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상을 끊고 싶어요
운? 언제나 밝은 가르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스님, 저는 하루에 30분씩이라도 좌선을 하면서 마음을 비우려고 합니다만 끊임없이 올라오는 망상을 끊을 길이 없습니다. 어떡하면 좋을는지요?
답? 만약에 선생님이 이 생각 저 생각이 없다면 목석이지 그게 사람입니까? 안 그렇습니까? 그러니까 망상이라는 것은요, 사람을 성장시키기도 하고 도를 이루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겠죠. 그건 끊는 게 아니라 지켜보고 거기에 상관하지 말라는 얘깁니다. 그게 왜 그렇게 많은 생각이 나오느냐? 고정됨이 없이 말입니다. 여러분 몸속에 얼마나 의식들이 많습니까.
그런데 거기에 상관하지 마세요. 생각하는 것이 쓸 일이 있으면 쓰고, 자유스럽게, 생각할 일이 없으면 꽁지에 꽁지를 물고 망상이 일어나는 거, 그저 내일 모래 한 달 후의 일인데도 그냥 오늘서부터 그날까지 그냥 속을 썩이는 거죠. 그렇게 하지 마시고 좀 여유를 가지세요. 주인공에 맡기시고 침착하게 있으면 그때에 몸으로 할 거는 몸으로 하고 말로 할 거는 말로 하고. 보이지 않는 데의 그 마음을 전달하는 데는 바로 거기서 하거든요. 그럭하면 모든 일이 다 아주 순조롭게 될 것입니다.
평소에도 항상 근본이 당신이니까, 모든 것을 당신이 형성시켜 놨고, 당신이 모든 것을 하고 있으니 생각을 내게 하는 것도 당신이요, 생각을 안 내게 하는 것도 당신이니 모든 것은 당신에게 일임시키세요. 다 놔 버리세요. 모든 망상이 드는 것도 바로 자기 주처에서 내는 겁니다. 그러니 믿으세요. 믿고 놔 버리고, 또 들이고 내고 하는 것도 전부 주처에서 들이고 내고 합니다. 그러니 자기 주처를 주인공이라고 이름해서 붙이고 꼭 ‘주인공, 감사합니다.’ 하고 모든 것을 거기다 일임시키십시오.
그러니까 망상을 끊으려고 애쓰지 마시고 녹이라 이 소립니다. 거기에 끄달리지 마시라 이겁니다. 그러면 편안하지요. 그렇게 해 보세요. 아시겠어요?
시간과 공간도 없다고 하지만…
운? 예전에 ‘생명의 실상’이라는 책을 조금 읽어 본 적이 있는데요, 우리의 실상은 원래 시간과 공간도 없는 자리라고 하지만 분명히 우리가 살아가는 데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 같거든요. 이 진리에 눈을 뜨지 못하니 답답하기만 합니다.
답? 우리가 냉정히 판단해 볼 때 옛 사람도 없고 옛 물도 없고 옛 산도 없습니다. 우리 근본자리는 그대로 묵묵히 작용하면서 영원한 그 생명의 실상이 그대로 살아 있기에 ‘옛 것이다, 옛 것이 아니다’ 그런 언어가 붙지 않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살아나가다 보니까 이 육체로 인해서 옛날이다 지금이다 조상이다 후손이다 말들을 이렇게 해 놓고 있는 거죠. 그리고 작년이다 재작년이다 올이다 내후년이다 하고 말들을 해 놓은 거죠. 우리 인간이 살아나가면서 천차만별로 살아나가자니 문란치 않게 질서를 지켜야 하겠기에 우린 이름을 지어 놓고 그렇게 하고 있죠. 그래서 말하자면 지속된 꿈이지마는 지속된 실상의 삶이라고 볼 수 있겠죠. 지속된 삶의 근본을 알고, 그 근본의 도리가 생로병사를 통한 고집멸도 사제법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진화라는 과정에 의해서 걷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어떠한 진화력을 얻어서 탈바꿈을 하고 자꾸 지속된 한 발을 떼어 놔야겠기에, 그 과정은 고가 없이는 성립될 수가 없다고 해서 고집멸도라고 말씀을 했겠죠. 사계절이 그대로 돌아가듯이 인간도 추위를 무릅쓰고, 또는 더위를 무릅쓰고, 봄이 오고 가을이 오고 떨어졌다 피고 떨어졌다 피고 이렇게 지속되는 나날을 그대로 하면서 거기에서 계발을 한다면, 나무와 나무를 접을 붙이듯 열매와 열매가 모양이 달라져서 나오게 만들고, 그 연관성으로 인해서 진화력으로서 창조력을 키우고, 그래서 오늘날의 우리는 정신 개화가 되고 나아가서는 생명의 실상이 그대로 마음으로서, 한마음으로서 존재가 되고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촛불이 있다 할지라도 성냥을 그어서 갖다 대지 않으면 불이 되지 않듯이 그거는 누가 켰든 간에 내가 켜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켜진 겁니다. 그것이 바로 촛불이 아니라 마음의 불이죠. 그러니 안팎이 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작용하는 것이 전부 바로 나의 그 생명의 실상이 있기에, 거기는 없다 있다 하는 언어도 붙지 않는 자리이기에 그대로 여여하다는 뜻입니다.
그 생명의 실상은 영원히 지속되기 때문에, 우리가 꿈에도 몸은 누워서 잠을 자고 있지만 자기라는 그 자체는 그대로, 생각한 대로 움죽거리고 있죠. 꿈을 꿨다 안 꿨다 하는 것은 자기가 모르기 때문이지마는 항시 밤낮이 없이 움죽거리고 있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죠. 잠을 자도 잠이 없고 낮에 이렇게 돌아다녀도 돌아다닌다는 자체가 없고. 여러분은 몸이 다니니깐 내가 다닌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나 아닌 참나가 있기에 바로 내가 움죽거리고 있을 뿐입니다. 꿈에는 꿈대로 내가 움죽거리는 게 아닌가요? 바로 나 아닌 내가, 그 분신이 움죽거리고 있는 그건 환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실제적인 환상입니다. 생각 없는 일을 하는 법이 없고 생각 없는 일을 설계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엉뚱하게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자기가 나기 이전에 인연의 소치로 만난 인연들이죠. 꿈에서는 우리가 하루를 지낸다 하면 일 년을 지낸 듯이, 하룻밤에 일 년을 지낼 수도 있고 삼 년을 지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룻밤에 수없는 나날을 보내면서 살다가 끝을 마치지도 못하고 어떠한 문제가 생겨 가지고선 깨다 보면 새로 한 시다 새로 두 시다 세 시다 이런 소리를 하게 됩니다. 깨 보니깐 그렇더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룻밤에도 몇 차례씩 시간과 공간이 없는 세계에 도달해 있다가 아침에 일어나면 시간을 따지면서 또 살아나가고 있습니다. 따질 필요도 없는데 왜 그걸 따져야 하느냐? 한두 사람이 산다면 따질 필요도 없지만 천차만별로 모두 여러 생명들이, 아니 여러 물체들이 살기 때문에 그것은 그렇게 따지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시간도 정해 놓고 달도 정하고 해도 정하고 날도 정했죠. 이것을 정하지 않으면 질서가 문란해지고 또는 충성이나 효도도 없을 것이고 아주 고등 동물의 행을 지킬 수가 없기 때문에 바로 그렇게 질서를 지키게 해 놓은 거죠.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과거에도 현실에도 미래에도 우주 삼세를 두고 말할 때, 우리가 수없이 헤아릴 수 없이 몸바꿈을 했다 할지라도 바로 ‘과거’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그런데 그 과거에 수없이 탈바꿈을 해 가지고 자기 형상을 형성시켰건만 자기는 그것을 아예 모르는 채, 지금 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