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엽수들이 어두운 구름처럼 서 있다
햇빛은 투명하게 물과도 같이
이파리 위에 내려앉고
바람은 가지 끝에서 윙윙 거린다
오늘 아침 일대의 공기는 무겁다
검은 뿌리를 딛고 위로 오르던 수액은
가지 끝에 멈추어 서고
등고선을 넘어 온 여름산들은
검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마을 저편에서 무엇을 허무는지
포크레인 소리가 요란하다
가디건을 어깨에 걸치고 창가로 간다
의자를 당겨 앉는다
다 마신 줄 알았던 찻잔에 남은
한모금 식은 커피처럼
내성적인 등 위로 운명선 같은 예감이
서늘하게 흘러내린다
산 아래쪽으로 머리 흰 할머니가 지나는 것을
오래 바라보다가 나는 바닥에 내려앉는다
11월에는 모두 내려 앉는다
수용소 뜰에 낮게 모여 드는 현상되지 못한 음화들
-김혜경, <정신과 표현> 9·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