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6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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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를 '석씨'로…불교 탄압 절정
4대 세종 영릉(1)

세종1397~1450년, 54세.
재위 31년 6월. 1418년 8월(22세)~1450년 2월(54세)

완전한 영웅, 무결점의 완인(完人)을 우러르고 싶은 것이 민초들의 욕망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욕망을 완벽하게 충족시킬 수 있는 인물은 없다. 그래서 신(神)이란 추상을 조성하기도 하고 부처<각자(覺者)>란 실체 구현에 매달리기도 한다.

세종은 태종의 셋째 아들이다. 세 살 많은 큰형 양녕대군은 일탈의 극치를 달리다가 폐세자가 되고 한 살 많은 둘째형 효령대군은 동생 충녕이 세자에 책봉되자 제행무상을 통감하고 절로 찾아들어 불교에 귀의했다. 회암사 중수를 건의하고 원각사 조성도감 제조(총책임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1465년엔 ‘바라밀다심경’을 언해했다. 권력에 대한 유혹을 경계하고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여 세종~성종까지 여섯 왕을 거치며 91세까지 살았다.

세종 치세 불교는 훈민정음 창제(세종 25년, 1443년, 세종 47세) 이전과 이후로 구분된다. 창제 이전 세종의 모습은 이러하다. 세종은 아버지 태종이 죽고 나서 왕위를 계승한 것이 아니다. 태종은 재위기간 중 네 번의 걸쳐 선위파동을 일으켰다. 외척 세력을 제거하고 왕권을 튼튼히 하기 위한 전략이다. 예나 지금이나 선위파동, 탄핵파동은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온다. 태종은 52세에 세종에게 왕권을 넘겨준다. 자신은 상왕으로 물러앉아 왕권을 보호하고 왕이 정사를 제대로 처리할 능력을 보이면 권력의 보루인 군정 안정에 주력한다는 계획이었다.

세종은 빼어난 효자, 모범생, 영재다.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는 반항아가 아니다. 반항아의 모습은 큰형님 양녕에게서 질리도록 봤다.

세종은 즉위하자마자 부왕의 배불정책을 이어 더한층 불교 억압에 몰두한다. 태종 때 혁파한 사찰과 노비 중에서 완전히 처리되지 못한 나머지를 모두 처리했다. 연례행사인 도성 내의 경행을 폐지시켰다. 성 밖 승려는 성내 출입을 금하고 동진출가를 엄금했다.

세종 6년 4월에는 예조의 건의를 받아들여 조계종, 천태종, 총남종을 합쳐서 선종, 화엄종, 자은종, 중신종, 시흥종을 합쳐서 교종으로 만들었다. 이념과 종지에 따른 통폐합이 아니라 80년대 신군부의 언론 통폐합 같은 무작위 재단이었다.

남았던 7종을 선종, 교종의 두 종파로 축소한 것이다. 전국에 36개 사찰만 남겨 선종 18사에 전답 4250결, 각 절의 스님 수 도합 1970명, 교종 18사에 전답 3700결, 스님 수 1800명으로 제한했다.


서울 안의 흥천사를 선종의 도회소(총본사)로 삼고 흥덕사를 교종의 도회소로 삼아서 나이 듬직하고 덕행 높은 승려로 하여금 양종의 제반 사무(寺務)를 관장하게 했다. 태종에 의해 전국 사찰이 242사로 축소되었는데 세종 때는 사정없이 줄여서 36사만 남는다. 선교 양종 36사, 전답 7950결, 총 승려 수 3770만 남는다.

종파, 사찰을 축소 폐합하니 거기에 속한 적지 않은 토지와 노비가 국가 재산으로 몰수되었다. 아버지의 뜻, 유학자들의 뜻에 순종한 모범생 세종의 중년 이전 모습이다. 세종조 초반에 두 차례에 걸쳐 불교 핍박에 항의하는 사건이 있었다. 승려들이 중국으로 가서 명나라 황제에게 국내의 심한 불교 박해 사정과 이에 대한 구원을 호소한 일이 있었다. 명황제 성조(成祖)는 독실한 불자였기 때문에 그 호소가 다소 효력이 있었다. 세종은 그 사건으로 배불정책을 늦추고 명황제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잠시 회유책을 쓰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은 불교에 대해서 참으로 인색하고 용렬하기까지 하다. 척불의 기록은 세세한 것까지 놓치지 않지만 불교의 기여는 1단짜리 기사로 취급하거나 외면한다. 국시, 왕의 의지가 절대적이던 시대의 유물이다. 불교 탄압의 절정은 성군 세종 때다. 석가모니를 석씨, 부처를 불씨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세종이 묻힌 영릉(英陵)은 방문객이 가장 많은 능이다. 주변 볼거리가 많아 여행, 소풍, 산책의 명소다. 수려한 남한강, 신륵사, 영월루, 명성황후 생가, 목아불교박물관이 머잖은 거리에 있다. 성군의 능답게 능역 조경 또한 일품이다. 왕위에 있었으나 능호를 얻지 못한 연산군묘, 광해군묘와는 확연히 다르다. 그들의 묘에는 관리소는 고사하고 게으른 공익요원 한 명 없다. 역사의 심판은 소멸 시효가 없다.

영릉이 처음부터 경기도 여주에 자리 잡은 것은 아니다. 1446년 왕비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헌릉(서울 서초구 내곡동) 서쪽에 조성하여 그 우실을 왕의 수릉으로 삼았다가 1450년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했다. 조선 왕릉 최초의 합장릉이다. 헌인릉이 있는 대모산은 육산이다. 물이 많아 능지로 부적합하다. 그래도 효성 지극한 세종은 아버지 태종 곁에 묻히고자 했다.

세조 때 영릉이 불길하다는 논의가 대두되었으나 서거정 등이 반대하여 옮기지 못하고 예종 1년(1469)에 현 위치로 천장했다. 20년 동안 아버지 곁에 있다가 떠난 효자의 심정이 비통했을 것이다. “아바마마, 소자는 떠나기 싫사옵니다. 망극한 불효를 어찌하오리까!” 세종의 탄식이 흩뿌려진 옛 자리에는 흔적조차 없다. 현재 국정원 영내에 영릉이 있었다. 돌조각 하나라도 흔적을 확인하고 싶어 알음알이로 국정원에 연락하니, 아무 것도 없다, 사진 찍는 것은 절대불가다 라는 대답이다. 천장 때 그 자리에 묻었던 옛 석물들은 1973년 세종대왕 기념 사업회가 발굴해서 청량리 세종대왕기념관에 전시하고 있다.

올해는 영릉 제향일(4월8일)에 맞춰 방문했다. 여느 제향보다 성대하다. 참반원(제향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어림잡아 1,000여명이 넘는다. 역시 대단한 세종대왕이다. 탄신일에는 주무 장관이 참석하고 한때는 대통령도 참석했다.

세종은 6명의 부인에게서 18남 4녀를 생산했다. 아들 숫자로는 조선 역대 왕들 중 넘버원이다. 그러나 부모복은 있었지만 자식복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두 아들(문종, 세조)이 왕위에 올랐지만 그들의 이름에는 어둠의 그림자, 피비린내가 엉겨 있다. 안평대군(계유정난 연루 36세에 사사), 광평대군(20세 요절), 금성대군(단종 복위 모의 32세에 처형)도 마찬가지다. 복업 짓는 일에 소홀해서 그런가.

머잖은 곳에 영릉의 원찰 신륵사가 있다. 조계종 제2교구 본사 용주사의 말사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사세가 쇠락하다가 1469년 영릉의 원찰이 되면서 절이 확장되고 이듬해 예종 비 정희왕후가 보은사로 개칭했다. 세종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을 담았다. 사찰이 유생들의 유흥장이 되고 승려가 천민 취급 받던 시대에 원찰로 정해진다는 것은 행운이다. 성종 이후 성리학이 득세하자 왕릉의 원찰 제도가 없어지는 풍토가 되어 신륵사는 옛 이름을 되찾았다.
글=이우상(소설가) 사진=최진연(사진작가) | asdfsang@hanmail.net
2007-05-07 오후 2: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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