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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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장(業障)은 짧고 과보(果報)는 길다
3대 태종 헌릉(2)

“아바마마, 아바마마! 태상왕 전하!”

태종의 흐느낌이 침전 밖까지 들린다. 강철 덫에 발목 걸린 맹수처럼 깊고 처절한 울음이다. 뜨겁고 끈적끈적한 눈물이 용포를 적신다. 내관들은 파랗게 질린 낯빛으로 안절부절못한다. 철벽같은 장애를 두려움 없이 까부시고 권좌에 올라 여기까지 왔는데, 숱한 저주의 아우성마저 환호로 여기며 예까지 왔는데, 내일은 또 어떤 보고가 올라올까. 밤이 이슥토록 용포도 벗지 못하고 앉아 주먹으로 눈가를 훔치고 있다.

더 이상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았는데, 내가 만든 핏물이 몸을 잠그고도 넘치거늘, 앞날은 캄캄하기만 하다. 이승에 없는 아버지를 목 놓아 부르지만 대답이 없다. 자식을 낳고 키워봐야 어버이의 마음을 알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가 뼈 속에 스민다.

세자 양녕의 기행(奇行)은 날이 갈수록 더하다. 기행의 도를 너머 만행(蠻行)이다. 아비의 속은 숯검정이 되어간다. 태조의 가슴에 박았던 대못이 자신의 가슴에 쇠말뚝이 되어 박힌다.

“전하, 세자 저하가 몰래 궁을 나가 여태 소식이 없습니다.”
“전하, 세자 저하가 저자의 기생집에 머무르고 있다하옵니다. 그 기생은 상왕(정종)전하께오서 아끼는 기생이라하옵니다.”

보고가 두렵다. 여염의 난봉꾼을 능가하는 행태가 연일 보고된다. 세자는 민가의 사내들조차 엄두를 못 낼 야만을 연일 저지르고 다닌다. 최고의 스승은 체험이다. 권력을 위해 아비에게 무자비했던 업보가 고스란히 돌아오고 있다.

태종은 왕권강화를 절대가치로 규정했다. 신흥 왕조의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은 가차 없이 처단했다. 태종 5년(1404) 11세의 양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적통 장자의 왕권 계승을 확립하기 위함이다. 자신도 건강한 38세니 제왕 수련에 자신이 있었다. 그 의도를 거스르는 세력은 용납하지 않았다.

외척 세력이 발호하는 것도 좌시하지 않았다. 정비 원경왕후의 4명의 남동생(민무구, 민무질, 민무휼, 민무회)마저 처형했다. 양녕은 어린 시절을 외가에서 보냈다. 자연스럽게 외삼촌인 그들과 친했다. 민무구와 민무질은 세자의 위세를 은근히 업고 조정의 실세로 행세했다. 그들을 차례로 유배 보내고 자진(自盡)토록 했다. 끝없는 피의 향연이다.


10여년 이상 제왕 수업에 공을 들였지만 세자의 싹수는 갈수록 노랗다. 청년이 되어 색정에 눈을 뜨자 본격적으로 호색한이 되어간다. 24시간 밀착 감시를 명해도 소용없다. 세자에겐 궁궐이 구중심처가 아니라 신출귀몰의 놀이터다. 근신하라는 어명을 코웃음치며 날려버린다. 수색대를 풀어 세자를 궁으로 잡아들여 놓으면 대궐이 떠나가라 소리치며 난동을 부린다.

“어리야, 어리야! 어디 있느냐? 네년의 요분질이 몹시 그립구나. 이놈들아! 어리를 데려오너라.”

주상의 침전 가까이까지 가서 소리를 질러댄다. 시종들만 죽을 맛이다. 어리는 세자 매형의 애첩인 기생이다. 난봉질도 주로 친인척의 애첩을 건드린다. 임금으로서, 아비로서 태종의 체면이 낯을 들 수 없을 정도다. 자식이, 그것도 세자가 저 모양이니 군왕의 권위가 말이 아니다. 온갖 비난을 감수하며 피범벅이 된 손으로 꼿꼿이 세우고자한 왕권이 세자의 일탈로 조롱거리가 되어가고 있다. 수시로 속없는 기생들을 궐 안에 끌어들이고 눈에 보이는 반반한 궁녀는 닥치는 대로 치마를 벗긴다.

급기야 세자는 아버지 태종에게 포복절도할 편지마저 보낸다.

“원기왕성하신 전하! 아바마마께서는 어찌 그리 정력이 세십니까? 스물여덟에 소자를 낳으신 후 매년 한둘씩 아들딸을 생산하고 계십니다. 어마마마를 포함해 부인이 열 명이옵니다. 아직도 더 늘려갈 계획이지요? 소자는 자랑스러운 아바마마의 자식입니다. 소자 또한 열 이상의 애첩을 거느리고 싶습니다. 소자의 이런 생각을 어찌 나무라려 하옵니까. 전하께서는 후궁 여럿을 거느려도 되고 소자는 기생첩 하나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니 이게 무슨 해괴한 법도이옵니까. 소자 또한 전하의 자식답게 정력이 왕성합니다. 소자의 용맹을 탓하지 마시고 격려해주십시오.”

실록에 기록된 편지의 핵심은 위와 같다. 한때 유행했던 ‘막가자는 거지요’였다. 차라리 뜯어보지 말고 불태워버릴 것을. 편지를 읽은 태종은 온몸을 떨었다. 태산도 옮기고 천군만마도 두렵지 않았거늘 20대 청년 양녕이 무섭고 두렵다. 자신이 휘두른 칼날에 사라져간 이들의 원귀가 양녕의 몸속에 온통 엉겨 붙어 있는 것 같다. 이승을 떠난 태조 이성계가 비웃는 것 같다.

“방원이 이노옴! 내 눈에 눈물이 아직 마르지 않았다. 남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면 제 눈에 피눈물을 흘려야하는 것을 이제야 알겠느냐! 네놈은 아비의 목을 치고도 남을 놈이야. 이제 양녕이 네 목을 치는구나.”

태종은 벌떡 일어나 적막한 침전을 휘돌아다니며 소리친다.

“아바마마! 소자는 오직 이 나라 조선, 아바마마께서 세우신 조선을 튼튼하게 만들기 위해 악역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누구도 왕권을 넘보지 못하도록 야욕 가진 자는 친소를 불문하고 처단했습니다. 권력은 둑과 같아서 적당히 아량을 베풀면 금세 터집니다. 아바마마, 소자의 처신이 진정 그토록 극악한 것이었습니까? 대답해주십시오.”

용포를 찢으며 마취에서 깨어난 맹수처럼 비틀거리며 방안을 휘젓고 다닌다. 사태를 수습하려는 내관마저 호통을 쳐서 내쫓는다. 폐세자를 주장하는 상소가 이미 산더미처럼 쌓였다. 적장자 왕통 계승의 꿈이 서서히 허물어져간다.

마침내 태종 18년(1418) 양녕대군은 폐세자가 된다. 그의 나이 25세, 세자가 된 지 15년만이다. 1418년은 태종 재위 마지막 해다. 마지막까지 기대의 끈을 놓지 않았던 태종의 고민이 보인다. 양녕은 태종의 날선 가슴의 칼을 무디게 한 문수보살의 화신이다. 양녕이 아니었다면 태종은 이승에서 자기 성찰의 기회를 갖지 못했다.

비록 불화 그윽한 관계였지만 빵빵한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았고 야심을 충족시킬 수 있는 용맹과 지략을 갖추었다. 그리고 왕이 되었다. 권위에 도전하는 어떤 세력도 단칼에 베어버리는 과감성도 있다. 양녕 하나를 제외하고는 공손하고 충직한 12남 17녀의 풍성한 자식도 있다. 오만의 극치를 달릴 수 있었다. 양녕의 제동이 없었다면 그는 지금도 눕지 않고 뻣뻣이 서서 헌릉 위에서 호령할 것이다.

폐세자 양녕은 유배되었다. 동생 충녕이 왕이 된 후(세종)에도 감찰 대상이었다. 유배지를 벗어나 함부로 돌아다니고 난잡한 행태를 멈추지 않아 대신들의 탄핵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세종은 형님에 대한 극진한 우애와 예우를 견지했다. 수십 차례 올라온 탄핵 상소를 끝내 거부했다. 양녕대군은 노년에 세조 편에 서서 세종의 장손인 단종을 내쫓는데 앞장섰다. 묘하고 드라마틱한 위인이다. 그는 천수를 누려 1462년(세조 8년) 69세를 일기로 죽었다.

태종은 건강한 상태인 52세에 전격적으로 셋째 아들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양녕을 폐하고 충녕을 세자로 삼은 지 두 달만이다. 태종다운 과감함이다. 상왕으로 물러난 뒤에도 군권에는 관여했다. 태종은 1422년 56세를 일기로 승하했다.

곁에 누운 정비 원경왕후 민씨와는 4남4녀를 생산했지만 그리 화목하지는 못했다. 사가에서라면 8남매를 낳은 다복한 부부다. 남편이 왕이 되기 전에는 그녀는 총명하고 결단력 있는 내조자였다.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는데 일조했고 방원이 위기에 처했을 때 여러 번 능력을 발휘했다.

왕비가 된 후에는 태종과 불화가 그치지 않았다. 태종의 후궁이 많은 것은 권력 분산과 왕권 강화를 위한 책략이었다. 민씨는 이것을 노골적으로 불평하고 투기했다. 남동생들을 부추겨 태종의 심기를 더욱 분기탱천하게 했다. 태종은 4명의 처남을 처형해버렸다. 이에 민씨는 오만불손을 서슴지 않았다. 폐비의 위기까지 이르렀으나 태종은 후일을 걱정하여 끝내 폐비시키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연산군 때 일어난 사화가 훨씬 앞당겨졌을지도 모른다. 정이야 싸늘하게 식었지만 원경왕후는 태종 곁에 누워있다. 합장릉이 아닌 쌍릉인 것만도 다행으로 여길까. 두 개의 능은 1미터 정도 간격으로 바싹 붙어 있다. 굵직한 지대석이 두 개 능을 이어주고 있다. 지금 이들은 돌아누워 있을까. 마주 보고 있을까.

한 날 한 시에 태어난 난 손가락도 길고 짧다. 양녕에게 혼쭐이 난 태종에겐 불세출의 현군이라 칭송되는 또 다른 아들, 세종이 있다. 과연 세종은 미덕으로만 뭉쳐진 위인일까. 그가 묻힌 영릉으로 간다.
글=이우상(소설가)/사진=최진연(사진작가) | asdfsang@hanmail.net
2007-04-24 오후 3: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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