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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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세월을 탓하지 말고 정진하라
억겁의 시간도 깨닫고 보면 한 찰나에 불과한 것
삼독심 버리고 현재에 지극하면 올바른 수행 가능

[원문]
一念普觀無量劫 (일념보관무량겁)
無去無來亦無住 (무거무래역무주)
如是了知三世事 (여시요지삼세사)
超諸方便成十力 (초제방편성십력)
-강화도 전등사 약사전

[번역]
한없이 긴 세월도 한 생각 안에 있어
오고 감도 머무름도 역시 또한 없네.
이와 같이 전생과 현생 미래의 일 모두를 알 수
있다면 모든 방편을 뛰어 넘는 부처님이 되리.

[선해(禪解)]
우리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지 벌써 60여 년의 긴 세월이 흘렀다. 지난 9월 26일 금강산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서 옛날 청소년이었던 두 형제가 백발이 되어 다시 만났다. 나는 이 광경을 눈으로 목격하면서 새삼 가슴이 뭉클했다. 그들은 짧은 시간 만나고 또다시 긴 이별의 시간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인간사에 있어 가장 큰 슬픔은 바로 이별이다. 하물며 살아있어도 만나지 못하는 생이별은 더 큰 슬픔이다. 생사(生死)를 알지 못하는 가족의 이별은 평생을 가슴속에 한을 품고 산다. 그런데 누가 이런 생이별을 하게 만들었는가?
엄밀히 따지면, 이는 남북한도 아니고 바로 정권욕에 불탔던 김일성이라는 한 사람 때문이다. 그의 야욕으로 인해 수백만 명의 동족이 죽었으며 또한 생이별을 해야 했다. 지금도 휴전선 너머 가족과 생이별 한 채 수십 년간 마음의 병을 앓고 살아온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남아 있다.
그런데 김일성이란 이름은 오래전부터 사라진지 오래이며 그 대신 그의 아들인 김정일이 우상화 되어 있다.
하지만 만약, 이대로 또 10년이 흐르고 나면, 많은 사람들은 그 한을 품고 죽을 지도 모른다. 세월은 상처의 흔적을 잊게 하는 힘이 있다. 때문에 세월은 그들이 저지른 만행의 흔적조차 사라지게 할 지 모른다.
이미 20~30대 오늘의 세대는 전쟁이 있었는지 그 존재조차 잊었으며 과거, 북한이 저지른 만행조차 기억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북한에게 동조하기까지 한다. 동족이어서 우호적인 태도는 가지는 것은 좋으나 그 체제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가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지난 6일에는 수공(水攻)을 저질러 6명의 국민을 죽게 하고, 또 이면(異面)에는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이중적 태도를 가지는 그들의 인면수심(人面獸心)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이유이던 과거의 아픔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또 어떤 일을 저지를 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지난해 불교종단에서는 6. 25로 인해 페허가 된 북한의 강원도 고성군 온정리에 있는 신라시대의 사찰인 신계사를 복원하기 위해 막대한 돈을 들여 현대아산과 연계해 복원을 해 준적이 있었다.
신계사는 유점사, 장안사, 표훈사와 함께 금강산의 4대 사찰로 꼽힌다. 또한 ‘민족공동체 추진본부’에서는 앞으로도 북한의 사찰을 복원하려고 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일어난 수공(水攻)과 남북 이산가족을 보고 우리 불교계는 그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과연 그들을 위해 우리가 베풀어야 할 일이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하루 빨리 우리 정부는 인도주의 차원에서라도 지속적으로 이산가족 상봉 문제에 대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오늘 이명박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오늘의 주련 여행은 강화도 전등사다. 이곳은 고구려 소수림왕 때 아도(阿道)가 창건한 유서 깊은 곳이다. 아도는 당시 적국(敵國)이었던 신라에게 불교를 전한 인물이다. 그는 신라인으로 첫 번째 신도가 된 ‘모례’의 집에 숨어 살면서 포교를 하여 신라시대의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 피운 사람이다.
당시 절의 이름은 진종사(眞宗寺)였는데 이후 고려 때와 조선시대를 거쳐 계속적으로 중창한 사찰이다. 이후 고려 충렬왕(忠烈王: 재위 1274∼1308)의 비 정화궁주(貞和宮主)가 이 절에 옥등(玉燈)을 시주한 데서 비롯되어 전등사로 바뀌게 되었다. 전등사는 그래서 한국불교에 있어 매우 의미가 있는 절이다.
이곳에 있는 약사전은 조선시대 때 지어진 건물로서 건축술이 돋보이는 보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 보관된 현왕탱은 보물 제179호로 사람이 죽은 지 3일 만에 심판하는 현왕과 그 권속을 도상화한 것인데 조선 고종 21년(1884)에 제작된 그림으로 현왕도의 도상(圖上)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점 등에서 19세기 불화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여기에 적혀 있는 주련은 한편의 선시(禪詩)처럼 매우 뛰어나고 아름답다. 그러나 힘 있고 단아한 주련의 글씨는 몇 번의 전쟁을 걸친 터라 누가 썼는지 알 길이 없다.

‘한없이 긴 세월도 한 생각 안에 있어/ 오고 감도 머무름도 역시 또한 없네.’

요즘, 우리는 역사의 현장을 체감하고 있다. 세월은 이렇게 한없이 흘러가지만, 자연은 천년의 역사를 고이 안으로 품고 있다. 어찌 보면 역사란 한 생각 안에 고여 있으며 인간의 삶 역시 오고 감에 머무른 바가 없다. 말하자면, 천년의 역사도 한 생각에 지나지 않으며 인간의 삶도 덧없음을 이르는 선구(禪句)라 하겠다. 그래서 부처님도 일찍이 인간의 생사(生死)에 대해 ‘오고 감의 머무는 바가 없다’고 하셨지 않았는가.

‘이와 같이 전생과 현생 미래의 일 모두를 알 수 있다면/ 모든 방편을 뛰어 넘는 부처님이 되리.’

승가(僧家)에서의 선(禪)은 부처님의 삼처전심(三處傳心)이요, 불립문자(不立文字)이다. 그윽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깨닫는 게 곧 선인 것이다. 인간의 삶은 결코 그 선을 뛰어 넘지 못할 뿐더러 전생, 현생, 미래의 일 또한 알지 못한다.
더구나 인간은 눈앞에 일어날 일조차 알 수가 없다. 때문에 인간의 삶은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만일, 인간이 삼세(三世)를 능히 알 수 있다면 방편을 뛰어 넘어 부처님이 될 수도 있다는 말씀이다. 하지만 인간의 삶은 무력하기 때문에 스스로 마음안의 행복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탐(욕망), 진(화냄), 치(어리석음) 삼독(三毒)을 버려야만 한다. 이러한 삶의 이치를 능히 깨달을 수 있을 때만이 마음속의 행복을 찾을 수가 있다.
벨기에의 문학자 마테를링크가 쓴 ‘파랑새’라고 하는 희곡은 우리에게 너무나 유명하다. 어느 날 나무꾼의 두 어린 남매가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요술쟁이 할머니가 나타나서 파랑새를 찾아 달라 한다. 두 남매는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 멀리 여행의 길을 떠나 죽음의 나라와 과거의 나라를 빙 돌아다니고, 두루두루 편력을 한다.
하지만 아무 데서도 파랑새를 찾지 못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그 파랑새는 자신의 집에 있었다.
이와 같이 우리도 부처를 밖에서만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진불(眞佛)은 법당이나 선방, 산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심(自心)안에 있다. 바로 내안에 부처가 있는 것이다. ■ 조계종 원로의원
2009-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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