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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원릉 봉분을 덮고 있는 갈대를 보면 낯설고 섬뜩하다. 죽어서조차 부드러운 잔디 이불을 덮지 못하고 있는 이성계의 운명을 본다. 철침처럼 숭숭 솟은 갈대 아래 태조가 누워 있다. 살아생전 함께 묻히길 원했던 그리운 여인, 계비 강 씨는 저 멀리 정릉에 있다.
창업(創業)은 쉬우나 수성(守成)은 어렵다.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았다는 천하의 맹장 이성계도 권력의 맛을 맘껏 음미하지 못했다. 재위 6년 2개월, 전반기는 개국 창업에 정신이 없었다. 후반기는 업장을 녹이기기에 시간이 촉박했다. 또한 개인적 애증에서 자유롭지 못한 중생이었다.
태조는 6명의 부인에게서 8남 5녀를 두었다. 그 중 향처(鄕妻)인 정비 신의왕후 한 씨와 그녀의 소생 여섯 명의 아들(방우, 방과, 방의, 방간, 방원, 방연), 경처(京妻)인 계비 신덕왕후 강 씨와 그녀의 소생 두 아들(방번, 방석)이 개국 초 역사적 잔혹극에 주연, 조연을 맡는다. 각본, 연출 겸 주연은 태조 이성계다.
향처 신의왕후는 이성계와 혼인한 후 함흥 운전리에 살았다. 전장을 누비는 남편을 멀리서 후원하는, 고향을 지키는 맏며느리다. 둘째 부인 강 씨는 젊고 총명하고 친정이 권문세가여서 태조의 입신에 큰 힘이 되었다. 그녀는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 출신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무지랭이 분위기를 풀풀 풍기는 한 씨는 조선 건국 전인 1391년에 죽었다. 그래서 그녀의 무덤은 개성(제릉)에 있다. 태조의 총애가 강 씨에게 기운 것은 당연하다. 강 씨가 자기 자식을 세자로 책봉하려 한 것 또한 인지상정이다.
사고의 발단은 너무 일찍 일어났다. 1392년 7월, 조선 개국 한 달 뒤인 1392년 8월 강 씨 소생인 여덟 째 아들 방석이 세자로 책봉됐다. 방석의 나이 불과 11세였다. 세자 자리를 어린애에게 사탕 한 알 주는 것쯤으로 여겼는가. 아니면 이놈이 장년 될 때까지 키우고 지킬 것이라 여겼는가. 강 씨와 그 주변 인물에 대한 신뢰가 공고했는가.
장남 방우의 나이는 39세, 방석의 세자 책봉에 가장 큰 불만을 가진 행동파 야심가인 정안군 방원의 나이는 26세였다. 방원은 맏형인 방우를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그는 이미 태조의 눈 밖에 난 인물이다. 체질과 성향이 비슷한 존재들은 서로 경계하고 멀리한다. 서로의 속내를 잘 알기 때문이다. 양극은 양극을 밀치고 음극은 음극을 싫어한다. 현대사도 마찬가지다. 강(剛)은 강이 싫고 유(柔)는 강이 좋다.
방원은 억울했다. 비난을 감수하며 정몽주까지 죽였다. 정몽주의 핏자국이 지금도 선죽교에 선명한데 나는 뭐냐? 공양왕을 폐위시킨 악역에 앞장섰지만 개국 공신 책록에도 제외당하는 굴욕을 감수했다. 아버지를 위해서, 권력을 위해서 청춘을 바쳤는데, 대가가 없다니. 적절한 보상이 없으면 죽기살기다. 모 아니면 도다. 왕자의 난이 시작된다.
‘이놈아, 너는 아니야. 너는 살기가 자욱해. 용(勇)은 빼어나지만 유(柔)가 없어. 그래서 너는 아니다. 무한 용맹은 나 하나로 족하다. 너는 너무 격해. 그래서 나는 너를 버린다.’
태조의 한숨, 늙은이의 고민은 깊다. 그러나 아리따운 강비의 유혹과 깍두기 머리에 검은 양복 입은 측근들의 90도 인사가 든든하다. 10년 후면 세자가 스물 한 살이다. 왕권을 거머쥐고 휘두를 수 있다. 그 때까지 튼튼하게 키우리라. 태조는 각오를 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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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8년 무인년 8월 25일, 그 날 밤은 스산했다. 이른 낙엽들이 풀풀 날리는 가을밤이다. 같은 하늘 아래 살기 싫은 계모 강비도 2년 전에 죽었다. 태조는 병환중이다. 한 씨 소생 아들들이 시퍼렇게 벼린 칼을 들고 모였다. 거친 숨을 억누르며 방원이 입을 열었다.
“형님들! 더 이상 때를 놓칠 수 없습니다. 아버님의 마음은 이미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정도전 일당이 우릴 죽일 겁니다. 선수를 치는 것만이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 우린 개밥의 도토리보다 못한 지경이 되었습니다.”
형제들은 하나같이 비장했다. 그들이 거느린 사병(私兵)들에게 업무를 분담시켰다. 신속, 정확하게 그리고 깔끔하게 끝내라.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 세자를 옹위하며 신권정치를 주장하는 무리들을 전광석화처럼 살해했다. 그리고 화의 근원인 세자 방석, 그의 한 살 위 형인 무안대군 방번을 체포했다. 그 후 그들은 귀양 보냈다가 죽였다. 방석의 나이 17세였다. 역사는 이것을 ‘제1차 왕자의 난’, ‘방원의 난’, ‘무인정사’, ‘정도전의 난’ 등으로 부른다.
소식을 전해들은 태조는 가슴을 쳤다.
“이놈들이, 이노옴들이, 방원이 이노옴!”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이들에겐 아니다. 권력이 피보다 진하다. 병석에 있는 예순 네 살의 노인 태조는 식음을 전폐했다. 패배를 모르고 휘달렸던 30년 장수 생활, 새 왕조를 일으켜 억조창생을 자식처럼 돌보겠다던 각오가 무참하고 허망하다. 상심의 극한에서 넋이 빠졌다. 이놈들, 오냐! 니놈들 멋대로 해라.
태조는 난이 일어난 다음 달, 1392년 9월, 둘째 아들 방과에게 왕위를 물렸다. 거사에 성공하자 하륜, 이거이 등 방원의 심복들이 방원을 세자로 책봉하려 했으나 방원이 극구 사양했다. 장남인 방우는 1393년에 이미 병사하고 없었다. 방원의 뜻에 따라 둘째 방과가 세자로 책봉되고 왕위를 오른 것이다.
태조는 1차 왕자의 난 후에 상왕, 2차 왕자의 난 후엔 태상왕이란 이름으로 시름의 날을 보냈다. 살육전의 중심에 방원이 있음을 알지만 이빨 빠진 사자, 늙은 용은 마른 눈물을 삼킬 뿐이다. 용서와 화해를 하기에도 늦은 나이에 태조는 분노와 증오를 한아름 안고 고향 함흥으로 간다. 논산 훈련소 쪽으로는 오줌도 누지 않는다는 예비역들처럼, 태조는 방원이 있는 곳으로는 얼굴도 돌리지 않았다.
문안차 방원이 보낸 차사들을 오는 족족 죽였다. 가서는 소식 없는 이름, 함흥차사다. 아비를 제대로 모시지 못하는 이가 어찌 만백성의 어버이가 될 수 있을까. 방원(3대 태종)의 심경 또한 쓴맛의 연속이다. 부자간에 불구대천지원수이면서 어찌 국론통일, 화합을 말할 수 있으랴. 함흥에서 이를 갈고 있는 늙은 용을 궁으로 모셔올 방도는 없는가. 함흥차사로 발탁되면 바로 죽음이니 용기와 재주가 무용지물이다.
증오, 분노, 울화가 가슴 속에 차고 넘친 이성계를 다시 한양으로 모셔온 이는 무학대사다. 무모한 살육을 더 이상 없게 해달라는 방원의 간청으로 무학대사가 나섰다.
“태상왕 전하, 어찌 악을 악으로 갚으려 하옵니까? 증오의 우물은 퍼내도 퍼내도 한이 없습니다. 미움을 거두고 백성을 생각하시옵소서.”
“자식 없는 대사가 부럽고 부럽소. 나는 무엇을 위해 한 평생 살아온 것이오? 대답 좀 해 주시오.”
태조는 오랜 친구의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통곡했다. 1402년 태조는 한양으로 돌아왔다. 궐내에 덕안전이란 법당을 짓고 염불삼매의 나날을 보내다가 1408년 5월24일 창덕궁 별전에서 향년 74세로 이승을 하직했다. 지금, 원치 않았던 자리, 동구릉 내 건원릉에 누워있다. 말년의 염불삼매가 아니었더라면 지금 당장 병풍석을 걷어차고 일어날 것 같다. ‘전하, 밤새 안녕하시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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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릉(東九陵)가는 길>
동구릉=사적 제193호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 2-1 면적 1,915,891㎡(579,557평)한양 동쪽에 있는 아홉 개의 왕릉군, 그래서 동구릉이라 부른다. 전체 면적 약 58만평, 여의도 면적(2백70만평)의 22% 쯤 된다. 원래는 태조 왕릉 하나를 위해 잡은 터다.
44년 후 건원릉 지역으로 문종왕릉이 조성됐다. 이후 선조, 영조 등의 왕릉이 조성되어 동삼릉, 동오릉, 동칠릉으로 불리다가 1885년 마지막으로 문조(추존왕)왕릉이 조성되자 동구릉으로 굳어졌다. 짝수는 음수(陰數)이기에 호칭하길 피한다. 동이릉, 동사릉, 동육릉으로 불렸던 기록은 없다. 서삼릉, 서오릉도 마찬가지다. 두 개의 왕릉이 있는 공원은 능호를 합쳐서 그대로 부른다. 헌인릉, 태강릉이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