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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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년간의 왕세자, 재위 2년 4개월
조선 왕릉에서 불교를 읽다 11 5대 문종 현릉
비각 너머로 보이는 현릉

문종 1414~1452 (39세 졸)
재위 2년 4개월 1450.2(37세)~1452.5(39세)

문종은 세종의 장자다. 조선 왕조 최초로 적통 장자의 왕위 계승이 실현되었다. 문종은 1414년(태종 14년) 10월3일 한양 사저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소헌왕후이며 이름은 향(珦), 자는 휘지(輝之)다. 1421년(세종3년) 10월27일 왕세자로 책봉(8세)되어 1450년 2월22일 37세로 왕위에 올랐다. 시시콜콜 연월일을 밝히는 이유는 그에게 시간은 참으로 애석한 토막토막이기 때문이다. 왕들의 재위 기간과 업적은 비례한다. 재위 기간이 짧은 왕들 몇몇을 살펴보면, 12대 인종-9개월, 8대 예종-1년 2개월, 5대 문종-2년 5개월, 27대 순종-3년 1개월, 6대 단종-3년 2개월 순이다. 사연은 많으나 업적을 쌓을 틈이 없었던 미미한 왕들이다.

문종에겐 기이한 기록이 많다. 왕세자 자리에 29년간 있었다. 29세 되던 해인 1442년부터 8년간은 아버지 세종의 명으로 섭정을 했다. 준비된 왕 노릇 하기에 충분한 수업을 했다. 그러나 제왕 수업은 착실하게 받았지만 건강을 준비하지 못했다. 원래 병약했고 세자 시절 업무 과중으로 건강이 심히 악화되었다. 즉위 후에는 병세가 더 심해져 재위 기간 대부분을 병상에서 보내다 서른아홉에 병사했다. 역사의 역류가 시작된다.

문종의 정비 현덕왕후 권씨는 1431년 15세에 동궁에 들어와 양원이 되었다가 세자빈 봉씨가 동성애 사건으로 폐위되자 1437년 세자빈으로 책봉된다. 현덕왕후는 경혜공주와 단종을 낳았다. 단종을 낳고 3일만에 산후병으로 24세에 죽었다. 약도 쓸 틈 없이 갑자기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 내외는 5일간 상복을 입었고 세자였던 문종은 30일간 상복을 입었다.

세자빈 권씨가 죽은 후 문종은 더 이상 비를 들이지 않는다. 세자 시절인 28세에 권 씨를 잃고 39세에 죽을 때까지 새장가를 들지 않는다. 12년 동안 홀아비로 산다는 것은 당시 법도로 불가사의다. 제왕에게 여인은 호불호, 호색과는 별개다. 아들 생산은 종묘사직을 이어갈 의무다. 홀아비 세자, 홀아비 임금이 문종이다. 아버지 세종이 엄연히 살아있음에도 배필을 들이지 않은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하나. 여자를 멀리하는 성품? 고집? 병약함? 답이 선뜻 나오지 않는다. 상태가 어떠하든 형식적인 세자빈, 형식적인 중전은 필수 요소인 시대가 아닌가. 역사의 회오리를 예감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음에 분명하다.

문종은 죽어서도 홀아비 신세를 겪었다. 현덕왕후가 세자빈 신분으로 단종을 낳고 죽자 경기도 시흥 군자면에 안장된다.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현덕왕후로 추존되고 소릉(昭陵)이란 능호를 받는다. 1452년 문종이 종기가 터져 경복궁 강녕전에서 승하하자 건원릉 동남쪽 줄기에 묻힌다. 태조의 건원릉에 이어 동구릉에 들어온 두 번째 능이다. 이 때 시흥에 있던 현덕왕후도 천장해 현릉은 합장릉이 된다. 여기까지는 좋다. 생전에 못 다한 부부의 금슬을 다시 잇는다.

그러나 다시 이은 금슬은 6년만에 파국을 맞는다. 세조에 의해 합장된 현릉이 파헤쳐지고 썩을 대로 썩은 왕후의 시신은 시흥 군자 바닷가 10 리 바깥에 내팽겨 쳐진다. 사연은 이렇다. 세조 3년(1456) 현덕왕후의 친정어머니 아지와 친정 동생 자신이 단종 복위사건에 연루된다.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고 현덕왕후 집안은 서인(庶人)으로, 현덕왕후도 서인이 되고 무덤을 파헤쳐 서인의 예우로 다시 장사지낸다. 종묘에 있던 신주마저 철거되었다. 권력에 도전하는 것은 바늘 하나도 용납되지 않는다. 죽은 문종은 무덤마저 편치 못했다. 합장릉인 현릉은 단릉이 된다. 문종은 다시 홀아비가 되어 56년이란 긴 세월을 보낸다.
참도를 통해 정자각으로 들어서는 참반원들

중종 7년(1512), 현덕왕후 복위 문제가 처음 제기되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이듬해 종묘에 벼락이 치는 흉한 일이 있었다. 그래서 복위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했다. 발단은 종묘제례 때문이었다. 역대 왕들의 신위는 모두 짝을 이루고 있는데 문종 신위만 홀아비로 서 있다. 신위에 송구스러워 짝을 맞추어야한다는 명분이었다. 현덕왕후의 신위를 종묘에 다시 세우려면 능을 복원시켜야 한다. 그래서 시흥 군자 앞 바닷가에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시신을 찾아야 능을 쓰지. 56년 전 무성의하게 내다버린 썩은 백골이 아닌가. 기록은 없으나 심덕 좋은 어느 민초가 위험을 무릅쓰고 초라하게 위장해서 묻었을 것이다. 진위는 알길 없으나 유골 몇 점 수습해서 문종이 묻힌 현릉으로 모셔온다.

유골을 모셔와 원래대로 합장한 것이 아니다. 원상복구가 아니라 문종이 묻힌 곳에서 수십 미터 떨어진 곳에 능을 조성했다. 문종의 왕통은 아들 단종을 끝으로 단절되었다. 국조오례의 왕릉 양식도 단절되었다. 두 번 죽은 현덕왕후는 문종의 좌측 언덕에서 묻혀 모진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시어머니(현덕왕후)와 며느리(단종비 송씨)의 비극적 운명이 닮았다. 세조가 집요하게 현덕왕후를 증오한 이유에 대해서 야사는 이렇게 전한다. 단종을 낳고 3일 만에 죽었으니 피비린내 자욱한 역사의 현장에 그녀는 없었다. 그녀의 원혼만 현장을 지켰다.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고 단종을 죽이자 원귀의 비수가 대궐을 휩쓴다. 밤마다 세조와 그 가족들의 꿈에 나타나 식은땀 흥건하게 한다. 급기야 세조의 큰아들 덕종이 원귀에 시달려 죽고, 세조 역시 꿈에서 그녀가 뱉은 침 때문에 전신에 피부병이 걸려 고생했다. 여법한 권력 승계를 이루지 못한 비극의 되풀이다.

세종의 맏아들 문종 역시 아비를 닮아 어질고 착한 모범생이었다. 학문을 좋아해 학자들을 가까이 했으며 측우기 제작에 직접 참여할 정도로 천문, 역산, 산술에 뛰어났고 서예도 능했다. 거동이 침착하고 판단이 신중하여 남에게 비난 받는 일이 없었지만 문약에 병약까지 겹쳐 웅장한 생애가 되지 못했다. 자애로운 자는 권력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서늘하게 보여준 이가 문종이다.

언관들의 언로에 대해서도 관대했다. 척불언론이 대표적이다. 세종 말기에 세종과 왕실에 의해 호불정책이 세력을 펼쳤다. 궐내에 내불당이 설치되고 불교 융성정책에 대해 유생들이 불만이 쌓였다. 문종이 즉위하자 유학 중심 언관들이 왕실의 불교적 경향을 불식하고 유교적 분위기를 조성하려했다. 그런 주장은 유약한 문종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혜안이 없어 무서운 계략과 음모가 착수되는 줄 그는, 몰랐다.
한국인이라면 명당에 대해 한 마디쯤 거들 줄 안다. 역대 군왕들도 모두 풍수에 대해 관심이 지대했다. 태조, 세종, 세조, 중종, 선조, 영조, 정조는 유난히 풍수에 조예가 깊었다. 세조는 이미 진양대군(29세 이전에 불리던 수양대군의 이름) 시절인 26세 때 국풍 실력을 보였다. 세종 24년 5월 25일 세종이 자신의 수릉 택지에 그를 참여시켰다. 수릉 제도 조직이 갖추어지자 수양대군은 왕릉 조성 시 광에 사용할 내부 관과 석실 제조를 담당하는 책임자를 맡는다. 대군 시절 이미 세종과 소헌왕후, 두 번이나 국상의 풍수 실무를 맡았다. 그는 풍수에 국풍 못지않은 실력을 갖춘 인물이다. 세조 3년 그의 맏아들 의경세자가 20세로 요절했다. 평소 병약함에 현덕왕후의 저주가 겹친 때문이다. 세조는 국풍들이 잡은 명당을 직접 답사한 후 주맥이 산만하여 혈이 맺혀지지 않는다며 물리쳤다. 자신이 직접 택지하여 의경세자(1471년 성종에 의해 덕종으로 추존)는 현재 서오릉(경릉)에 묻혔다.

잔을 올리는 초헌관들
문종이 승하하자 왕릉을 서초구 내곡동 대모산 아래쪽에 조성하려 했다. 그곳에는 1442년에 안장된 태종 왕릉(헌릉)이 있고 1450년에 안장된 세종 왕릉(구 영릉)이 있다. 문종은 생전에 할아버지와 아버지 곁에 묻히려고 세종 왕릉 서편을 능지로 택했다. 문종은 그곳에 묻히지 못했다. 문종 승하 당시 지관은 목효지, 이현로다. 두 사람 모두 매질을 당하고 난 후 목효지는 노비로, 이현로는 효수당했다. 목효지를 국문에 부쳐 치죄하도록 한 것도 수양대군이고 이현로를 직접 매질하여 역적으로 몰아 효수케 한 것도 수양대군이다. 또한 국풍 최양선을 파렴치 행위자로 몰아 삭탈관직 후 유배시켰다. 그곳을 파보니 물이 나고 바위가 있다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다. 형님인 문종의 기를 꺾고 자신의 등극을 위한 정지 작업이었다.

수양대군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 택지한 동구릉 내 문종의 능, 현릉은 어떤가? 44년 전에 장사지낸 태조의 왕릉과 입지의 겉모습은 비슷하다. 두 왕릉으로 들어오는 산줄기는 똑 같이 북쪽에서 흘러내린다. 두 왕릉의 산줄기와 좌향은 같으나 뒷녘 산줄기의 꺾임이 반대다. 태조의 능은 명당이나 문종의 능은 흉당이다. 태조의 능은 생룡(生龍)의 장생발복 터이나 문종의 능은 사룡(死龍)에 절명, 즉 명이 끊긴다는 대흉 중에서도 대흉에 속하는 터다. 그 이후 벌어진 역사는 이런 계략의 풍수를 증명한다.

***현릉(顯陵)은***
조선 5대 문종과 현덕왕후 권 씨의 능이다. 현재는 양 언덕에 묻힌 동원이강릉이지만 조성 당시는 합장릉이었다. 동구릉 능역에 두 번째로 조성된 능이다. 참도, 홍살문, 정자각, 능침이 곧게 뻗어 있지 않고 참도가 90도 각도로 두 번 꺾어져 있다. 능침에 누워 있는 이들의 운명을 암시하는 것 같다.
강지연 기자 | jygang@buddhapia.com
2007-06-20 오전 10: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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