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자1(남): 스님, 이렇게 항상 저희를 이끌어 주시는 것에 대해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몇 가지 어리석은 질문을 올리고자 합니다.
안팎이 공하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믿고, 조금씩은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행동에 있어서는 여전히 고정된 나가 있고 고정된 너가 있어 괴로울 때도 많습니다. 어떻게 하면 안팎이 공한 이치를 뼛속 깊이 체득할 수 있을는지 먼저 가르침 주시기 바랍니다.
큰스님: 항상 말했듯이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공한 줄을 안다면’ 하는 소리는, 과거에도 이런 때가 있었고 또 미래에도 이런 때가 있을 거고 현재에도 이런 때가 있고, 그러니까 그것이 바로 삼세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하나라는 뜻입니다. ‘하난데 그 하나마저도 공했다. 그 공한 도리에서 우리도 역시 공해서 살고 있다.’ 하는 뜻을 알면, 그대로 행해 나갈 수 있다면 그대로 공한 것이죠. 공했다는 걸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우리가 하나하나 해 나가는 게 그대로 공한 것이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다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항상 이런 얘기 하죠. “아버지!” 하면 아버지 노릇을 자연적으로 해 준다고요. 또 아들을 부르면 아들 노릇을 자연적으로 해 주고, 그렇게 자연적으로 해 나가고 있단 말입니다, 우리가. 자연적으로 해 나가고 있으면서도 그 자연적으로 해 나가는 걸 몰라서 때에 따라서는 마음으로 자기를 자기가 고민하는 거죠, 모두가. 그러니까 그 고민을 다 벗어 버린다면…, 옛날에 이런 얘기 한 적이 있죠.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까, 자네가 좀 가서 어떻게 해 주게.” 하니까 “나오신 게 없는데 가실 게 어딨다고 그러는가.” 하더라는 말입니다. 그럼 그 말 한마디에 벌써 된 거죠?
그러니까 ‘말이 많으면 실천을 옮기지 못하고 말이 적으면 실천을 옮길 수 있다.’ 이런 말이 있죠. 그랬듯이 마음속으로 자꾸 편안치 않게 생각을 하지 마시고 무조건 편안하게 하세요. 그러면 나중에 그 말 한마디도 없이 그 도리를 알 수 있을 겁니다.
질문자1(남): 예, 감사합니다, 스님. 두번째 질문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스님께서는 저희들에게 가르치시기를 때때로 시간이 나면, 혹은 일부러 시간을 내서라도 조용히 앉아서 ‘주인공, 너만이 네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잖아. 너만이 내면의 모든 이치를, 물리를 깨닫게 할 수 있잖아.’ 하고 두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저도 스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이렇게 수행을 틈나는 대로 해 왔습니다만 아직은 지혜의 문이 활짝 열린 것 같지 않습니다. 제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무엇이 부족한 것인지 깨우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큰스님: 이 세상 살아나가는 데는 잘못되고 잘되고가 없고, 악도 선도 없어요. 잘못된 것 잘된 것이 없다고요. 그 없는 도리를 안다면 ‘내가 전부 공했구나.’ 하는 걸 알게 되실 거예요. 그런다면 모든 세상살이를 편안하게 할 수 있겠죠. 그러다 보면 나중에, 아까도 얘기했듯이 말 없이 말하고, 함이 없이 하고 이렇게 지낼 수가 있다 이런 말이죠.
질문자1(남): 스님, 대단히 죄송하지만 지금 스님의 말씀을 제가 잘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한번 더 쉽게 풀어서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큰스님: 그 말을 알아듣게 하려면, 허허허…, 우리가 지금 산다는 것이 전부 잘못된 게 없어요. 함도 없고요. 한다는 것도 없고, 그냥 그대로 물 흘러가듯이, 그대로 바람이 불듯이, 그대로 구름이 떠다니듯이 그렇게 하고 가는 겁니다. 어느 땐가는 그것이 왜 그렇게 되는지 그걸 알게 되겠죠. 지금 걷다가 멈춰지는 그런 걸음이 아니니까요. 세상살이가 다 그래요. 찰나찰나 그냥 걸어가는 거지 멈춰서 쉬는 자리가 없죠. 그러니까 그 도리를 알면 그냥 쉴 수 있다,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오면서 쉴 수 있다 이런 말이죠.
질문자1(남): 예, 알겠습니다. 이 공부를 하고부터는 저 자신의 여러 가지 결점이나 과거에 묻은 습이 나오는 것을 전보다는 조금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나오는 대로 스님 가르침대로 열심히 제 자리에 돌려놓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과거에 묵은 습이 하도 두텁고 짙어서 정말 스님 말씀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스님께 여쭙고 싶은 것은, 밖으로 나온 것을 제자리에 돌려놓는 것은 스님의 가르치심인데 그 습이나 이런 것들이 밖으로 표출되기 전에, 나오기 전에 있는 그 상태에서 원천적으로 녹이는 길은 없는 것인지 그 점을 스님께 여쭙고 싶습니다.
큰스님: 나오기 전에 돌려놓으려고 애쓰지 말고요, 항상 내가 살아나가는 데에 모든 걸, 이 세상 살아나가는 모두를 하나로 둥글릴 수 있죠? 모든 거를요. 그래서 거기에다가 맡겨 놓을 때, ‘이런 일이 생기지 말라, 저런 일이 생기지 말라.’ 이러고 놓는 게 아니죠. 놓을 때에 ‘너만이 그런 사연이 모두 쉬게 할 수 있어.’ 하는 마음으로 놔야죠? 자기의 요량이에요, 그것도. 모든 게 자기의 요량대로죠. 길을 가는데도 이쪽으로 가는 사람도 그 집엘 가고 저쪽으로 가는 사람도 그 집엘 가는데 길을 어떡해야만 빨리 가나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더디든 빠르든 상관없이 그냥 거길 가는 거죠.
질문자1(남): 감사합니다, 스님. 놓는 방법에 대해서 여쭙고자 합니다. 스님께서는 저희들에게 가르치시기를, 예를 들어서 몸에 병이 났을 경우에, 어떤 경우에는 ‘너만이 이 병을 낫게 할 수 있잖아.’ 하고 관(觀)하라고 하신 적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죽이든 살리든 너 알아서 해.’라고 하신 적도 있고, 또 어떤 경우에는 ‘집을 짓는 것도 법, 안 짓는 것도 법이니까 지을 만 하면 짓고 안 지을 만하면 짓지 말고.’ 이렇게 세 가지 종류로 풀어서 저희들에게 법문을 하신 것 같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 제가 여러 법우님들하고 토론을 해 본 결과 저희가 어떤 결론을 내렸는가 하면, 첫번째는 이 공부를 해서 힘을 얻기 위해서는 되는 방향으로 ‘너만이 할 수 있잖아.’ 그렇게 해야 재미도 보고 힘도 얻을 것이고,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른 다음에는 그것마저 놓아야 하니까 ‘죽이는 것도 너, 살리는 것도 너, 너 알아서 해.’ 라는 단계가 돼야 될 거 같고, 그런 단계를 훨씬 뛰어넘어서 큰스님처럼 자유자재한 경지에 이르면, ‘필요하면 집을 짓고 필요 없으면 안 짓고’, 그때는 아무것도 걸리지 않는 상태가 되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그 세 가지의 가르침이 결국은, 스님께서 저희들에게 법문을 하실 적에 저희들의 근기가 워낙 다양하니까 특정인을 지칭해서 법문을 하실 수 없으니까 두리뭉실하게 하신 거지 사실은 그게 개개인에 따라서 다 다르게 적용이 돼야 될 것이 아닌가, 저희들은 그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저희가 이해한 게 맞는지 스님의 가르침을 바라겠습니다.
큰스님: 맞아요. 개개인의 그릇이 다 다르죠. 그러니까 작은 사람이 쓸 것이 있고 큰 사람이 쓸 것이 있고 여러 가지 가지죠. 그릇을 안 가지고 다니는 사람도 있고요. 그런데 그릇이 없어서 안 가지고 다니는 게 아니라 몰라서 안 가지고 다니죠. 본래는 다들 있는데 말입니다. 부처님과 여러분들이 차원이 다르다고 하지만 다르지 않습니다. 왜 다르지 않느냐.
‘부처님은 어디 계십니까?’ 하니까 똥둣간의 똥막대기라고 했습니다. 그건 무슨 뜻에서 말한 겁니까? 자식을 기르는데 부모가 항상 똥 닦아 주듯 항상 자기를 떠나는 일이 없어요. 자불(自佛)이 자기를 떠나는 일이 없단 말입니다. 떠남이 없이 큰 거든 작은 거든 수없이 해 나가는 거를 다 손살피 돌보고 있는데 자기가 그것을 몰라서 그렇죠. 또 때에 따라서는 고통이라고 그러지만 그것을 알고 간다면 그것이 고통이 아니죠. 완벽한 사람을 만들기 위한 방편으로써 그렇게 길을 걷게도 하고요, 손을 잡아끌기도 하고요, 그런 경우가 많죠. 하지만 여러분들은 그 뜻을 자세히 모르기 때문에 그렇죠.
질문자1(남): 감사합니다, 스님. 이번에는 심성과학 연구와 관련해서 몇 가지 힌트를 얻기 위해서 스님께 몇 가지 질문을 계속해서 올리고자 합니다. 정신병이라든지 각종의 암 같은 것은 현대의학 수준으로는 거의 난치 내지는 불치병의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기회 있을 적마다 저희들에게 가르쳐 주시기를, 그런 암이건 정신병이건 간에 과거의 영계성, 인과성, 유전성의 영향이 많다고 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현대 의학이 밝혀낸 바에 의하면 암 같은 경우도 정상 세포의 분할을 억제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