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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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박힌 돌 하나도 부처 아닌 게 없습니다
저는 이날까지 제가 산다고 생각해 본 예도 없고 제가 한다고 생각해 본 예도 없고 제가 지금 이렇게 잘한다고 생각해 본 바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 대덕 스님네들이 이렇게 오셔서 같이 해 주시고 같이 사랑해 주시고 같이 한마음으로 이렇게 좋은 말씀을 해 주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못났든 잘났든, 잘하든 모자라든 오늘날 이렇게 하게 된 것도 ‘그저 내 정성이면 되지.’ 하는 생각에서입니다. 누구에게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자 한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우리가 그런 마음에서 항상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진행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불교(佛敎)가 따로 있는 줄 알고 있는 분들이 많죠. 다른 종교들도 있고 그러니까 말입니다. 뉴욕에 갔을 때 기독교 가톨릭교 교인들과 신부님들이 모인 세미나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가 보니까 불교는 그저 미신의 소굴인 줄만 알고들 있더군요. 그러니 너무나 기가 막혀서 이런 말을 했죠. “일체 미생물에서부터 생명은 전부 불(佛)이다. 일체 만물만생이 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면서 배우는 것이 교(敎)다. 그래서 불교라고 하는데 당신네들은 불교 안에서 살면서 불교를 그렇게 말하느냐?” 이런 말을 했죠. “그럼 당신네들도 귀신이겠네.” 하고요.
그렇듯이 불교라는 단어 자체가 그대로 진리인 것입니다. 우리가 다 죽는다 해도 불교는 되남는 것입니다. 어디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가 우리 머리 깎은 사람들이나 하는 것인 줄 알지 마시고 불자들이나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불교다’ 하면 우리 지구뿐만 아니라 삼계간 온 누리를, 우주간 모두를 한데 합해서 일컫는 말입니다. 불교라는 이름 자체가 그대로 실지이고 그대로 진리이고 그대로 우리 삶입니다. 따로 불교인이 있는 게 아니고 여러분이 지금 생활하고 가시는 그 자체가 그대로 불교며 그대로 여여하며 그대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재입니다.
여러분! 여러분께서 이 세상에 나질 않았다면 뭐가 있겠습니까? 상대성 원리라든가 일거수일투족이 다 없는 것입니다. 내가 있기 때문에 있는 겁니다. 내가 있기 때문에 상대가 있는 것이고 종교도 있고 불교도 있다고 하는 거지 내가 없는데 뭐가 있겠습니까?
어느 누구든 부처님 아님이 있겠습니까마는 백지장 하나 사이로 부처다 중생이다 하겠죠. “우리 인생은 허허바다에 배 띄워 놓은 거와 같으니라.” 한 것은 이 몸을 비유한 거죠. 여러분 몸속에 생명들이 천차만별로 모습을 해 가지고 천차만별의 의식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이 몸 하나가 우주와도 같고 별성과도 같고 블랙홀과도 같습니다. 이 안에 세계가 벌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벌어진 그 모두를 중생으로 비유했거든요. 이 몸뚱이는 배로 비유하고 안에 들어 있는 생명체들은 전부 중생으로 비유했거든요. 그러니 파도가 치고 온통 바람이 불고 배가 뒤집히려고 하고 이럴 때에 중생들이 어떻게 해야만 되겠습니까? 오직 마음을 선장에게 일임해서 모두 같이 하고 마음을 편안히 둬야 그 배는 뒤집히지 않고 갈 곳까지 갈 겁니다.
비유컨대 콩을 심어서 콩나무가 됐다면 과거는 지나갔으니까 없죠? 콩씨가 콩싹으로 화했으니까요. 여러분 모습이 콩싹이라면 바로 그 콩싹은 또 콩씨를 열리게 합니다. 자기한테 자기 콩씨를 두고 과거로 돌아가서 콩씨를 찾는다면 아마 백 년이 걸려도 못 찾을 겁니다. 그래서 콩나무가 없어도 콩이 없고 콩이 없어도 콩나무가 없는 것입니다. 정신계와 물질계가 둘입니까? 우리 육신을 일거수일투족 끌고 다니는 것은 나무 뿌리와 같습니다. 나무 뿌리가 한 나무 전체를 안고 성장시킵니다. 지분과 수분 철분을 흡수해서 올려보내고 위에서는 공기력과 태양력을 흡수해서 내려보내고, 정맥 동맥이 돌아가듯 이렇게 해서 나무를 성장시킵니다. 푸르르게 살게 말입니다.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그 뜻이 뭔가를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 심사숙고해 보십시오. ‘내 고깃덩어리를 믿어라.’ 하신 건 아닙니다. 내 고깃덩어리를 ‘따르라’ 했지 ‘믿어라’ 한 거는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가 왜 편안치 않게 살아야만 하겠습니까?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몸뚱이 속에 천차만별의 의식이 있는데 우리 몸뚱이는 그 생명들에게 뭐가 됩니까? 관리인이 되고 심부름꾼이 되고 집이 됩니다, 집! 그렇다면 여러분이 물 한 컵을 잡수신다 하더라도 혼자 잡수시는 게 있을까요? 더불어 같이 먹는 거니 내가 먹었다고 내놓을 수가 없죠. 안 그럴까요? 내가 먹었다고 할 수가 없죠. 더불어 같이 먹었으니까.
그래서 “색(色)은 일체 공(空)했느니라. 공이 모두 색이니라.” 하셨습니다. 왜 공했다고 말씀을 하셨을까요? 보는 것도 듣는 것도 말하는 것도 가고 오는 것도 고정된 게 하나도 없으니까, 찰나찰나 화해서 바꿔 가면서 나투니까 어떻게 공하지 않았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니 내가 어떤 거 할 때에 내가 했다고 할 수 없으니까 공한 것이요, 여여한 것이다 했습니다.
여러분이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태어나서 살면서 고정되게 보고만 있으면 목석이라고 할 겁니다. 그냥 고정되게 듣고만 있으면 귀머거리라고 할 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거를 생각해 볼 때에 ‘일거수일투족이 고정된 게 하나도 없으니 그대로 내가 한 바가 없이 여여하구나!’ 한 것이 됩니다. 그대로인데, 그렇게 윗눈썹과 아랫눈썹이 가깝게 같이 작용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너무 가까워서 그런지 자기를 못 보는 겁니다. 너무 가까워서 그런지 그대로 여여하게 사시면서도 마음으로는 집착과 관습에 그냥 모두 얽매여 가지고는 오히려 마음이 자기를 붙들고 부자연스럽게 만들어 놓는 거죠. 사방이 다 터졌는데 말입니다.
보세요. 마음이 체가 있습니까? 체가 있다면 내놔 보세요. 체가 없고 고정됨도 없고, 여기서도 집에 갔다 오시려면 한 찰나에 갔다 오실 수 있는 것입니다. 신발이 어디 놓여 있고 내 소지품이 어디 있고, 그런 것까지도 다 아시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그렇게 얽매여서 트이질 못하고, 물리가 터지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하고 둥글지 못하고 이래서 길면 긴 대로 길다고 야단, 짧으면 짧은 대로 짧다고 야단, 이렇게 해서 싸움이 일어나고 분별도 하고 이러죠.
그러니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죠. “짧으면 짧은 대로 네가 짧아 주고 길면 긴 대로 네가 길어 주고 둥글면 둥근 대로 네가 둥글어 주고, 이 세상에 모두 높지 않은 사람이 없느니라.” 내가 배를 타려고 뱃사공한테 간다면 뱃사공이 높고…. 내가 요즈음에 치과에 갔더니 말입니다, 치과 박사님이 제일 높습디다. 아무리 내가 높다고 생각을 해도 그건 망상입니다, 망상! 내가 잘한다고, 내가 잘 안다고 해도 망상입니다. 개미 소굴에 가 보십시오. 개미 소굴에서는 개미가 높습니다. 왜 부처님께서 “이 모두가, 미생물에서부터 일체 만물만생이 다 평등하니라.” 하셨겠습니까?
내가 생각할 때에 ‘우리는 항상 공했다고 하는 이런 말을 말로만 알지 왜 뜻을 모를까? 모두 내 부모 아님이 하나도 없고 내 자식 아닌 게 하나도 없고 내 형제 아닌 게 하나도 없다, 평등하다 이러는 그 가운데의 뜻을 왜 모를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미생물에서부터 수억겁 광년을 거쳐서 사람까지 화해서 이날까지 왔습니다. 진화됐습니다. 그리고 내 자신이
2009-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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