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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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이 될 것인가 봉맹이 될 것인가
이병두
칼럼니스트

이른바 검증을 둘러싸고 국회의 인사청문회에서 여야 사이에 갑론을박하던 정운찬씨가 국무총리로 임명됐다. 야당이 불참한 가운데 총리 임명 동의안이 처리됐으니 신임 총리의 앞날이 그리 순탄하지는 않을 것 같다.
정운찬씨는 흔히 ‘KS’라고 불리는 경기고와 서울대를 나오고 미국 유학까지 다녀와 이 나라 최고라는 서울대 교수와 총장까지 지냈다. 그러니 그는 우리 사회에서 최고의 명예를 누려왔고, 버리고 싶지 않은 기득권도 많이 가졌을 것이다. 이번 국회 검증 과정에서 드러난 이런저런 문제들도 그 중 일부가 밖으로 드러난 것이고, 그러니 이런 문제들은 정씨 혼자가 아니라 이 사회의 많은 인사들이 똑 같이 갖고 있는 문제이다. 그래서 정씨는 “억울하다”는 생각을 가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달리 정운찬씨는 단지 서울대 교수와 총장이라는 명예뿐 아니라 나름대로 ‘깨끗한 학자’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대통령 후보로 거론된 적도 여러 번 있었고, 여당인 한나라당보다도 오히려 야당 쪽에서 그를 영입하려는 구애노력을 펼쳤던 것으로 비치곤 했다.
그런 정씨가 이명박 대통령의 제의를 받아 총리로 가기로 한 것은 나름대로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하고 지인들과 상의하는 과정을 거친 뒤에 내린 결심일 것이다. 그가 내린 결심이 개인적 명예욕 때문인지, 국가와 민족을 위해 내 하나의 명예는 잃을 수도 있다는 대승적 결단인지, 아니면 일부에서 비판하듯이 추한 타락인지는 모른다. 어쨌든 나는 그가 내린 결심에 대해 “옳다, 그르다”고 왈가왈부할 생각이 전혀 없다. 다만 이왕 총리를 맡아 국정의 상당부분을 책임져야 하니 앞으로 최소한 몇 가지 원칙만은 분명히 해주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정씨는 “국정의 기본 원칙에서 대통령과 다를 때에는 소신을 굽히지 않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안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 ‘사마양저열전’에 나오는 “장수는 때로 임금의 명을 듣지 않는다(君命不受)”의 고사처럼, 대통령과 집권 여당의 의견이나 정책 방향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세상의 기본 원칙과 맞지 않는다고 판단할 경우에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소신을 분명히 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정 총리가 꼭 그렇게 해주기를 바라면서도 우리의 마음이 놓이지 않는 것은, 이와 비슷한 포부를 품고 총리의 자리에 나아갔다가 실패한 사례를 너무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전두환 정권 시절 “맺힌 곳을 풀고, 막힌 곳을 뚫겠다”며 총리를 맡아 많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던 김상협 前 총리의 경우에도 이 포부를 펼쳐 보이기는커녕 그 동안 쌓아온 ‘존경받을 자격이 있는 학자’라는 명예를 모두 잃어버리고 쓸쓸히 퇴장했다.
<전국책(戰國策)>에 이런 말이 나온다. “앞에서 있었던 일을 잊지 않으면 뒷일의 스승으로 삼을 수 있다(前事之不忘, 後事之師).” 앞서 김상협 씨 등 여러 사람이 겪었던 실패의 사례를 부디 귀감으로 삼아, 정 총리는 똑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중국 한(漢)나라 건국의 영웅이면서도 머뭇거리다가 억울하게 죽게 된 마당에 와서야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며 한탄하고 말았던 한신(韓信) 장군이 되기보다는, 도저히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전한(前漢) 말기의 혼란 속에 “서둘러 떠나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며 관을 벗어 도성 문에 걸고 떠나[掛冠] 은둔하여 자신과 가족의 몸과 마음을 보전한 봉맹(蓬萌)이라도 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것은 최악의 경우를 상정한 것이니 제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2009-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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