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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자를 보는 손상좌가 무엇을 찾으시냐고 여쭈니, 손바닥만한 헝겊조각 두 개 못 보았느냐고 하셨다. 너무 낡아서 내다버렸다고 하자 당장 찾아오라고 하시며
“그것이 어떤 물건인데 네가 함부로 버리느냐. 내가 금강산을 떠나올 때, 우리 은사 스님이신 석두 스님께서 먼 길 가는데 걸망 끈에 어깨 짓무른다고 밤새워 기워 주신 것이야.”
석두 스님[1882-1954]이 노환으로 운신을 못하게 되자 효봉 스님이 손수 대소변을 받아내고 있었다. 하루는 손주 시봉이 요강을 비우자 ‘우리 스님은 내가 모신다’며 꾸지람을 하셨다.
효봉 스님의 사제되는 계봉 스님은 요강을 비울 때마다 대변을 찍어 맛을 보곤 하셨는데 효봉 스님이 그 이유를 묻자 병자의 똥이 쓰면 임종이 가깝다고 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효봉 스님이 삼일암에 계실 때, 계행이 바르지 않던 한 노스님이 입적해서 다비를 했는데 사리가 나왔다고 상좌들이 야단법석을 떠는 것이었다.
효봉 스님은 삼일암으로 그 상좌들을 불러 상 위에 깨끗한 천을 깔더니 그 위에 사리를 올려놓으라고 하셨다. 사리를 올려놓자 효봉 스님은 사리에 시선을 모으고 한동안 삼매에 드신 듯했는데, 순간 사리가 녹아 버리더니 고름으로 변해 버리는 것이었다. 효봉 스님의 손상좌로 이십여 년 시봉하셨던 원명 스님이 직접 보신 일이다.
하루는 구산 스님[조계총림 초대 방장]이 공양간에 나타나 구석구석 살피시는데 마침 수채 구멍에 밥티가 몇 알 떨어져 있었다. 구산 스님은 바늘을 꺼내더니 밥티를 하나하나 찍어 잡수시는 것이었다.
이후로 공양간 바닥에 밥티 흘리는 행자가 없었다.
언젠가 밤늦은 시간에 구산 스님이 도량을 한 바퀴 살피시는데 요사채에서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그 방의 문을 활짝 여니 스님과 보살이 손을 잡고 있다 놀라 어쩔 줄 몰라 하는데 구산 스님은 말없이 방문을 닫고 가시는 것이었다. 그 스님은 멍석말이 당할까 산문출송 당할까 속이 바싹바싹 타는데, 며칠이 지나도록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그 스님은 가사 장삼을 수하고 삼일암으로 가서 구산 스님께 용서를 빌고, 걸망을 싸서 스스로 송광사를 떠났다.
구산 스님이 광양 백운산 상백운암에서 공부하실 때 이야기이다. 가을이 깊어 겨우살이 준비를 하는데 그 해는 하필 흉년이 들어 탁발해 온 양식이 쌀, 보리 합쳐 겨우 한 말이 넘었다. 텃밭에 심은 무를 뽑으니 한 가마쯤 되어서 어떻게든 그것으로 겨울을 나기로 결심하고 정진에 들어갔다. 그러나 겨울을 반도 넘기기 전에 양식이 떨어져 무로 양식을 삼았는데, 그것마저 몇 개 남지 않게 되자 무를 다 먹어 없애기 전에 끝장을 보기로 마음먹고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그런데 여수에 사는 한 보살이 밤에 꿈을 꾸었는데, 불보살님이 나타나 백운산 상백운암에서 도인 스님이 죽어가고 있으니 어서 떡과 과일을 준비해서 가보라고 하시더라는 것이었다. 그날 바로 보살이 음식을 장만해서 눈길을 헤쳐 상백운암에 이르니 한 스님이 바위에 좌복을 깔고 앉아 계신데, 눈썹에 하얗게 서리가 내렸고 참새가 어깨에 앉아 누비를 쪼아 솜을 파먹고 있었다.
광훈 스님[전 원각사 주지 2537년 입적]이 송광사에서 재무 소임을 보실 때 광주에 볼 일이 있어 나갔다.
금남로를 지나가는데 기독교 전도사가 따라붙어 쫓아오면서
“회개하시오, 회개하시오!”
외쳐대는 것이었다.
스님이 발길을 멈추더니 하시는 말씀.
“회계를 하라고요? 나는 송광사 재무란 말이오. 당신이나 회계하고 싶으면 따라오세요. 마침 회계 자리가 비어 있으니.”
2538년 가을 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