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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가산과 보배산이 만들어내는 계곡 곳곳에 화강암 종류인 청석들이 보인다. 그래서 옛날부터 이 골짜기를 청석골이라 불러왔다.
사하촌은 절까지 가는 동안에 딱 한 곳에 있다. 마을사람들은 도중에 있다고 해서 ‘중말’이라고 부른다. 예전에는 화전(火田)해서 먹고 살던 이들이 꽤나 많이 모여 살았으나, 지금은 세 가구만 남았다.
머지않아 이 중말 아래쪽으로 괴산과 연풍을 잇는 도로가 난다. 11개의 다리와 2개의 터널과 4개의 교차로가 포함된 도로공사이다. 산과 계곡들이 몇 년 동안 몸살을 앓게 생겼다.
청석골 곳곳에 갯버들과 달뿌리풀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어쩌다 지나가는 승용차뿐, 인적이 드물어 버들치들도 인기척에 별로 놀라지 않는다. 버들치는 우리나라 물고기 가운데 가장 깊은 산속에 사는 물고기이다. 굳이 사람으로 치면 절골 안에서 토굴살이를 하는 스님과 같은 물고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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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께 개울가 길섶에 그득하던 고마리 노랑물봉선 붉은물봉선 여뀌 이삭여뀌 사위질빵 등도 간밤에 10월 서리를 맞아 풀이 죽었다. 햇살 좋은 곳에 금불초 지느러미 엉겅퀴 벌개미취 산국 등이 말간 미소를 머금고 쌀쌀한 가을을 견뎌내고 있다.
금불초는 여러해살이 들국화이다. 키는 50센티 미만으로, 들국화치고는 작은 편이다. 햇볕만 있으면 어디서든 잘 자라기 때문에 사찰 주변에 지피용으로 심어두면 생태조경에 한 몫을 해낼 것이다. 뿌리줄기가 뻗으면서 번식하기 때문에 굳이 관리를 하지 않아도 잘 자란다.
각연사로 가는 절골의 숲에는 소나무와 참나무가 전쟁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미 많은 소나무들은 능선 쪽으로 피해 달아나 활엽수들이 대세를 이루었다. 활엽수로는 참나무류 말고 오배자가 열린 붉나무를 비롯하여 신나무 누리장나무 당단풍 서어나무 밤나무 층층나무 왕버들 등등이 관찰된다.
신나무 단풍이 불타듯 붉다. 예전에 길을 가다가 짚신이 헤어지면 벗어서 이 나무에다 걸어두고 갔다고 해서 ‘신나무’라고 불렀다. 또 신나무에서 검은 물감을 얻어 스님들의 장삼이나 법복을 물들였다고 한다. 그래서 ‘색목(色木)’이라고도 했다. 지금은 가사 장삼의 염색도 거의가 화학염료에 의존한다.
누리장나무 열매가 다람쥐 눈처럼 앙증맞다. 분홍색 꽃받침은 꽃보다 더 정열적이다. 마치 여인네들의 저고리에 다는 브로치를 연상케 한다. 양지를 좋아하는 누리장나무는 전국에 걸쳐서 분포되어 있다.
산모롱이를 돌아서면 각연사 기와지붕들이 먼저 보이고, 산그늘 아래 파랗게 이끼 낀 개울이 눈맛 좋게 소리를 내며 내려온다. 서기(瑞氣)까지 느끼게 하는 풍광이다. 물소리는 낭랑하기 이를 데 없고, 물속에 잠긴 단풍은 더욱 붉다.
시냇물 소리가 부처님의 장광설인데(溪聲便是長廣舌)
산색은 어찌 청정 법신이 아니리(山色豈非淸淨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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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연사는 신라 법흥왕 때인 515년에 유일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515년이라면 법흥왕이 즉위하던 다음 해, 이차돈이 순교하기 훨씬 전의 일이니 신빙성이 크게 떨어지는 전설이다.
대웅전 앞마당에 네발나비와 뿔나비가 여기저기 날아 앉았다. 이들은 흙 속에 들어 있는 미네랄을 찍어먹고 있는 중이다. 몸속에 영양분을 충분히 비축해두어야 겨울을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산에 들에 단풍이 들면 곤충의 제왕인 왕사마귀의 전성시대도 막을 내린다. 이젠 팔을 뻗어 눈앞에 알짱대는 먹이감을 낚아챌 기운도 없다. 왕사마귀 한 마리가 대웅전 석축에 죽은 듯이 붙어있다.
아무래도 각연사의 본전은 비로전이다. 보물로 지정된 비로자나불상도 비로전에 모셔져 있다. 비로전이 앉은 주산(主山)은 덕가산이다. 덕가산 줄기는 봉암사가 자리한 희양산으로 이어진다. 안산(案山)인 칠보산은 화려한 이름과는 달리 하루 종일 그늘에 가려있다. 그래서 자꾸만 ‘칠봉산(七峰山)’을 생각하게 된다. 조산(祖山)인 속리산은 그 너머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보개산은 오른쪽 내백호로 앉아있다.
이렇듯 각연사는 첩첩산중에 둘러싸인 천옥(天獄)이다. 이런 형국에선 도인이 살지 않으면 도적이 숨어든다고 했으니, 나옹이 고려조의 도인이라면 사명당은 조선조의 도인이겠다.
비로전 정면의 기둥은 상처투성이다. 상한 부분을 수술해 도려내고 다른 나무로 갈아 끼웠다. 스님들의 누더기 옷과 같다. 숲 속에 살면서도 나무 다루기를 천금같이 해온 옛 스님들의 나무 사랑이 가슴 뭉클하게 와 닿는다.
비로전 앞마당에 달피나무(염주나무)와 늙은 대추나무가 서 있다. 각연사 대추나무는 우리나라 절집 안의 대추나무 가운데 가장 고참이다. 너무 노쇠하여 열반이 멀지 않은 상황이다.
절에서 개울을 따라 통일대사비를 찾아가다보면 왼쪽으로 넓은 골짜기가 나타난다. 칠보산과 덕가산의 경계를 이루는 이곳에는 암자 하나는 충분히 들어서고도 남을 넓은 풀밭이 있다. 거기 비신을 잃어버린 귀부 하나가 묻혀 있어서 등산객들은 ‘거북등 골짜기’라고 부른다.
거북등 골짜기 초입에는 칡덩굴을 비롯해 온갖 초본류들이 어지러이 뒤엉켜있다. 왕고들빼기 수크렁 새팥 소리쟁이 진득찰 익모초 억새 익모초 등의 우리 풀들과 달맞이꽃을 비롯한 왕강아지풀 망초 개망초 돼지풀 환삼덩굴 등 귀화식물들도 한데 어울려 있다.
산에 에워싸인 풀밭은 햇볕이 좋아서 곤충들에겐 극락이다. 9월엔 청띠신선나비가 여왕노릇을 하고, 10월엔 산제비나비가 여왕 노릇을 한다.
어디선가 부스럭 소리가 나더니 노루가 펄쩍 뛰어 산꼭대기로 도망을 간다. 거북등 골짜기는 초본류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어서 겨울에도 노루들이 내려와 마른 건초로 배를 채우고 가는 곳이다.
노루는 산림지대에 사는 초식동물이다. 수컷은 20센티 가량의 뿔을 갖고 있는데, 생후 1년이 되면 뿔이 나기 시작한다. 가을에 짝을 짓고, 늦은 봄에 2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통일대사탑비로 가는 길은 지난해 루사 태풍으로 여기저기 패여서 어디가 개울인지, 어디가 길인지 분간이 안 된다. 통일대사비 앞에 노린재나무가 파란 열매를 탐스럽게 내달았다. 노린재나무는 어른 키 정도의 작은 나무이다.
개울 주변에 박새 어치 직박구리 쇠딱다구리 등이 어지러이 날아다닌다. 박새는 우리나라 산에서 가장 흔한 새이다. 그래서 넓을 ‘博’자를 붙여주었다. 목욕을 즐겨하기 때문에 박새가 있는 곳을 찾아가면 물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은 등산객들의 오랜 지혜이다.
칠보산의 남동사면 숲은 자연도가 높다. 참나무류는 졸참나무 갈참나무 신갈나무 떡갈나무 굴참나무 등이 나타나고 다른 교목으로는 느티나무 산벚나무 서어나무 물박달나무 물푸레 층층나무들이 섞여 있다. 아교목과 관목으로는 붉나무 때죽나무 쪽동백 산초나무 생강나무 단풍나무 국수나무 철쭉 진달래 갯버들 왕버들 등이 보인다.
위로 올라갈수록 토양이 얕아지면서 바위들이 많이 나타난다. 높이 오를수록 산도 빠르다. 따라서 소나무의 우점도도 점차 높아진다. 2002년 솔잎흑파리가 난동을 부리고 간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있다.
칠보산의 9월은 버섯철이다. 송이버섯을 따러 마을사람들이 뻔질나게 다닌다. 이 등산로도 송이꾼들이 낸 길이다. 산중 사람들은 능이버섯과 자연산 표고버섯을 송이버섯보다 더 쳐준다. 칠보산에는 그 밖에 싸리버섯과 오이꽃버섯 등 여러 종류의 식용버섯들도 함께 난다.
그러나 버섯철은 단풍물이 들기가 바쁘게 끝나고 만다. 9월말이면 버섯꾼들의 발걸음은 이미 사라지고 보이질 않는다. 이 가을이 끝나면 숲길엔 더덕꾼들이 한둘씩 다시 올라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