 여인네들이 줄을 서서 쌀과 푸성귀를 사립문 위로 던져 놓고 갔다. 서슬이 녹지 않은 세조는 이 보고를 받고 부녀자들이 정업원 근처에 얼씬거리는 것을 금지했다.

민초들은 다시 지혜를 짜냈다. 정업원 인근에 금남(禁男)시장인 채소시장을 열었다. 남자의 출입을 금했으니 감시하는 관리가 접근할 수 없다. 북적거리는 틈을 타 여인네들이 곡식과 채소를 정업원 담 너머로 던졌다. 이후 송씨는 자줏물 들이는 염색업으로 생계를 이었다. 그 골짜기를 지금도 자줏골이라 부른다.

세월이 흘러 세조는 자신과 가족에게 액운이 겹치자 퍼런 서슬이 녹아 참회한다. 송씨의 비참한 생활을 전해들은 세조는 정업원 근처에 영빈전이란 아담한 집을 짓고 궁핍을 면할 넉넉한 식량을 내렸으나, 그것을 넙죽 받을 송씨가 아니다. 오로지 정신력으로, 이가 바스러지도록 원한을 짓씹으며 80평생을 보냈다. 무서운 에너지다. 차라리 요절이라도 했으면 한의 깊이가 덜했으련만. 공식 통계는 없지만 지금도 우리나라 무속인들이 모시는 신이 ‘송씨 부인’이 가장 많다고 한다. 송씨 부인이 바로 정순왕후일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한 많은 여자의 일생, 엉겁결에 권력의 핵심에 발을 들여 놓았다가 천추의 한을 남긴 여인, 정순왕후는 82세(1521년 중종16)로 생을 마감한다. 죽을 당시 신분은 왕후가 아니었다. 국장의 예를 갖춘 능을 조성할 신분이 아니다.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의 시댁인 해주 정씨 집안에서 장례를 주도했고 해주 정씨 묘역에 안장됐다.

사릉의 문인석. 다른 왕릉에 비해 규모가 작다
그 후 177년이 지난 1698년(숙종24년) 11월 6일, 단종이 복위되자 송씨도 정순왕후로 추복되고 종묘에 신위가 모셔지고 능호를 사릉이라 했다. 능이 되었는데 주변 무덤은 어떻게 처리하나? 사릉 총리사(관리 책임자) 최석정이 숙종에게 아뢰었다.

“사릉은 본래 문종의 외손이었던 정미수의 사유지이옵니다. 정순왕후께오서 살아서 정미수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승하했습니다. 능으로 봉해졌다 해서 정씨 묘소를 옮기면 정순왕후께오서도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옵니다. 정씨 묘들을 사릉 능역에 그대로 존치함이 가할 줄 아옵니다.”

이에 숙종은,
“오래된 묘는 옮기지 않은 예가 있다. 그대로 두라. 후손들에게 또 다른 한을 만들어서야 되겠느냐.”
그래서 사릉 능역 주변은 일반인의 묘소가 있다. 유일한 예다.

정업원 터에는 지금 청룡사라는 작은 절이 있다. 21대 영조가 이곳을 방문하여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비각을 세웠다. 비각에는 영조가 눈물을 흘리며 썼다는 비문이 남아있다. 업을 말끔히 씻어야 극락왕생할 터인데.

한 시간 정도 내리쏟던 우박과 비가 멈춘다. 제향을 마치면 서둘러 돌아가는 가는 것이 상례인데 오늘은 참반원 모두 소나기 덕분에 비닐하우스 속에서 한참 머물렀다. 나뒹구는 빈 소주병이 흥건하다. 정순왕후여! 이제 한을 푸소서.

***사릉(思陵)은***
6대 단종 비 정순왕후 송씨의 능이다. 사적 제209호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사릉리 산65-1, 면적 146,529㎡(44,325평). 정순왕후는 18세에 홀로 되어 소생 없이 82세까지 살았다. 사릉은 중종 때 조성되었다. 7대에 걸친 왕대를 산 정순왕후를 중종은 대군부인의 예로 장례를 지낸 뒤 후에 왕후 능으로 추봉되어 다른 능에 비해 단출하게 꾸며져 있다. 능침을 3면의 곡장이 둘러싸고 있으나 병풍석, 난간석이 없다. 무인석도 없고 160센티미터 정도 되는 자그마한 문인석 한 쌍이 능을 지킨다. 사릉은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가 출가한 해주 정씨 가족묘역 내에 있다.
글=이우상/소설가 사진=최진연/사진작가 | asdfsang@hanmail.net
2007-07-10 오후 1: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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