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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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비우고 천수를 누리다
제2대 정종과 정안왕후의 후릉

2대 정종 <1357~1419, 63세. 재위기간 2년 2개월,1398.9(42세)~1400.11(44세)>

원치 않던 권좌,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아슬아슬한 칼 날 위에서 그는 훌쩍 뛰어내렸다. ‘대통령 노릇 못해먹겠다?’. 여론을 슬쩍 떠보니, ‘전하, 고정하시오소서! 어찌 그런 망극한 말씀을 하시오니까. 신들의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오니이다.’ 입에 발린 간언을 주유소에서 받은 1회용 휴지처럼 내쳤다.

조선 역대 왕 중 매력 없는 왕의 순위를 매기라면, 정종은 둘째가라면 서럽다. 어딜 둘러보아도 야심, 패기, 술수, 카리스마가 보이지 않는다. 2대 정종이란 묘호가 아깝다. 그래서 묘호를 얻는데 262년이 걸렸다. 40대 초반에 2년2개월 동안 왕위에 있다가 63세에 죽었다. 죽은 후 오랫동안 묘호도 없이 공정왕으로 불리다가 1681년(숙종7년)에 정종이란 묘호를 받았다. 대통령 권한대행은 대통령인가, 아닌가? 권한대행 기간 중에는 대통령에 준하는 예우를 받지만 대통령은 아니다. 세월이 흘러도 권한대행이란 꼬리표가 소멸되지 않는다. 정종은 방원이 왕권을 접수하기 위해 잠시 머문 부교(浮橋)였다.

왕위를 물려 줄 다음 타자는 당연히 방원이다. 정종에 의해 1400년 2월에 방원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족보가 이상하다. 방원은 정종의 동생이다. 그렇다면 세자가 아닌 세제가 되어야 한다. 정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당시 조정 분위기 때문이다. 형식적으론 방원이 정종의 왕위를 이었지만 실제론 태조의 세자로 왕위를 이었다는 것이다. 권력은 쟁취하는 것이지 엉겁결에 들어선 잔칫집에서 받아든 밥상이 아니다.

우왕좌왕하다가 동생에게 왕위를 내 주었으니 기분 참 더러웠을 것이라고? 마음먹기에 달렸다. 아버지 이성계의 역성혁명, 왕자의 난 등을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본 그는 피비린내의 근원, 권력의 속성을 알고 있다. 목숨을 걸지 않으면 보상이 없다. 목숨을 걸어도 금메달은 한 개 뿐이다. 나눌 수도 쪼갤 수도 없다.

그 역시 무장(武將)이다. 청년 시절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지리산에서 왜구를 토벌했고 1390년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공으로 밀직부사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성품이 근실하고 지행이 방정했다. 음모와 야심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또 한 번 일어날 뻔한 살육전을 피할 수 있었다. 자리를 탐하는 측근도 두지 않았다.

1차 왕자의 난이 성공을 거두고 세자 책봉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는 이미 판세를 읽었다. 그래서 진중한 목소리로 주장한다.

“당초부터 대의를 주장하고 개국하여 오늘에 이른 업적은 모두 정안군(방원)의 공로인데 내가 어찌 세자가 될 수 있겠는가?”
방원은 흐느끼며 간청한다.

“큰 형님(방우)이 돌아가시고 없는 마당에 형님이 장자십니다. 형님이 마땅히 대통을 이어야합니다. 엎드려 비오니 내치지 마십시오.”

방원의 속내를 어찌 모르랴. 그래 완충장치가 필요하다. 화병으로 쓰러질지도 모를 아버지를 위해 내가 잠시 방원의 다리가 되자. 내 등을 밟고 옥좌로 가거라. 실권은 이미 네게 있으니, 나는 잠시 세탁소에서 빌린 용포를 입고 사진 몇 장 찍고 물러나리라.

스스로 다짐한 그 각오를 지켰다. 세력을 모으는 낌새가 있으면 야밤중에라도 방원의 수하들이 칼을 들고 침전으로 쳐들어올 것이다. 내관들마저 방원 측 인물들이다. 정비 정안왕후 김씨 사이에는 후사가 없었다. 이것도 그들이 천수를 누린 이유다.

2년 2개월의 짧은 권한 대행을 마치고 정종은 상왕이 된다. 편하고 자유로운 상왕 노릇을 19년간 했다. 동네 목욕탕에도 맘대로 못가고 골프 한 번 치러나갔다가는 기자들이 두더지처럼 따라붙어 구설수를 만들어내는 전직 대통령들은 정종이 한없이 부러울 것이다.


3대 임금으로 즉위한 방원은 정종을 상왕으로 삼고 예우를 극진히 했다. 1400년 12월 상왕전에 나아가 ‘인문공예상왕’이란 존호를 올리고 이르기를,

“태조에 이어 정사에 나아가 나라를 평안케 하셨고 소자를 보전케 하셨으며 인애를 다하여 즉위토록 명하셨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도를 즐기시고 한가로이 지내시면서 마음을 편안히 가지시옵소서. 충심에서 우러난 소원이오니 굽어 살피시고 다복한 상서를 받으소서.”

이것은 방원의 진심이었다. 권력을 얻은 자의 아량과 시혜였다. 정종은 그 뜻을 담담하게, 흔쾌히 받아 실행했다. IOC 위원, 왕권 홍보대사란 직책이 있었다면 능히 감당할 능력이 있었다. 상왕은 격구, 사냥, 온천 여행, 파티의 고수였다.

호색한인지 보신책인지 그는 부인을 10명이나 두었다. 정비에게는 자녀가 없고 후실들에게서 17남 8녀를 두었다. 자식들 이름이나 다 기억할까. 부인을 10명 이상 둔 왕들은, 3대 태종(10명, 12남17녀), 9대 성종(12명, 16남12녀), 11대 중종(12명, 9남11녀), 15대 광해군(10명, 1남1녀) 등 5명이다. 왕들의 혼인은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다. 권력과 연줄을 맺으려는 세도가들이 다투어 딸을 바친 결과물이다. 정종이야 애초에 권력자가 아니었으니 자발적 의지로 보인다. 그렇다고 왕의 다처를 흠잡는 시대도 아니니, 얼쑤! 지화자!

마음 비우기, 하심(下心) 아니면 그의 행태를 설명할 수 없다. 방원이 막강하나 자객 몇 명이면 처단이 가능하다. 거대한 보상을 미끼로(병조판서 정도) 방원의 측근을 활용할 수도 있다. 철옹성 같은 궁정동에서도 총성이 울렸는데.

정종보다 7년 먼저 죽은 정안왕후 김씨는 사려 깊고 공손한 성품의 여인이었다. 덕행으로 아랫사람을 다스리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우애로써 친족과 친교를 두텁게 했다. 집안이 한미한 것도 아니다. 고려 공민왕 때 문하좌시중(부총리) 월성부원군 김천서의 딸이다. 김씨는 정종의 즉위 때부터 조심스럽게 반대했다.

“그 자리는 우리 자리가 아니옵니다. 바람 부는 방향은 이미 정해졌는데 돛단배가 어찌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정종은 부인을 달랬다.
“하늘의 뜻이 우리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잘못 발을 들여놓으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방원의 뜻이 하늘의 뜻보다 강하니 어쩌겠소.”

왕위에 앉은 2년 동안, 그들은 그것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쓴 것이 아니라 뛰어 내릴 궁리만 했다. 권력을 위해서 세계적 수치를 안으로 삭힌 미시스 클린턴 힐러리님과 대비된다. 그들은 천수를 누렸다. 정종 63세, 김씨 58세에 죽었다.

정종은, 무능하고 겁 많은 소인배인가, 시대의 코드를 읽은 대장부인가? 함량미달인 인사들도 주변에서 바람을 잡는다고 대권 후보군에 이름을 올린다. 출마가 직업인 사람도 있지만 성공한 경우는 못 봤다. 참가에 의미를 두는 것은 스포츠다. 마라톤 완주에는 격려를 보내지만 깜냥 모르고 ‘못 먹어도 고오’라고 설치는 정객은 공공의 적, 가문의 원수다.

<후릉 가는 길>
후릉 가는 길은 지금 없다. 북녘땅 개성시 판문군 령정리에 있다. 죽어서도 왕따다. 후릉은 당대 명건축가 박자청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태종의 헌릉과 쌍둥이처럼 닮았다. 헌릉을 보면 북녘에 있는 후릉을 본 셈이 된다. 두 쌍의 문인석, 무인석의 모습도 헌릉과 다르지 않다. 병풍석을 둘렀으며 면석에 12지상을 새겼고 왕과 왕비의 능 앞에 각각의 장명등을 세운 것, 홍유석 받침돌(고석)이 5개인 조선 초기 양식이며 이는 고려 왕릉의 형식을 답습한 것이다.
글=이우상(소설가) 사진=최진연(사진작가) |
2007-04-19 오후 2: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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