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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덕왕후(? ~ 1396) 능호:정릉
부:곡산 강씨 윤성 모:진주 강씨
자:방번(무안대군), 방석(의안대군) 녀:경순공주
버들잎 한줌에 운명이 바뀐 여인, 이성계와 이방원의 갈등을 250여 년 동안 감당해야했던 여인, 피지도 못한 10대의 아들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여인, 죽어서도 이리저리 찢기고 밟힌 여인, 그녀가 신덕왕후 강씨다. 정릉에는 한이 많다.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다가 편한 무덤조차 갖지 못했다.
문상객 뜸한 초상집 풍경은 처연하다. 고인의 생전 이력, 자손들의 숫자와 사회적 역할에 따라 상가 풍경은 흥청거리기도하고 적막하기도하다. 외따로 떨어진 쓸쓸한 무덤 또한 처연하다. 죽어서조차 옆구리가 시리다. 신덕왕후의 정릉이 그렇다. 조선 왕릉 중 홀로 묻힌 단릉은 많다. 그러나 대부분 왕릉군에 속해 있어 가까운 곳에 혼령들의 말동무가 있다. 생전에 서로 면식 없었지만, 관람객이 떠난 밤중에도 소곤거릴 수 있다. 쌍릉, 합장릉에 묻힌 이들을 향해 빈정거리기도 한다.
홀로 외따로 떨어진 무덤은 3기뿐이다. 정릉(신덕왕후), 장릉(6대 단종-강원도 영월), 사릉(단종비 정순왕후-경기도 남양주시). 외로운 고혼들이다.
태조가 젊은 시절 부하들을 거느리고 호랑이 사냥을 하다가 목이 말라 물을 찾았다. 우물가에 물 긷는 처녀가 있어 숨을 헐떡이며 급히 말에서 내렸다.
“낭자, 물 한바가지 주시오.”
우락부락한 무장들이 우물가에 우르르 들이닥치자 처녀는 놀랐다. 고개를 숙이고 그들을 바로 쳐다보지 못하지만 침착했다. 두레박으로 샘물을 길어 바가지에 부어 건네려다가 멈칫하더니 우물가에 있는 버들잎 한줌을 따서 물에 띄운다. 화가 난 이성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게 무슨 고약한 짓이오?”
수하 장졸들은 허리춤에 찬 칼을 들썩거린다. 고개 숙인 처녀는 냉정했다.
“갈증으로 급히 달려오신 것 같습니다. 급히 드시면 목이 막힐 것 같아 버들잎을 불어가며 천천히 드십시오.”
이성계는 그녀의 지혜와 미모에 감탄하여 한동안 넋을 잃었다. 이 처녀가 신덕왕후다. 가끔 들르는 고향 함흥에서 집을 지키고 있는, 촌년 냄새 물씬 풍기는 본처 한씨에 비할 바 아니다.
강씨는 판삼사사 강윤성의 딸이다. 그녀의 숙부 강윤충, 강윤휘 또한 고려의 고관들이다. 고려 말 권문세족이었던 강씨의 친정은 이성계의 권력형성, 조선개국의 큰 힘이 된다. 이성계는 빵빵한 처가 덕을 톡톡히 본다.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 한씨는 걱실걱실한 6남2녀를 낳고 조선 개국 전 죽었다(55세, 1391년). 1392년 7월 17일 태조가 왕위에 오르자 8월 2일 강씨는 현비로 책봉된다. 조선최초의 공식 왕비다. 방번, 방석 두 아들과 딸 경순공주를 낳았다. 태조의 집권 거사에도 친정 세력들과 참여했다. 태조의 총애 또한 흔들림이 없다. 믿음직한 정도전 등 신진 사대부들이 곁에 있다. 자신이 낳은 두 아들 중에서 대통을 이을 세자가 되어야 한다는 확신이 섰다. 비극의 싹이 움튼다.
태조와 은밀히 협의하여 자신이 낳은 첫째 아들 방번을 세자로 내정했으나 정도전, 배극렴, 조준 등 원로들이 ‘성격이 광망하고 경솔하다’고 반대해서 동생인 방석(11세)을 세자로 삼는데 성공했다. 이 때 주먹을 부르르 떨며 분통을 터뜨린 호랑이가 있었다. 혈기와 조직을 갖춘 펄펄한 27세 청년, 방원이다.
그러나 강씨는 친아들의 등극을 보지 못하고, 아들딸에게 엄청난 화의 덩어리를 남기고 병사했다(1396년). 출생 연도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30대 후반~40대 초반으로 추측된다. 이때 예순 둘의 태조는 군왕의 품위마저 망각하고 대성통곡했다. 사찰을 찾을 때면 항상 동반하고 강비가 아프면 스님을 궁에 스님을 불러들여 기도를 드리게 했다.
태조는 궁에서 가까운 도성 안에 정릉을 조성했다. 그리고 원찰(願刹)로 능 동쪽에 170여 간의 흥천사를 세워 조계종의 본산으로 삼았다. 태조는 정릉의 아침 재 올리는 종소리를 듣고서야 수라를 들었다. 흥천사는 연산군 때 화재로 소실되고 태조의 상심을 위무했던 흥천사 대종은 몇 차례 자리를 옮겨 지금은 덕수궁에 있다.
1,2차 왕자의 난으로 실권을 장악한 방원의 보복은 무자비했다. 그 표적에 죽은 강씨가 있다. 이빨 빠진 사자가 되어버린 아버지, 그의 말은 방원에게 씨알이 먹히지 않았다.
방원(3대 태종)이 즉위하자 정릉 파괴가 시작된다.
“정릉은 도성 안에 있고 능역이 광대하다. 능역 100보 밖까지 주택지로 허하노라.”
태종과 코드가 맞는 하륜 등 세도가들은 얼씨구나! 다투어 정릉 숲을 베어내고 집을 지었다. 뒷방 늙은이 태조는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태조가 죽자(1408년, 태종 8년) 정릉의 운명도 곤두박질친다. 태조가 죽은 1년 후, 1409년.
“도성 안에 능이 있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이장하라. 강비는 선왕의 둘째 부인이다. 후궁으로 예우하라.”
그래서 정릉은 현 위치(양주 사한리, 현재 성북구 정릉동)로 옮기고 능을 묘로 격하시킨다. 이장작업에 정성을 기울일 인사는 아무도 없었다. 빚쟁이 이삿짐 싸듯이, 처삼촌 벌초하듯이 무례와 무성의가 난무했다. 병풍석은 허물어 궁궐 공터에 야적했다. 이듬해 청계천 광통교가 홍수로 유실되자 그 석물들을 일부 가져다 썼다. 현재 정릉에는 병풍석이 없다. 어진 임금으로 추앙되는 세종마저 핏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세종 즉위년에 나라에서 지내던 정릉의 제사마저 폐했다. 족친들에게 제사를 지내게 했다. 세종 8년에는 신덕왕후의 영정을 불살라버리라는 명을 내렸다. 세종도 신덕왕후를 정비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대역 죄인의 무덤에 버금가는, 잊혀지고 뭉개지는 무덤으로 변해갔다.
1669년(18대 현종10년) 11월 1일, 떨어진 낙엽을 적시는 겨울비가 내리는 날이다. 겨울비답지 않게 주룩주룩 내린다. 정릉 일대가 흥건하다. 이날은 정릉의 정자각이 완공되고 종묘에서는 신덕왕후의 신위가 260여년 만에 태묘에 배향되었다. 명예회복, 복권의 날이다. 이날 내린 비를 세원지우(洗寃之雨)라고 지금까지 전해진다.
무자식 상팔자인가. 태조와 신덕왕후는 자식들에게 단단히 혼난 이들이다. 평범한 집안이었으면 어찌 그런 패륜이 있었겠는가. 그들에겐 권력이란 크고, 무겁고, 달콤한, 판도라 상자 같은 것이 있었다. 태조 등극 전에 죽은 첫째부인 한씨(신의왕후)는 둘째 아들(정종) 가까이에 편히 잠들어 있다.
<정릉 가는 길>
정릉=사적 제208호 서울 성북구 정릉동 산 87-16 면적 299,574㎡(90,621평) 원래 정릉은 현재 영국 대사관 자리에 있었다. 태조가 고려 왕릉을 본떠 온갖 정성을 쏟아 조성한 조선 최초의 능이다. 현재 정릉은 이장, 복원된 것이다. 능에 오르면 병풍석 없는 봉분과 고석(받침돌)이 두 개뿐인 홍유석, 무인석은 없고 문인석만 있다.
흥천사의 운명도 정릉과 같다. 정동 자리에 있던 절은 연산군 때 불타버렸다. 22대 정조 때 성민 스님, 경신 스님이 현재 위치에 흥천사를 중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