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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태종:1367~1422, 56세. 재위 17년10개월.1400.11(34세)~1418.8(52세)
태종은 대권 재수생 출신이다. 등극 후에도 합격의 영광을 맘껏 누리지 못했다.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치루고 피방석을 깔고 권좌에 올랐다. 왕이 된 이후에도 아버지는 여전히 ‘방원이 이노옴!’이다. 태종3년(1402)에 일어난 조사의(趙思義)의 난은 아버지 태조가 배후 조종자다. 이성계의 복위를 도모한 반란이다. 태종은 결심한다. 최소한의 도리를 제외하고 아버지를 부정하리라. 마음은 이미 아비를 버렸다.
아비가 귀히 여기는 것이라면 작심하고 능멸하기로 작정했다. 불교를 탄압, 말살하기로 작심한 것도 궤를 같이 한다. 숭유억불은 조선의 건국이념이 아니다. 태조는 독실한 불자다. 2대 정종도 마찬가지다.
부자간의 반목을 오디푸스 콤플렉스, 거세 콤플렉스로 설명하기도 한다. 거기에 절대 권력이 개입되어 있으면 반목은 활화산이다. 신진 사대부들은 고려의 부패와 패망이 불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다. 사회 전반에 유포된 불교적 요소를 걷어내야 조선이 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성리학의 토대가 된 공자의 학문은 현실적이다. 불교에 대해 비현실적이라는 비난을 퍼부었다.
개국 초 정도전 등이 척불을 강하게 주장했지만 태조의 의지가 굳어 강하게 실현되지 못했다. 태종의 세상이 되자 척불은 기름 부은 들불이 된다. 1400년 11월, 태종은 즉위하자마자 궁중의 인왕상을 대궐 밖으로 옮겨버린다. 인왕상은 환관 등 궐내에 거주하는 이들의 예불 대상이었다. 궐내 도량법석도 폐지시킨다.
1402년 4월, 사찰의 토지를 군대에 예속시킨다. 이 소식을 들은 태상왕 이성계가 노발대발하며, 사찰의 토지를 되돌려주고 스님들을 억압하지 말 것이며, 부녀자들이 절에 가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요청한다. 태종은 불교 탄압을 일시적으로 접는다. 왕의 의중을 읽고 있는 대신들의 합창이 그치질 않는다. 1403년 6월, 사헌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다시 사찰의 토지를 몰수한다. 1404년 12월, 사간원의 건의로 부녀자들의 사찰 참배 금지, 1405년 8월, 폐사찰의 전답과 노비를 국가에 귀속, 11월에는 전국의 모든 사찰의 토지와 노비를 혁파한다. 유신시절 긴급조치 같은 포고령이 연이어 떨어진다. 불교의 존폐가 벼랑 끝으로 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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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6년 2월, 수백 명의 스님들이 대궐 앞에 마련된 신문고를 치며 탄압을 중지해 달라고 요청한다. 조계종 성민 스님을 위시한 스님들이 조정의 처사를 철해해 줄 것을 요구했지만 태종은 거부한다. 오히려 탄압의 강도를 높인다. 교단 내에 남겨둘 사찰, 스님, 노비, 전답의 수량을 규정하고 종단도 축소시킨다. 한양과 개경에는 오교양종에서 각 종단마다 사찰 1개로 한정하고, 지방의 목, 부에는 선종, 교종에서 각 1개 사찰, 군, 현에는 선종, 교종을 합하여 1개 사찰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철폐한다.
이렇게 해서 조선 전역에 총 242개 사찰만 남는다. 관아에 의해 몰수된 노비는 총 8만 명, 몰수된 전토는 총 6만 결이 넘는다. 11개 종단을 7개 종단으로 통폐합한다. 조계종, 천태종, 화엄종, 자은종, 중도종, 총남종, 시흥종만 남는다. 고려 이후 지속적으로 실시되던 승과(僧科)와 승계(僧階)도 폐지해버린다.
신진사대부의 정치 이념과 그들의 이해득실, 태종의 개인적 심사 특히 살부의식의 중심에 불교가 있었다. 개혁의 이름으로 무자비한 탄압의 표적이 불교였다. 아버지 태조의 건원릉과 어머니 신의왕후의 제릉에는 마지못해 원찰을 세우게 했으나 자신의 능에는 생전에 엄명을 내렸다. ‘내 잠들 곳에는 더러운 중들이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라’고. 먼저 죽은 왕비 원경왕후 국상 때 재를 올리자, ‘대소 관원들로부터 노복에 이르기까지 거의 천여 명이 한데 어울려 떠들어대는구나. 부처에게 혼이 있다면 이런 일이 섬기는 도리가 아니다’라고 화를 냈다.
왕과 왕비 이하 사대부, 서인에 이르기까지 수륙재만 허용하고 다른 행사는 모두 철폐했다. 절에 참배하는 인원도 제한했다. ‘부처와 신선은 백성을 속이고 미혹케 한다. 모두 허황하고 망령되다. 천 년 후에 이 법을 지키고 안 지키고는 저희에게 달렸다’라고 토를 달았지만 조선 왕릉 제사에 불교 의식이 개입할 여지를 원천 봉쇄한 것이 태종이다. 고려 말 불교의 타락상에 대한 혐오와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한덩어리가 되어 철저한 현실주의자가 되었다. 자비, 깨달음, 성불은 그에게 어지럽고 공허한 연기였다.
태종은 조선 역대 왕 중 최고의 야심가, 지략가, 정력가다. 권력의 세계에서 통할 리 없지만 그의 용맹과 지략과 정력이 여법하게 쓰였다면, 아쉽다. 산술적 수치가 큰 의미가 있을까 만은 태종은 부인이 10명이다. 랭킹 2위다. 1위는 9대 성종이 12명, 11대 중종이 12명이다. 자녀수로는 태종이 랭킹 1위다. 12남17녀 도합 29명이다. 자녀가 많다고 세간에 알려진 세종은 18남4녀, 22명이다.
왕릉 답사를 다닐 때면 시간 나는 친구들이 가끔 동행한다. 왕들 부인의 숫자, 자녀의 숫자를 말하면 친구들은 입을 실룩거리며 시기한다. 그럴 때면 따끔하게 일침을 가한다. ‘너, 살아오면서 곁눈질한 횟수를 고백할 수 있겠냐? 군대 시절 포함해서. 왕들의 삶은 어항 속의 금붕어다.’ 그러면 입을 다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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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릉 가는 길>
헌릉은 태종과 원비 원경왕후 민씨의 쌍릉이다. 가까이 23대 순조와 비 순원왕후 김씨의 합장릉인 인릉이 있다. 합쳐서 헌인릉으로 불린다. 사적 제 194호 서울 서초구 내곡동 산 13-1 면적 1,193,071㎡(36,904평) 헌릉은 두 개의 능을 난간석으로 연결했다. 남한에 있는 왕릉 중 유일하게 문인석, 무인석, 석양, 석호, 석마가 다른 왕릉의 두 배인 각 2쌍씩 설치되어 있다. 곡장 안의 석호, 석양 석물이 총 16개다. 특히 능의 뒤편에는 석호 네 마리가 버티고 있다. 모두 바깥쪽을 향하고 있다. 대단한 경호다. 능침에 옆에서 오른쪽을 내려다보면 경호는 더욱 심하다. 국가정보원이 거기 있다. 국가 최고 정보와 방어력이 있는 곳이 아닌가. 태종의 성품과 어울리는 기관이 외호하고 있다.
그러나, 능침을 지키는 것은 공익요원 2명이다. 따분한 일상에 지치고 소집 해제만 기다리는 청년은 ‘아저씨, 그만 내려가요’라고 재촉한다. 태종과 담판 지을 것이 많은데, 청년의 퇴근시간을 잠식하기 미안해 능을 내려온다.
헌릉이 있는 대모산(大母山)은 육산(肉山)이다. 물이 많다. 원래 대고산(大姑山), 할미산으로 불리었는데 태종이 이곳으로 오자 할머니 대신 어머니를 써서 대모산으로 바뀌었다. 할머니든 어머니든 그들은 젖을 먹여 자식을 키우는 이다. 대모산에는 약수터가 많다. 용두천, 옥수천, 임록천, 구룡천, 대룡천 등 범상치 않은 이름이 붙은 곳만도 20여개가 넘는다. 올해처럼 겨울 가뭄이 심해도 약수터 물이 마르지 않는다. 해발 293미터인 야트막한 산인데 심산유곡처럼 물이 많다.
능지로선 부적합하다. 태종은 재위 당시 명당을 찾아 1415년 지관 이양달의 추천으로 이곳을 수릉으로 택했다. 1420년 왕비 원경왕후가 승하하자 이곳에 안장하고 1422년 자신도 이곳에 안장됐다. 후에 태종 곁에 안장됐던 세종은 여주로(영릉), 문종은 동구릉으로 천장했다. 헌인릉 정자각을 조금 벗어나면 작은 늪지대다. 능의 곡장 안에까지 배수로를 파놓았다. 경직성으로 뭉쳐진 태종의 가슴을 적시고자 하는가. 대모산에는 물이 많다.
능침 개방 시간:월~금, 일요일 오전11시, 오후2시, 오후4시. 안내 및 설명 토요일 오후 2시, 3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