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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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일을 하든 오직 주인공에다 맡겨놓고 해 보세요
이 주머니 속에서 수없는 나날을 내내
그냥 그렇게 살겠느냐, 탁탁 털고 나서겠느냐?

도 얼마나 한탄을 했겠습니까?
질문자3(남): 그러면 그 왕이 그 스님을 죽인 죄에 대한 업은 없어지는 겁니까?
큰스님: 그거를 뉘우치고 둘 아니게 봤다면 없을 것이고, 둘로 봤다면 그거는 인과성으로 또 흘러 내려가겠죠.
질문자3(남): 지장보살님은 지금도 지옥 문고리에서 지옥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현상계를 보면 전혀 보람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지장보살님의 보람은 무엇입니까?
큰스님: 여러분이 이렇게 공부하는 것이 아마 지장보살의 보람일 겁니다. 지장보살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부처님의 마음이자 여러분의 마음입니다. 보살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이 보살이라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그 눈물을 싫다고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눈물을 흘리고 그렇게 공부하려고 하시는 그 도리가 바로 보살이 그렇게 하고 계시다는 얘깁니다. 그걸 항상 둘로 보시지 말고, 따로따로 이렇게 보시지 마세요.
질문자3(남): 예, 스님께서는 이미 다 구족하시고 부족하신 게 없으시고 더 이루실 것도 없으신 걸로 저는 생각됩니다. 그러신 스님께서 시끄럽고 험악한 이 자리에 그냥 나투어 주고 계시는 그 모습을, 그 마음을 저는 느껴 보려고 애를 많이 썼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스님께서 그 마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 수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만 오리무중입니다. 도저히 스님의 마음과 제 마음이 공감이 되지를 않습니다. 살아 계신 스님을 보고도 그 마음을 느끼지를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불보살의 마음을 어떻게 알려고 하겠는가. 그래서 스님! 제발 간절히 부탁드리건대 제가 스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을 때까지 역력하게 살아 계신 모습 보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큰스님: 여러분, 제삼자인 내 마음을 아시려고 하지 마시고 여러분의 마음을, 그저 없든지 있든지 가난하든지 부자든지 항상 진짜로 믿고 ‘나를 내내 이끌어 왔고, 세세생생에도 이끌어 갈 수 있는 것은 너뿐이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그렇게 한다면 모두가 그렇게 되죠. 이게 ‘나’ 라고 하니까 자기만 집어넣은 것인 줄 알고 또 누구 집어넣고 누구 집어넣고 이러죠? 집어넣는 과정에서 그 하나라는 거를 모르기 때문에 누구누구 다 집어넣고 그렇게 하는데, 그런다면 복잡해서 못하시죠? 그러니까 자기 하나에다만 해도 그렇게 모두 전부가 된다는 얘기죠. 하나의 마음으로다가 둥글려서 하나로만 해서 모든 걸 집어넣는다면 땅속에서 사는 벌레도 알고 아마 인사를 할 거예요. ‘나는 이제 알았어. 나는 벌레의 모습을 이제 벗어날 거야.’ 하고 말이에요.
우리가 알든 모르든 자기 몸뚱이를 이끌어 가는 자기 근본을 진짜로 믿고, 어디를 가나, 들어오나 나가나, 어떠한 일을 하든 그 모든 거를 오직 거기다가 맡겨 놓고 해 보세요. 모든 것이 그냥 그대로 공부예요, 그게. 진짜 공부는 ‘이것이 옳다, 이것이 그르다’ 하는 게 아니라 ‘옳은 것도 거기 놓고 그른 것도 거기 놔라. 옳고 그른 게 모두가 둘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도 함이 없이 사는 거니까 모든 것을 그대로 놔라.’ 이런 겁니다. 그래서 서로 토론 삼아 이렇게 하다 보면 더 빠르게 우리가 진행할 수 있지 않느냐, 이런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매일 11시부터 12시 사이에 급한 사람들은 와서 얘길 하고 가시고 또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왜 그렇게 얘길 해야 하느냐. 어떤 사람은 그냥 와서 말을 해도 그냥 해결이 나죠. 그런데 어떤 사람은 줄창 와도 안되죠. 그 왜 그럴까요? 믿지 못하기 때문이죠, 그게. 정말 아까 말씀하신 대로 ‘나는 병이나 낫겠다.’는 그런 욕심 때문이죠, 급하니까. 그래서 “급하다는데 어찌 스님은 그렇게 무관심하십니까?” 이런 사람도 어떤 때는 있었어요. 그런데 “급하니까 그렇게 하라는 거 아니냐.” 그랬어요. “급하니까 그렇게 믿고 그렇게 하라는 거 아니냐.” 하고요.
그런데 와서 말하는 사람이나 또 생각을 해 주는 사람이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 그 순간 찰나죠. 그거를 생각을 잘해야 되겠죠. 얼마나 밉고 곱고도 없느냐, 잘살고 못살고 그거를 평가하지 않느냐, 돈이 적고 많고를 평가하지 않느냐. 이런 것들 모두를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쪽 전깃줄이 요만하다면 저쪽에서 가져오는 마음도 전깃줄이 요만하겠죠. 그렇다면 요만한 걸 가져오느냐, 그 전깃줄마저도 안 가져오느냐는 문제예요. 그러니까 불이 안 들어올 수밖에요. 전깃줄을 요만한 거라도 가지고 와야, 마음의 문을 열고 진짜로, 그렇게 하라는 대로 하면서 가져와야 이게 이어지면서 불이 들어올 텐데 말이에요. 한 쪽에만 있어도 그것은 불이 안 들어오죠. 한 쪽 줄만 가지고 불이 들어오겠습니까? 두 쪽 다 있어야죠.
그래서 이번에도 저기 가서 그런 얘길 했습니다만, ‘불교’라고 하는 그 언어 자체는 진리를 말한 것이고 생명과 삶을 말한 것이지 그것은 종교를 말한 것이 아니다. 진리다, 그냥. 그런데 당신네들은 진리라는 거를, 종교라는 거를 이름을 지어 놓고 내 종교, 네 종교 하고 문제를 일으킨다. 잘났든지 못났든지, 애든 어른이든, 늙었든 젊었든 간에 모두, 자기 주처는 자기가 가지고 있어. 어린애라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기 주처를 진짜로 믿는다면 자기의 소리를 자기가 듣고 산다 이거야. 과거 수없이 거듭거듭 지나오는 동안 자기를 형성시킨 자기의 소리를 듣고 산단 얘기예요. 자기 소리를 듣고 자기가 ‘어떡한다’ 하면 그대로 자기 소리가 그냥 자기 소리죠, 뭐. 처음에는 그것을 듣는다 이러면 배우지만 나중에는 ‘배우는 것도 또 가르치는 것도 없다, 둘이 아니게 돼서.’ 이렇게 되는 이치가 있죠.
그런데 사람들이 모두 나라마다 말이 다 각각이고 종교가 다 각각이지만, 내가 그래서 여기 기독교나 가톨릭교 다니던 분이 오시거나 그런다면요, 항상 그래요. “내가 나가지 말라고 그러는 게 아니다. 주님은 바깥에 있는 게 아니라 네 안에 있다. 주처가 항상 자기한테 있지 자기 빼놓고 뭐가 있느냐?” 이러죠. 자기가 자기를 빼놓으면 이 세상은 어딨고 상대는 모두 어딨느냐는 얘기죠.
그래서 자기부터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부처님의 어느 제자가 아파서 그냥 일어나지도 못하니까 부처님 뵙기를 아주 소망을 했습니다. 그렇게 소망하는 줄 알고는 부처님께서 그 아픈 사람에게 갔어요. 그 집에 가서 “좀 어떠냐?” 하면서 들어가니까 일어나려고 하잖아요. 일어나려고 하는데 “일어나지 마라. 껍데기는 아무리 일어나려고 해도 소용이 없다. 그러니 그냥 드러누워 있되 너부터 먼저 알아라. 그래서 내 마음도 네가 알게 되면 너와 나와 둘이 아니니라. 둘이 아닐 것이니 그렇게 해라.” 하더랍니다.
그런 거와 같이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껍데기로 이렇게 휘휘 젓고 다니다가 정말 그릇대로, 차원대로 살다가 죽으면 자기 인연 따라서 가는데, 인연 따라 가지도 못하는 사람이 있거든요. 이번에 독일 수용소에 가서 천도를 시키는데요, 모두 두더지, 쥐 이런 걸로 태어난 사람,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 안에서 나오지 못하는 사람, 흙벽 안에서도 나오지 못하는 사람, 또 나와서도 오고 갈 바를 몰라 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때 자기가 당하고 살던 그 환상이 눈앞에 벌어져 있으니 꼼짝을 못하는 거예요. 그 환상들을 다 치워 주니까 그때서야 다 나온 거죠. 그리고 쥐나 두더지나 다람쥐, 뭐 이런 걸로 된 것에다가는 입력을 해서 넣어 줬지요. 꼬리표를 붙이지 않았어도 입력을 해서 넣어 줬으니까 꼭, 몸을 벗으면 바로 인도환생이 되죠.
그러니까 쥐들도 다들 알아듣고 얼마나 좋아서 뛰는지 정말이지 실감을 하면서 뭐라고 나는 혼자 중얼거렸느냐 하면요, ‘여기 온 것이 참, 내가 당신네들한텐 큰 심부름을 했구나. 그런데 내가 한 거는 하나도 없구나.’ 하고요. 내가 한 것이 없다는 뜻을 아시겠습니까? 함이 없이 한다고 항상 그랬죠. 내가 한 거는 하나도 없구나. ‘내가’라는 게 뭔가. 내 모습이 내가 아니니까. 내 모습이 아닌 바로 나 자체가 이 모두를 함이 없이 한 거니까, 대단히 좋은 일을 보살 부처님께서 모두 하셨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학교에서 종을 울리면 애들이 다 모이죠? 그와 같으니까요. 그래서 큰 보람을 느꼈어요. 내 마음도 참 좋았고요.
그리고 어느 성당인데 이 지하로다가…, 그걸 뭐라고 그러나? 땅굴을 파서 왜, 이쪽저쪽으로 굴을 파서 숨었다고 그래요. 그런데 숨었는데 그게 무너지면서 벽 사이에 모두 묻힌 거예요. 그래서 그 굴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은 다 붙들어 가고 그 굴에 들어간 사람은 붙들어 내오질 않았다는 거예요. 어차피 죽을 거니까 그랬는지. 그런데 그것이 있다고도 볼 수 없고 없다고도 볼 수 없겠죠. 하지만 있는 건 있는 건데 어떡합니까. 있기 때문에 이 세상, 지구 안에서도 이렇게 수없이 나면 죽고, 나면 죽고, 나면 죽고, 낳고 또 죽고, 낳고 또 죽고 이렇게 끊임없이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렇게 많은 인파를 개개인으로다가 나오게 한다면 문제가 좀 크지 않은가. 지구는 요만한데 사람들이 많으면 지구 그릇이 무거워서, 무거운 거는 아니죠. 무겁지는 않은데 정도가 넘어가면 무조건 사람이 그냥 여기서 뭉텅 죽든지, 저기서 뭉텅 죽든지 이런 문제들이 일어나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거를 감안해서 잘, 내 나름대로, 내가 한 일도 없지만 한 일 없이 하고 왔습니다.
여러분, 뒤의 부처님을 곰곰이 잘 들여다보세요. 생각해 보시면 아실 거예요. 오장 육부도 전부 비고, 손발이 있는데 걷지 못하고 쓰지 못하니까 손발도 없죠? 머리도 없죠. 전부 없죠. 없으니까 세상 허공에 꽉 차 있다는 얘기죠. 만약에 조금이라도 붙어 있다면 그렇게 할 수가 없죠. 6·25때 그렇게 사람들이 모두 부처님을 놔두고 가고 뭐, 긴 염주 그런 거를 다 팽개치고 가고 이랬거든요. 그래서 그때 새삼스럽게 느낀 거죠. 그러니까 너무나 우스워서 웃다가 하는 말이, 혼잣말이에요, 이게. ‘만날 조금도 놓치지 않고 예배를 올리고, 조금도 놓치지 않고 목에다 걸고, 조금도 놓치지 않고 다니던 사람들이 어째 다 버리고 갈까.’ 하고요. ‘진짜로 저렇게 다 버리고 갈 수만 있다면 저 부처님은 자기하고도 둘이 아닐 뿐만 아니라 항상 같이 응할 텐데….’ 하고요.
우리가 이렇게 마음공부라고 하는 것도 딴 사람이 듣기에는 ‘저 스님은 만날 좌선도 안 시키고 뭐, 뭣도 안 하고 생활 불교로만 가르친다.’ 이렇게 생각하겠지만, 저는 태평하게 그냥 놔두는 겁니다. 태평하게 놔두면 스스로 여러분이 각자 다, 앉고 싶을 때 앉을 거고, 일어날 때 되면 일어나고, 일할 때 되면 일하고, 누워서 잘 때 되면 잘 거 아닙니까? 그게 다 참선이란 말입니다. 만약에 그게 조금이라도 틀린다면 벌써 이건 참선이 아니죠. 그건 끊어지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그렇게, ‘우리는 오장 육부를 다 가지고 있지만, 귀도 가지고 눈도 가지고 코도 가지고 입도 다 가지고 있지만 함이 없이 이끌어 가는 데가 있구나. 함이 없이 하는구나. 함이 없이 사는구나. 그런데 좋은 마음을 쓰라고 하는 마음은 항상 갖게 해 주었구나. 인간이라 갖게 돼 있구나. 나쁜 것 좋은 것은 알게 돼 있구나.’ 이거 말이에요. 나쁜 것 좋은 것도 모른다면 짐승과 같죠, 뭐. 그래도 짐승은 인연을 알아서 주인이 죽게 되거나 이런다면 그 식구를 살리기 위해서, 그만큼 받았으면 그만큼 해요. 집이 무너져서 식구가 다 죽을 텐데 쥐가 나와서 소리를 내고 춤을 추니까 바깥에서 무슨 소리냐고, 식구가 다 나와서 구경을 하는 동안에 그 집이 무너져서 식구들을 다 살렸다지 않습니까. 그런 일들 하며…, 아마 예전에 얘기를 다 했을 거예요.
‘나’ 하면 나는 없는 겁니다. 나는 나 아닌 나와 둘이 아니다. 그러니까 함이 없이 모든 거를 하고 있으니까 모두 그놈이 하는 거죠. 그놈이 하는데 그놈이 그놈이 아니라 그놈이 그놈이죠. 여러분이 그렇게 사시다 보면 첫째, 이 공기주머니 안을 벗어날 거고 공기주머니 안을 벗어나서 자유스럽게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에너지로 발생을 해서 진화가 돼서 살든지 이 지구만이 아니라 여기저기 뭐, 우리가 살 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보지 못하니까 그렇지 우주도 많고 혹성도 좀 많습니까? 별성도 많고요. 그런데 그런 데서부터 우리는 종자가 생겨서 이렇게 인간으로 된 거니까요. 이 공기주머니도 그렇게 해서 내려 준 거고요. 우리 생명이 생기니까 그렇게 공기주머니가 생긴 거죠. 그러니까 될 수 있으면 우리가 이렇게 있을 동안에 공부 열심히 해서 나중에 같이 또 만납시다.

※위 법문은 1999년 9월 5일 법형제법회에서 설법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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