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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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났든 잘났든 자기밖에 믿을 게 없어요
자기 마음의 지혜에 따라서 인연의 업보를 지을 수도 있고
인연의 업보를 부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망상을 끊고 싶어요
운? 언제나 밝은 가르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스님, 저는 하루에 30분씩이라도 좌선을 하면서 마음을 비우려고 합니다만 끊임없이 올라오는 망상을 끊을 길이 없습니다. 어떡하면 좋을는지요?
답? 만약에 선생님이 이 생각 저 생각이 없다면 목석이지 그게 사람입니까? 안 그렇습니까? 그러니까 망상이라는 것은요, 사람을 성장시키기도 하고 도를 이루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겠죠. 그건 끊는 게 아니라 지켜보고 거기에 상관하지 말라는 얘깁니다. 그게 왜 그렇게 많은 생각이 나오느냐? 고정됨이 없이 말입니다. 여러분 몸속에 얼마나 의식들이 많습니까.
그런데 거기에 상관하지 마세요. 생각하는 것이 쓸 일이 있으면 쓰고, 자유스럽게, 생각할 일이 없으면 꽁지에 꽁지를 물고 망상이 일어나는 거, 그저 내일 모래 한 달 후의 일인데도 그냥 오늘서부터 그날까지 그냥 속을 썩이는 거죠. 그렇게 하지 마시고 좀 여유를 가지세요. 주인공에 맡기시고 침착하게 있으면 그때에 몸으로 할 거는 몸으로 하고 말로 할 거는 말로 하고. 보이지 않는 데의 그 마음을 전달하는 데는 바로 거기서 하거든요. 그럭하면 모든 일이 다 아주 순조롭게 될 것입니다.
평소에도 항상 근본이 당신이니까, 모든 것을 당신이 형성시켜 놨고, 당신이 모든 것을 하고 있으니 생각을 내게 하는 것도 당신이요, 생각을 안 내게 하는 것도 당신이니 모든 것은 당신에게 일임시키세요. 다 놔 버리세요. 모든 망상이 드는 것도 바로 자기 주처에서 내는 겁니다. 그러니 믿으세요. 믿고 놔 버리고, 또 들이고 내고 하는 것도 전부 주처에서 들이고 내고 합니다. 그러니 자기 주처를 주인공이라고 이름해서 붙이고 꼭 ‘주인공, 감사합니다.’ 하고 모든 것을 거기다 일임시키십시오.
그러니까 망상을 끊으려고 애쓰지 마시고 녹이라 이 소립니다. 거기에 끄달리지 마시라 이겁니다. 그러면 편안하지요. 그렇게 해 보세요. 아시겠어요?

시간과 공간도 없다고 하지만…
운? 예전에 ‘생명의 실상’이라는 책을 조금 읽어 본 적이 있는데요, 우리의 실상은 원래 시간과 공간도 없는 자리라고 하지만 분명히 우리가 살아가는 데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 같거든요. 이 진리에 눈을 뜨지 못하니 답답하기만 합니다.
답? 우리가 냉정히 판단해 볼 때 옛 사람도 없고 옛 물도 없고 옛 산도 없습니다. 우리 근본자리는 그대로 묵묵히 작용하면서 영원한 그 생명의 실상이 그대로 살아 있기에 ‘옛 것이다, 옛 것이 아니다’ 그런 언어가 붙지 않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살아나가다 보니까 이 육체로 인해서 옛날이다 지금이다 조상이다 후손이다 말들을 이렇게 해 놓고 있는 거죠. 그리고 작년이다 재작년이다 올이다 내후년이다 하고 말들을 해 놓은 거죠. 우리 인간이 살아나가면서 천차만별로 살아나가자니 문란치 않게 질서를 지켜야 하겠기에 우린 이름을 지어 놓고 그렇게 하고 있죠. 그래서 말하자면 지속된 꿈이지마는 지속된 실상의 삶이라고 볼 수 있겠죠. 지속된 삶의 근본을 알고, 그 근본의 도리가 생로병사를 통한 고집멸도 사제법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진화라는 과정에 의해서 걷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어떠한 진화력을 얻어서 탈바꿈을 하고 자꾸 지속된 한 발을 떼어 놔야겠기에, 그 과정은 고가 없이는 성립될 수가 없다고 해서 고집멸도라고 말씀을 했겠죠. 사계절이 그대로 돌아가듯이 인간도 추위를 무릅쓰고, 또는 더위를 무릅쓰고, 봄이 오고 가을이 오고 떨어졌다 피고 떨어졌다 피고 이렇게 지속되는 나날을 그대로 하면서 거기에서 계발을 한다면, 나무와 나무를 접을 붙이듯 열매와 열매가 모양이 달라져서 나오게 만들고, 그 연관성으로 인해서 진화력으로서 창조력을 키우고, 그래서 오늘날의 우리는 정신 개화가 되고 나아가서는 생명의 실상이 그대로 마음으로서, 한마음으로서 존재가 되고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촛불이 있다 할지라도 성냥을 그어서 갖다 대지 않으면 불이 되지 않듯이 그거는 누가 켰든 간에 내가 켜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켜진 겁니다. 그것이 바로 촛불이 아니라 마음의 불이죠. 그러니 안팎이 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작용하는 것이 전부 바로 나의 그 생명의 실상이 있기에, 거기는 없다 있다 하는 언어도 붙지 않는 자리이기에 그대로 여여하다는 뜻입니다.
그 생명의 실상은 영원히 지속되기 때문에, 우리가 꿈에도 몸은 누워서 잠을 자고 있지만 자기라는 그 자체는 그대로, 생각한 대로 움죽거리고 있죠. 꿈을 꿨다 안 꿨다 하는 것은 자기가 모르기 때문이지마는 항시 밤낮이 없이 움죽거리고 있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죠. 잠을 자도 잠이 없고 낮에 이렇게 돌아다녀도 돌아다닌다는 자체가 없고. 여러분은 몸이 다니니깐 내가 다닌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나 아닌 참나가 있기에 바로 내가 움죽거리고 있을 뿐입니다. 꿈에는 꿈대로 내가 움죽거리는 게 아닌가요? 바로 나 아닌 내가, 그 분신이 움죽거리고 있는 그건 환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실제적인 환상입니다. 생각 없는 일을 하는 법이 없고 생각 없는 일을 설계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엉뚱하게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자기가 나기 이전에 인연의 소치로 만난 인연들이죠. 꿈에서는 우리가 하루를 지낸다 하면 일 년을 지낸 듯이, 하룻밤에 일 년을 지낼 수도 있고 삼 년을 지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룻밤에 수없는 나날을 보내면서 살다가 끝을 마치지도 못하고 어떠한 문제가 생겨 가지고선 깨다 보면 새로 한 시다 새로 두 시다 세 시다 이런 소리를 하게 됩니다. 깨 보니깐 그렇더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룻밤에도 몇 차례씩 시간과 공간이 없는 세계에 도달해 있다가 아침에 일어나면 시간을 따지면서 또 살아나가고 있습니다. 따질 필요도 없는데 왜 그걸 따져야 하느냐? 한두 사람이 산다면 따질 필요도 없지만 천차만별로 모두 여러 생명들이, 아니 여러 물체들이 살기 때문에 그것은 그렇게 따지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시간도 정해 놓고 달도 정하고 해도 정하고 날도 정했죠. 이것을 정하지 않으면 질서가 문란해지고 또는 충성이나 효도도 없을 것이고 아주 고등 동물의 행을 지킬 수가 없기 때문에 바로 그렇게 질서를 지키게 해 놓은 거죠.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과거에도 현실에도 미래에도 우주 삼세를 두고 말할 때, 우리가 수없이 헤아릴 수 없이 몸바꿈을 했다 할지라도 바로 ‘과거’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그런데 그 과거에 수없이 탈바꿈을 해 가지고 자기 형상을 형성시켰건만 자기는 그것을 아예 모르는 채, 지금 현실의 형성된 나가, 바로 내 모습이 난 줄 알고 시간만 따지고 급급해서 날짜만 보고 애를 쓰고 사는 것입니다. 참자기의 근본이 있는 줄은 모른 채 자기가 그냥 자기라고만 하고 그렇게 살다 보니까, 사람이 사람의 도리를 지키지 못하게 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로 불편한 점이 많은 거죠.
옛 물도 없고 옛 산도 없고 옛 사람들도 없다고 했습니다. 거기에는 언어가 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없는 가운데서 우리는 작용하고 이렇게 그냥 그대로 자기의 마음의 지혜에 따라서 인연의 업보를 지을 수도 있고 인연의 업보를 부술 수도 있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그 인연의 업보를 짓지 못하는 것은, 없애지 못하는 것은 자꾸 자기라고 하기 때문에, 자기가 한다고 하기 때문에, 매사를 자기가 한다고 그러기 때문에 그 업보를 짓는 것입니다. 자기의 그 모습은 지속될 수 없지만 참자기는 지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나는 개별적인 나가 아니라 포괄적인 나입니다. 유생 무생이 한데 합쳐지고 일체 만물이 다 합쳐진 이 내공에 의해서 모든 것은 자기가 할 탓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니깐 아니다 기다 이 언어가 붙지 않는 이 자리에, 꿈이다 생시다 이러한 게 붙지 않는 자리, 즉 말하자면 시간과 공간과 그 말이 붙지 않는 자리, 생사윤회도 붙지 않는 자리, 그 자리에서 그대로 여여하게 내가 나를 이끌어 갈 수 있는, 하달을 할 수 있고 상신할 수 있고 한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는 그 능력이 바로 모든 사람들에게 다 갖춰져 있다는 것을 아시면 됩니다.

살아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운? 안녕하세요. 저는 미술을 전공으로 공부하고 있는 대학생이랍니다. 그림그리는 게 좋아서 열심히 그리기는 하지만 내 혼을 다 실은 작품은 아직 나오지가 않습니다. 스님, 저도 마음을 다하여 살아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한 말씀 일러주십시오.
답? 어느 시골에 떠꺼머리 총각이 하나 있었더랍니다. 나무를 태우면 숯이 나오는 그걸로 항상 땅에다 그림을 그리고는 했어요. 근데 하루는 여자 생각이 나니깐 여자를 그려 놓고 집에 가서 실컷 자고선 저녁 나절에 나왔더니 아, 거기 예쁜 여자가 그대로 말을 하더랍니다, 그려 놓은 데서. 그래서 거기에서 말하는 소리를 듣고 ''내가 숯으로 그려 놨는데 말을 하네?'' 하는 동시에 그 여자도 없어지더랍니다. 그래서 그 총각은 그때서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지금으로 치면 미술이라고 하죠. 그저 어디고 붓과 먹 이런 걸 가지고선, 종이만 사 가지고 짊어지고 다니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산하도 그리고 그냥. 그런데 어느 산중에 들어서니까 그렇게 다니면서 그려 놓은 여자가 뭐라고 말하느냐 하면 “그림을 그릴 때도, 또 살아나갈 때도 말하지 말라.” 했답니다. 생각하지 말라는 거죠. 생각하지 말라 하고선 그냥 없어졌거든요. 그래서 그것을 믿고 생각을 안 한 겁니다. 인생을 살아나가는 것도 생각 안 하고 그저 그저 가다가 보기 좋으면 그린 겁니다.
근데 어딜 가다 보니까 노인네 한 분이 혼자 딸을 잃고 두 다리를 쭉 뻗고 울고 있거든요. 아, 시골 초막집에서 그렇게 울고 있으니까 자기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을 해서 그 사람을 끌어다 놓으면서 “아, 왜 우시느냐.” 하니까 자기 딸이 자기 혼자만 남겨 놓고 죽었으니 나는 어떻게 살라느냐 하면서 울더랍니다. 그리고 또 뭐가 있어야 살지 않느냐 그러더랍니다. 딸이 바느질품을 팔았는데 인제는 살 수가 없다고 하더랍니다.
그런데 그런 거 걱정 하나도 하지 마시라고, 따님이 죽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그러고선 그날 저녁에 큰 헝겊에다가 종이를 붙여 가지고 대필을 해 가지고는 아주 찢어지지 않게 만들어서는 거기다가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집 딸을요. 아, 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딸과 똑같이 그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심안으로서 그 딸을 착을 놓고 보니까 아이구! 그 딸이 나오거든요.
그래서 그 딸을 고대로 그렸어요. 큰 배를 하나 그려 가지고 거기 떠억 앉혀 놨단 말입니다. 그러곤 물도 그려 놓고 나무도 그려 놓고 그래 놓고선 처억 벽에다 걸어 놓고 하는 소리가, 여기서 딸이 저녁이면 나와서 항상 밥을 해 줄 테니 비밀로만 하라고, 나는 딸을 봤다든가 딸이 이렇게 잘해 준다든가 이런 거를 비밀로 허라고 이렇게 그림쟁이가 일러 주고는 벽에다 붙여 주고 이건 절대로 누구한테 얘기하지도 말라고 그러고선 갔거든요. 그날 저녁부터 거기서 그 딸이 나와 가지고선 고깃국도 끓여 주고 밥도 해다 주고 다 그냥 또 새벽녘이면 골로 싹 들어가면 고만이거든요.
그러면 그 그림 그리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됐기에 그렇겠습니까? 바로 그것이 무심과 유심이 둘이 아니어서 그렇습니다. 무심이라면 유심이고 유심이라면 무심이니 무심도 아니요 유심도 아닌, 누가 그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유심도 아니고 무심도 아닌 그 마음을 누가 가지고 있을까?
그래서 그림 하나를 그린다 할지라도 산 그림이요, 글자 하나를 쓴다 하더라도 산 글이요, 말 한마디를 한다 하더라도 산 법이요, 이렇게 되죠. 그러니 이제부터는 내 손이 그리는 게 아니라 바로 진짜 참나 손이 내 손으로 인도해서 그린다는 것을 꼭 믿으세요, 그렇게 주인공을. 거기서 살 길이 꼭 나와요.

우리가 사랑한다는 게…
운? 요즘은 자기를 희생하며 참고 살아가려는 마음을 가진 분들이 귀하게 여겨집니다. 그래서 이혼률도 높아지나 봅니다. 사실 저의 친한 친구도 죽고 못 살겠다고 우겨서 결혼하더니 남편이 교통사고로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게 되면서 어쩔 수 없이 친구가 살림을 꾸려나가야 되는 상황이 되다 보니 차츰 마음이 변해 가는 겁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사랑한다는 게 과연 뭘까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답? 그러니까 못났든 잘났든 자기밖에 믿을 게 없습니다. 자기가 아프면 자기가 아픈 것을 더 잘 알고, 자기가 넘어지면 자기 손이 제일 먼저 가고, 아무리 친절하고 아무리 부부지간이고 아무리 자식부모지간이라도 자기 아픈 거는 상대방이 진짜 다 100% 알아주지 못합니다. 그것도 하루 이틀, 한두 달이지 만약에 일 년이 넘어가 보세요. 불쌍하긴 불쌍하다고 하나 그건 진저리가 나는 거죠. 그러니 누구도 믿을 게 없어요. 나밖에는. 내가 나를 믿고 사는 거밖엔 없습니다. 즐거운 사랑? 참, 무슨 사랑이 그런 사랑이 있느냐 이겁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실지 모르지만 나는 그래요. 잠시 잠깐 사랑한다고? 그게 뭐 말라빠져 죽은 사랑이냐 이겁니다. 싫으면 뱉고 달면 삼키고 이러는 게. 이 세상 살아나가는 게 그래도 자기한테 이익 해야만이 택하지 해롭게만 돌아온다면 그건 택하지 않죠. 사랑하다가도 자기한테 앞으로 장래에 해로울 일이라면 절대 사랑하지 않아요. 일 년만 만약에 앓고 드러누웠어도 사랑은 멎어지죠. 다른 데로 옮겨집니다. 그리고 몹쓸 병이 들었을 땐 죽기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죠. 아니라고요? 아니라고 말은 그러지마는 속으론 그렇질 않을 거예요. ‘차라리 죽는 게 낫겠지.’ 하는 생각이겠죠.
그러니 간단하게 말하자면 누구도 믿을 게 없다는 겁니다. 자식도, 아무것도 믿을 게 없어요. 그걸 자식이 또 들으면 섭섭할지도 모르죠. 그렇지만 그런 게 아니고, 믿을 게 없다는 겁니다. 이것은 예를 들어서 근본적인 것을 말하는 겁니다. 근본. 아까 얘기했죠? 만약에 자식도 일 년 이태만, 삼 년만 드러누워 있어 보세요, 어떻게 되나. 또 부모가 이태 삼 년만 드러누워 있어 보세요, 어떻게 되나. 서로 다 똑같아요. 그러니까 빨리 죽어 주는 게 효자고 효녀고, 그런 것뿐이죠. 빨리 죽어 주는 게 자식한테 짐을 덜어주는 일이기 때문에 그런 것뿐이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따지게 되면 다 소용이 없다 이 소리에요. 일체 만물, 물질이라는 것은 다 변질이 있기 때문에 진정한 사랑은 못 된다는 얘기죠. 변하기 때문에.
그런데도 자꾸 속는단 말입니다. 아니, 천신 만신 고생해서 시중들고 뭐 하고 또 남자는 남자대로 들입다 벌어다가 주고 이러고선 배신을 당하고. 그래, 내쫓기지는 않아도 마음으로 떠났으면 벌써 배신당하는 거지 뭐 별 수 있나요? 몸뚱이만 있으면 뭘 합니까? 누구든지 살면서 배신을 수차 당하면서 다시 또 붙어 돌아가고 또 배신을 당하면서 다시 이렇게 연결되고 이럭하면서 살죠. 죽을 때까지 사랑하고 사는 사람 잘 없을 거예요. 누구든지 그럴 거예요, 아마.
이십사 시간 동안에 한 번 편안하게 사랑하기가, 한 시간 편안하게 사랑하기가 어려워요. 하루 이십사 시간 동안에 고정되게 한 시간씩 참사랑을 할 수만 있다면 그것도 이 왕자 부럽지 않겠죠. 그런데 그게 아니거든요. 아마 그 한 시간이 싸움으로 변할지도 모르죠, 사랑은커녕.
그런데 나는 욕심이 많아서, 여러분보다 나는 욕심이 더 많을 겁니다, 아마. 나는 근본적으로, 그렇게 조금 사랑하다가 치울 거라면 차라리 사랑하지 않겠다는 거죠. 이 세상에 나와도 조금 살다가 그냥 변질되고 없어질 물건이라면 차라리 물건으로 나오질 않겠다 이겁니다. 물건으로 나오더라도 아주 변함도 없고 남한테 이익을 줄 수 있고 눈요기도 시킬 수 있게 나온다면…. 그런데 그렇게 보여 주기만 하면 뭘 하겠습니까, 또? 그러니까 차라리 그저 죽이면 죽, 밥이면 밥 여러분이 사는 대로 좇아서 그냥 흐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살아나가는 데에 화목하게 지내고 사랑으로 지내려면 나의 주인공으로 하여금, 자가발전소에서 모든 불을 켜서 방 안을 다 밝게 하면 눈이 컴컴하질 않아서 “여보! 여기 있으니 잡숴요.” 이럴 수도 있고, “얘! 여기 있으니 먹을 거 먹어라.” 이럴 수도 있는 거지마는 방이 캄캄하면, 내가 불을 안 켜면 캄캄한 거죠. 방통이 다 캄캄한데, 전부 눈이 캄캄한데 뭐를 봐서 사랑이고 뭐고 있겠어요?
글쎄 그렇지 않습니까? 나도 어떤 때는 그럴 때가 있어요. 아이구, 세상에, 사랑들 한다고 그래 봤자 내가 보는 바에는, 기껏 털고 닦고 해 먹이고 해 주고 빨아 입히고 이래도, 그리고 또 남자들은 그 고생을 하고 손발을 널리고 이렇게 해서 기껏 벌어다가 줬는데 말이죠, 여자가 씀씀이를 헤프게 그렇게 쓸 때에는 ‘아이구! 이거 정말이지 너무하는군. 너무하는군, 모두.’ 이런 생각이 들죠. 그러니까 대의적으로 봐서 하는 얘기예요. 개별적으로 얘기하는 게 아니라.
그런데 나는 그렇게 생각이 들어요. 정말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죽어도 살아도 더 불쌍하게 생각이 들고, 하다못해 먹을 게 없으면 죽거리라도 얻어다가 같이, 숟갈 두 개를 꽂아 놓고 같이 먹을지언정 어찌 사랑하는 사람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이런 겁니다, 나는. 단지 인간의 참마음, 사랑할 수 있는 마음, 그게 중요한 거지 그까짓 것 거적을 쓰고 죽으나 좋은 공단 이불을 쓰고 죽으나 그게 무슨 상관 있느냐 이겁니다.
그러니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산다 하는 말이 있지만, 본래 죽고 사는 게 없이 같이 사는 겁니다. 말을 하려니까 이렇게 하는 겁니다. 왜? 부동한 능력으로써 바로 그 모든 거를 활용하고 움죽거리게 되니까, 이 육신이 무너진대도 불과 법이 둘이 아니기에, 우리가 삶을 보람 있게 살면서 항상 나 아님이 없이 즐겁게 산다는 얘깁니다. 어느 것도 나 아님이 없기 때문에 사랑을 항상 하고 있다는 얘기죠. 나를 내가 사랑한다는 거, 변소엘 가도 같이, 언제나 같이 해 주는 그 영원한 사랑은 바로 내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사시기 바랍니다.

정말 외계인이 있을까요?
운? 얼마 전 기개일식이 일어날 즈음에 중국에서 만두 모양의 비행 물체를 발견했다는 인터넷 기사를 봤습니다. 스님께서는 화성에도 뭔가 살고 있다고 말씀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어리석은 질문이겠지만 스님께서는 정말 외계인이 있다고 보십니까?
답? 화성에도 잘 살고 있다는 그 사실이 아마 맞을는지도 모르죠. 왜? 모습이 꼭 보여야만 잘 살고 있는 건 아니니까 이 모습 없는 모습으로 이것은 우리보다도 벌써 한 계단 초월해서 넘어갔다고 볼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외계인은 따로 없습니다. 지금 우리 지구 안에서도 모르게 어떠한 지역에서 살면 외계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봐도 우리가 모르는 고장도 많습니다. 그리고 모르는 그러한 생명들이 우리보다 더 고도로 발달이 돼서 사는 분들도 또 있죠. 우리만 이렇게 고도로 발달을 만들고 이렇게 진화가 돼서 인간으로만이 우리만 산다는 생각은 버리셔야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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